(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회화와 서예 편
회화 예술
회화 제재와 표현 기교가 끊임없이 풍부해짐에 따라, 당대(唐代) 회화는 명확한 분과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유명 화가가 쏟아져 나와 사서에 기록된 사람만 해도 200여 명에 달했으니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화가들은 인근 지역과 외래의 영향을 끊임없이 흡수하는 바탕 위에서 예술 표현 기교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창작 제재도 전례 없는 넓이로 확장했다. 인물, 산수, 안마(鞍馬 말과 마구), 화조(花鳥) 및 종교 경변(經變) 벽화가 모두 점차 독립된 그림 종목으로 성장했으며, 정교하게 그리고 짙게 색을 칠하는 찬란하고 다양한 화풍이 이때 이미 성숙했다.
특히 인물화는 현실 생활을 반영하고 인물의 정신적 기질을 묘사하는 데 더욱 주의를 기울였으며, 산수화는 청록(靑綠)과 수묵(水墨)이라는 양대 체계로 나뉘어 남북의 서로 다른 지역성 풍격을 낳았다. 화조화는 공들여 그리고 색을 칠하는 공필설색(工筆設色), 수묵담채, 윤곽선 없이 그리는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창립했다. 종교화 역시 더욱 화려하고 다채롭게 나타났다. 이 외에도 당(唐) 시기의 벽화, 예컨대 궁전, 사찰, 여관, 석굴, 묘실 등의 벽화는 부귀하고 화려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족자(두루마리) 그림도 흥기하기 시작하여, 창작·수장·감상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점차 유행했다. 당대(唐代)의 회화 성취는 이전 각 조대를 뛰어넘어 기세가 호방하고 영향이 당시 동방 각국에 미쳐 중국 회화사에서 최고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물화(人物畵)
당 태종은 미술을 이용해 공훈을 표창하고자 했으며, 미술이 “교화(敎化)를 이루고 인륜을 돕는다”는 사회적 기능을 가지기를 요구했기에 당조 인물화가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고 염립본(閻立本), 장훤(張萱), 오도자(吳道子) 등 인물화에 능한 대화가들이 출현하여 성과가 매우 돋보였다. 인물화는 당대에 황금기 진입했다.
염립본과 기이한 복장의 조공 사절도
염립본은 당 태종의 궁중 화가이자 서예가다. 인물, 수레와 말, 대각(臺閣)에 이르기까지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특히 초상화에 능했다. 대표작으로는 ‘능연각 24공신도’, ‘진부(秦府) 18학사’, ‘역대제왕도’가 있다. 그의 화법은 고개지(顧愷之)의 선묘화(線描畫) 및 형상으로 정신을 그리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함의를 익혔고, 장승요(張僧繇) 인물화의 풍만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취했기에 선이 억세고 강하며 필력(筆力)이 웅혼하고, 공필과 색칠이 비단 바탕을 짙게 뚫고 들어갔다. ‘직공도(職貢圖)’와 ‘보련도(步輦圖)’는 태종의 조명(詔命)을 받들어 그린 것이다. ‘직공도’는 당시 각 민족과 외국 사절들이 장안으로 와 ‘천가한(天可汗)’을 접견하던 흥미로운 풍경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보련도’는 정관 15년, 당 태종이 토번(오늘날의 티베트 지역) 찬푸 송첸감포가 보낸 맞이 사절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장훤과 주방의 우아한 사녀화(仕女畫)
장훤은 성당 사녀의 모습을 ‘굽은 눈썹과 풍만한 뺨’으로 그리는 화풍을 열었으니, 그린 인물의 표정이 생동감 있고 몸짓이 단정하며 의상이 밝고 매혹적이며 마음이 한가하다. 그림 속 제재는 대부분 현실 생활에서 유래하여 후대 풍속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해지는 명작으로는 ‘도련도(搗練圖), ’괵국부인유춘도(虢國夫人遊春圖)‘ 등이 있습니다.
주방(周昉)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 그림에 능한데, 화풍은 처음에 장훤을 본받았으나 나중에는 조금 달라져 점차 “풍후함을 체(體)로 삼고, 옷 주름은 억세고 간결하며, 색채는 부드럽고 고운” 특징을 형성했으니 후인들은 이를 ‘주가양(周家樣)’이라 불렀다. 화면 구도는 흔히 배경을 두지 않고, 서로 다른 인물들이 활동으로 스스로 단락을 이루면서도 서로 관련되게 했으며, 필치는 예스럽고 질박하며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다. 그가 그린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휘선사녀(揮扇仕女)‘, ’잠화사녀(簪花仕女)‘, ’탄금사녀(彈琴仕女)‘, ’내인쌍륙도(內人雙陸圖)‘ 등이 있어 인물의 옷과 머리장식이 밝고 화려하며 부귀하고, 정갈하고 세밀하여 당대 부녀의 온화하고 고운 의용과 풍모를 진실하게 재현했다.
화성(畫聖) — 오도자
오도자는 대당 종교화의 뛰어난 대표자다. 그는 장안과 낙양 두 곳에서 수많은 종교 벽화를 그렸다. 그가 그린 천녀(天女)는 “눈짓을 보내며 말하려는 듯”하고, 보살은 “눈을 돌려 사람을 바라보는 듯”하며, 역사(力士)는 “구불구불한 수염과 구름 같은 관자놀이 털이 몇 척이나 날리고, 털뿌리가 살에서 돋아나 건장한 힘 있는 듯”했다. 그는 또한 동진(東晉) 고개지 이래로 굵기가 한결같던 ‘철선묘(鐵線描)’를 한 번 바꾸어, 가볍고 무거우며 멈추고 꺾이는 것이 마치 리듬이 있는 듯한 ‘난엽묘(蘭葉描)’에 능했다. 그가 그린 옷주름은 위로 흩날리는 기세가 있어 “붓은 다하지 않아도 뜻은 다하는” 오묘함을 이루었다. 붓을 내릴 때는 바람이 쓸쓸히 일어 천상의 옷이 날렸기에 “오도자의 띠가 바람을 받는다는 의미의 오대당풍(吳帶當風)”이란 찬사가 있었고, 색을 칠할 때는 부드럽게 살짝 물들여 비단 바탕을 뛰어넘으니 세상에서는 이를 ‘오장(吳裝)’이라 불렀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수많은 도살업자가 그의 지옥경변화(地獄經變畫 역주: 불교 경전에 나오는 지옥의 세계와 인과응보를 그림으로 알기 쉽게 그려낸 종교화)를 보고 마음에 두려움이 생겨 다투어 업종을 버리고 전업하는 바람에 저잣거리에 한때 물고기와 고기가 부족한 기이한 광경이 출현했다고 한다. 이에 오도자의 그림 이름이 더욱 유명해져서 그를 찾아와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봉금(封禁)’해 황제의 명령이 없으면 함부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보살도(菩薩道)》, 《87신선도권(八十七神仙圖卷)》, 《실적빈사라상축(實積賓伺羅像軸)–빈비사라 왕의 공덕을 그린 두루마리》 등의 그림에서 그의 ‘신이 내린 붓(神來之筆)’의 풍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장욱(張旭)의 초서, 배민(裴旻)의 검술과 함께 당시의 ‘삼절(三絶)’로 칭송받았으며, 그 영향이 멀리 일본과 한국 등지까지 미쳤다. 지금도 일본에는 그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송자천왕도(送子天王圖)–천왕이 아이를 보내주는 그림》가 보존되어 있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오도자에 관한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실려 있다. 한번은 오도자가 한 승려를 찾아가 차 한 잔을 청했으나, 승려가 그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자 붓과 먹을 가져오라 하여 찻잔 위에 나귀 한 마리를 그리고 떠났다. 밤이 되자 나귀가 그림 밖으로 내려와 승려의 가구를 모두 짓밟아 놓아 집 안이 한통속으로 어질러졌다. 승려는 오도자가 자신을 놀린 것임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자, 오도자가 나귀를 칠해 없애 버렸다.
이채롭고 다채로운 산수화조화(山水花鳥畫)
당대(唐代)의 산수화는 수대(隋代)를 이어 더욱 활발하게 발전하여 풍격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주요 유파를 형성했다. 하나는 무신(武臣)인 이사훈(李思訓)·이소도(李昭道) 부자(흔히 대소 이장군이라 부른다)를 대표로 하는 청록산수(靑綠山水)이고, 하나는 문신(文臣) 왕유(王維 흔히 왕우승이라 부름)를 대표로 하는 수묵산수(水墨山水)다.
초당(初唐)의 이사훈은 “국조(國朝) 산수(山水) 제1″이라는 아름다운 명성을 누렸다. 그는 중국 산수화사에 “청록을 바탕으로 삼고 금빛과 푸른빛으로 문양을 만든다”는 일파를 확립했다. 구도가 세밀하고 정교하며, 색을 칠함이 짙고 침착하고, 필치가 화려하고 웅장해서 ‘북종(北宗)’이라고도 불렀다. 청록산수는 윤곽을 그리는 것을 법으로 삼아 붓을 씀이 세밀하고 번쇄하며, 색상은 석청(石靑)과 석록(石綠)을 위주로 했다. 때로는 중점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금가루로 윤곽을 그려 화면에 금빛과 푸른빛이 찬란한 장식 효과를 내게 했으니 밝고 화려하며 장관을 이루고 정교함이 감동적이다. 이사훈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강범누각도(江帆樓閣圖)》, 이조도의 《명황행촉도(明皇幸蜀圖)》 등은 색채가 부유하고 화려하며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 오랫동안 감상할 만하다.
성당(盛唐)의 대시인 왕유(王維)는 ‘파묵선경(破墨禪境 먹물이 자연스럽게 번지게 해서 선의를 드러내는 기법)’ 산수화법을 발명했다. 그가 그린 산천과 눈 내린 강 풍경은 흔히 쓸쓸하고 담박하며 아득한 정취를 가져 진정으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의경(意境)에 도달해 ‘남종(南宗)’으로 칭송받았다. 수묵산수는 물들임을 법으로 삼아 붓을 씀이 간결하고 분방하며, 수묵 효능의 발휘를 강조하여 그것으로 경물(景物)의 체(體)와 면(面)을 표현했다. 색을 칠할지라도 자연스럽고 맑고 담박함을 숭상해 함축적이고 그윽하며 순수한 경지를 추구했으니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음[畫中有詩,詩中有畫]”을 높게 여겼다. 왕유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설계도(雪溪圖)》는 담담하고 천진(天眞)해서 감정이 완곡해 오래 음미할 만하다.
인물·산수화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화조주수화(花鳥走獸畫 꽃과 새 및 짐승 그림)도 독립된 발전 단계로 진입하여 궁중과 민간의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으며, 화조(花鳥)만을 전담해 그리거나 소나 말만을 전문적으로 그린 뛰어난 화가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예컨대 설직(薛稷)은 학을 잘 그려 두보가 시를 찍어 그 학 그림을 “낮고 높음이 각각 뜻이 있고, 씩씩하고 굳세어 마치 키 큰 사람 같다.(低昂各有意,磊落如長人)”고 했다.
강교(姜皎)는 매를 잘 그려 화면이 두드러지게 사람을 압도하고 숙살의 기운이 가득했다.
다시 조패(曹霸)는 말을 잘 그려 생기가 넘치고 탈속했다. 그의 제자 한간(韓幹)은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되어 《조야백도(照夜白圖)》를 그렸는데, 갈기 손질을 거치지 않은 매끄러운 털을 윤곽선으로 그린 뒤 약간 물들여 한 마리 야생 말이 자갈밭에서 미친 듯 폭주하며 굴레를 쓰지 않으려는 몸짓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마치 용이 날아오르고 호랑이가 뛰어오르는 듯,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기세가 가득해 붓을 마구 휘두른 자국이 없다. 그는 당 현종에게 “마굿간 에 있는 좋은 말들이 모두 자신이 그림을 배운” 스승이라고 했다. 한간이 그린 말은 다리가 짧고 몸집이 풍만하고 호방한 기운이 가득해 ‘당마(唐馬)’라는 칭호가 있었으니 후세에 비교적 깊은 영향을 미쳤다.
벽화
돈황 막고굴에 현존하는 동굴의 절반 이상이 수당(隋唐)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이 동굴들 안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경변(經變)’과 공양인을 위주로 한 벽화가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어 불경 이야기를 서술하거나 공양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전대(前代)의 불본생(佛本生 부처님 전생) 및 설법도에 편중된 것과는 조금 달라 광채가 선명하고 중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음산하고 비참한 정조를 대신했고, 태평한 극락 장면이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는 불국(佛國) 세계를 묘사했다. 경변 내용을 둘러싼 묘사 속에는 연회, 열병(閱兵), 의료 시술, 행상, 농경 등의 생활 장면이 끼워져 있어 간결하고 진실하며 정취가 풍부하다.
예컨대 《서방정토변도(西方淨土變圖)》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 외에 그림 속에 화려한 누각, 신선의 산과 푸른 나무를 펼쳐 놓았고 악대(樂隊)가 연주하며 춤추는 모습이 날아올라 한바탕 꽃다발이 모이고 화려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돈황 벽화의 인물 조형은 거칠던 것에서 세밀함으로 진입하여 몸집이 정확하고 생동감 있었으며, 남자는 넓은 옷에 넓은 띠를 매어 기상이 차분하고 여유가 있었으며 여자는 몸매가 풍만하면서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특히 보살상은 현실 생활 속 여성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드러내 단정하고 차분하며 얌전하고 귀여우면서도 온유하고 친근했다.
돈황 벽화 외에도 당조에는 색채가 찬란한 묘실(墓室) 벽화가 있었다. 당대의 묘실 벽화 역시 제왕의 두터운 장례 풍조 발전과 더불어 규모와 예술 수준이 전대를 훨씬 추월했다. 특히 건릉(乾陵) 내 장회(章懷)태자 이현(李賢)의 묘, 영태(永泰)공주 이선혜(李仙惠)의 묘, 의덕(懿德)태자 이중윤(李重潤)의 묘 벽화는 편폭이 웅대하고 배치가 엄정하며 내용이 풍부하여, 표범 길들이기, 객사, 궁궐, 궁녀, 기악, 격구 등 궁중의 사치스럽고 편안한 생활 내용이 화면 위에 하나하나 펼쳐졌다.
또 다른 그림인 《예빈도(禮賓圖)》는 세 명의 이민족 빈객이 공경하고 엄숙한 표정을 품고 한족(漢族) 관원의 인도 아래 태자 접견을 기다리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들의 서로 다른 형모 특징과 차림새 단장이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조각되어, 당조(唐朝) 외국과 교류한 성황을 엿볼 수 있다.
영태공주 능 안의 벽화는 백 여 미터에 달하여 무사(武士) 및 남녀 시종을 그렸는데 대열이 들쑥날쑥 질서가 있고 가려지고 응응하며 인물이 돌아보며 낮은 소리로 말하거나 머리를 숙여 바라보고 단정하고 침착하거나 한가롭고 온순하여 의태가 아름답지 않음이 없고 감정이 풍부하다. 옷주름 선은 오르내림이 있어 마치 흐르는 물이나 구름처럼 굴곡진 율동이 풍부하다. 의덕태자 묘실 벽화는 우뚝 솟은 누각의 장관과 궁중 의장대의 웅대함을 표현하여 금빛과 푸른빛이 찬란하고 기세가 웅혼하여 정채로움이 연이어 펼쳐진다. 당대(唐代) 무명 화가의 붓 놀림이 거침없고 색채가 명쾌하며 공간의 교차 관계를 잘 이용하여 화면 변화를 풍부하게 하면서도 조화와 통일을 잃지 않는 정밀하면서도 깊이 있는 예술 풍격을 보여주니 당대 회화가 전체적으로 발달한 수준을 나타낸다.
서예 예술
당 태종은 《지의(指意)》에서 “무릇 글자는 신(神)을 정신적인 혼백으로 삼으니, 정신이 화합하지 않으면 글자에 기품 있는 자태가 없고, 마음과 붓을 근골로 삼으니, 마음이 굳세지 않으면 글자에 굳건하고 힘찬 기운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대(晉代) 대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서예를 추숭해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칭했다. 그리하여 당대 서예는 왕희지를 종으로 삼고 비각(碑刻), 전서(篆書), 예서(豫書)를 겸용했다. 해서(楷書)의 체세풍범(體勢風範 형체 기세 기풍 법도)은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에서 시작하여 안, 유에 이르기까지 서예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한편 초서에서는 ‘전장광소(顛張狂素 미친듯한 장욱과 광기어린 회소)’가 출현했다. 당대 묵적(墨跡)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도 전대보다 많으며, 대량의 비석에 소중한 서예 작품을 남겼다.
초당 삼대가 —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초당 서예의 삼대가는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褚遂良)이다. “글씨는 초당에 이르러 극히 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양순의 서체(書體)는 깎아지른 듯 험준한 맛(險峻)이 가장 큰 특징이다. 붓을 쓰는 법이나 글자 구조 모두 매우 엄격한 형식과 규칙을 갖추고 있다. 붓을 쓸 때 점과 획에 힘이 실려 있고, 글자 구조가 다소 좁으며, 반듯하면서도 굳세고 힘찬 필력으로 유명하다. 글자 사이의 공간을 정밀하게 계산해 요리조리 피하고 맞추며 짜임새를 잡았고, 아주 작은 획 하나에서도 장인의 치밀한 손길이 느껴진다. 해서가 워낙 엄격하면서도 기본기가 탄탄해, 예로부터 초보자들이 글씨를 연습할 때 가장 먼저 찾는 훌륭한 교본이 되어 왔다.
우세남의 서예는 묵직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깊이가 있으며, 왕헌지의 탁 트인 시각을 이어받았다. 당태종은 우세남에게 덕행, 충직, 박학, 문장, 서예까지 ‘다섯 가지 뛰어난 재능(五絶)’이 있다고 칭찬하며, “이 중 하나만 있어도 명신(名臣)이 되는데, 우세남은 이 다섯 가지를 모두 갖춘 탁월한 인재”라고 극찬했다.
서예 이론서인 《서단(書斷)》에서는 두 사람을 이렇게 비유했다.
“구양순은 마치 적진 깊숙이 용감하게 파고드는 맹장과 같아서 때로는 위태로울 때가 있고, 우세남은 노련한 외교관처럼 철저히 준비하여 실수가 없다.“
우세남의 글씨는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안에 단단한 힘을 품고 있고(內含剛柔), 구양순은 겉으로 힘줄과 뼈대가 강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군자는 자신의 재능을 감춘다는 관점에서 사람들은 우세남을 더 높이 쳐주었고, 당시에는 우세남의 명성이 구양순보다 위에 있었다. 이를 보면 중국은 예로부터 매사에 ‘인품(人品 사람 됨됨이)’을 으뜸으로 치고, 물품(物品 겉으로 드러나는 기술이나 결과)은 그 다음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우세남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당태종은 “우세남이 죽으니 이제 함께 글씨를 논할 사람이 없다”며 깊이 탄식했다.
나중에 위징이 저수량을 당태종에게 천거했고, 태종은 그를 궁궐의 글씨 담당(시서侍書)으로 삼았다. 저수량은 왕희지·왕헌지 부자와 구양순, 우세남의 서법을 모두 녹여내어, 맑고 깨끗하면서도 매혹적이고, 차분하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글씨를 완성했다. 당대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두고 “글자 속에서 금이 나오고, 행간에서는 옥구슬이 윤택하게 흘러나오는 듯하며, 법도가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움이 다채롭다”고 칭송했다. 이로 인해 일시에 그의 글씨가 천하를 풍미했다.
* 당대 서예의 최고봉 — 안근유골(顏筋柳骨)
중당(中唐)의 대서예가 안진경(顏眞卿)은 당 초기의 가늘고 꼿꼿한 서풍을 한 번 바꾸어 웅강(雄强)함으로 삼았으니, 그 서체는 두툼하고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우니 구조가 넓고 기세가 웅혼했다. 충의와 비창함으로 가득 찬 인생은 안진경의 글씨를 마치 늙은 나무와 마른 숲 속에 짙은 꽃과 여린 꽃봉오리가 숨어 있는 듯하고, 하나의 근원에서 성난 듯 치솟아 만 가지가 다투어 피어나는 듯 생기가 넘쳐흐른다,
소동파는 “시가 두자미(杜子美 두보)에 이르고, 문장이 한퇴지(韓退之 한유)에 이르고, 글씨가 안노공(顏魯公 안진경)에 이르고, 그림이 오도자에 이르러 고금의 변화와 천하의 예술적 성취(能事)가 다하였다”고 평가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만당(晩唐)의 서예가 유공권(柳公權)의 행초(行草)는 원문(轅門 병영의 문)의 늘어선 병사와 닮아 엄숙히 둘러싸 호위하는 듯했으며 글씨는 골법(骨法)을 숭상하고 꺾임이 선명했다. 안진경의 글씨보다 가늘지만 강하며 구양순의 글씨보다 웅후했다. 당 목종이 일찍이 글씨 쓰는 방법을 묻자 유공권이 대답하길 “붓을 씀은 마음에 달여 있으니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고사는 ‘붓으로 간언한 아름다운 이야기(筆諫佳話)’로 전해진다. 《몽조첩(蒙詔帖)》은 행서의 대표작으로 아주 유명하고 기세가 사람을 압도한다. 청조 건륭제가 시를 지어 찬탄하길 “험준한 구조 속에 살아있는 태도가 있고, 붓의 힘은 왕희지에 견줄 만하다”라고 했다. 후인들이 ‘안근유골(안진경의 힘줄과 유공권의 뼈대)’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외에도 장욱은 ‘초성(草聖 초서의 성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해서에도 능했다. 그의 진해(真楷 해서 정자체)는 “매우 엄정”하고 초서는 “매우 분방”하여 당시 사람들이 믿기 힘들 정도였다. 여기에 담긴 이치에 대해 소동파는 “진서(真書 해서)에서 행서(行書)가 생겨나고 행서에서 초서(草書)가 생겨난다. 진서는 서 있는 것과 같고 행서는 걷는 것과 같으며 초서는 뛰는 것과 같으니, 아직 서 있지도 못하면서 뛸 수 있는 자는 없다”라고 생생한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므로 역조역대(歷朝歷代)의 모든 서예 대가들은 반드시 먼저 해서에 능한 뒤에야 다른 것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장욱은 ‘광초(狂草 미친 듯이 날려 쓰는 초서)’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다.
회소(懷素)는 장욱의 초서 필법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역시 ‘광초’로 이름을 얻었다. 그의 작은 글씨는 봄꽃이 처음 피어나는 듯 청신하고 수려했으며, 큰 글씨는 공손대랑이 검을 들고 춤추는 듯 거침없고 자유분방해서 후세 학자들이 광범위하게 본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