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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에 반대하던 어느 인플루언서의 죽음

석견(石堅)

【정견망】

최근 중국 대륙에서 백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한 인플루언서의 죽음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장샤오러우(姜小柔)’라는 예명을 가진 이 젊은 여성은 소위 신령하고 기이한 현상을 탐험하고 미신을 타파하는 영상을 촬영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영상 속에서 그녀의 행동은 도가 매우 지나쳤다. 귀신도 없고 선악의 응보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를 저주하고, 독설을 퍼부으며, 저주 인형을 찌르고, 묘지에서 잠을 자며, 관음상을 부수곤 했다…… 네티즌들의 요구에 따라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여성에게 전화를 건 지 불과 6일째 되던 날 비극이 일어났다. 광시(廣西)에서 광동(廣東)으로 돌아오던 도중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고,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했다.

이것은 문화혁명 시기 열광한 무리들이 절에 들이닥쳐 불상을 부수고 경전을 불태우던 일을 절로 연상케 한다……

하늘을 경외하고 신(神)을 믿는 것은 줄곧 중화민족의 전통이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선량한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신을 공경하지 않아 초래된 심각한 후과(後果)가 이미 중국인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에는 신을 공경하지 않아 악보(惡報)를 당한 수많은 사례가 있으며, 여기에는 한 나라의 지존인 임금조차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사기·상본기(商本紀)》의 기록에 따르면, 무을(武乙)은 무도해서 나무 인형을 만들어 ‘천신(天神)’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것과 내기를 하며 사람을 시켜 대신 두게 했다. 천신이 이기지 못하면 곧 능욕하고 모욕했다. 가죽 주머니에 피를 가득 채워 위로 향하게 한 뒤 활로 쏘게 하고는 이를 ‘사천(射天)’이라 불렀다. 무을이 하수(河水)와 위수(渭水) 사이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갑자기 벼락이 쳤고 무을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

또 상조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은 “선왕의 밝은 덕을 버리고, 신명을 업신여겨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도읍 백성들을 포악하게 대했다”(《사기》). 그는 제왕 무을의 반신(反神) 유전자를 ‘완벽하게’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조종(祖宗)의 강산마저 잃어버렸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에도 이런 황당한 군주가 있었다. 《사기》에 따르면, 송왕 언(宋王偃)은 가죽 주머니에 피를 가득 채워 매달아 놓고 활로 쏘며 이를 ‘사천(射天)’이라 불렀다. 이 송왕 언은 제왕 무을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동해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당시의 제후들은 그를 ‘걸송(桀宋)’이라 불렀는데, 그 포악한 정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그 역시 비참하게 죽었고 나라가 망하는 최후를 면하지 못했다.

[역주: 송왕 언은 기원전 329년부터 기원전 286년까지 재위한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재위 초기에는 군대를 육성하고 주변국(제나라, 초나라, 위나라 등)을 공격해 영토를 넓히는 등 송나라를 일시적으로 강력하게 만들었으나 결국 제초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망했다.]

이처럼 신을 반대하고 신을 모욕한 자들의 최후는 어찌 그리 하나같이 닮았을까? 이것이 정녕 우연일까? 또 남북조 시기를 보면, 북위(北魏)의 태무제 탁발도는 대신 최호(崔浩)의 꼬임에 넘어가 멸불(滅佛)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불상과 불경을 불태우고 사원을 철거하며 승려들을 생매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44세 때 환관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두 아들 역시 잇따라 환관의 손에 시해당했다.

그렇다면 북위 멸불 사건의 주요 배후였던 최호의 결말은 어떠했을까? 서기 450년, 그는 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선비족 귀족들의 미움을 사서 재앙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극형에 처해졌고, 삼족이 연루되어 멸족당했다.

남북조 말기에 이르러 북주(北周) 무제 우문은 불교와 도교를 함께 없애버렸다. 그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치며 불교와 도교의 경서 및 소상을 부수고 승려와 도사들로 하여금 환속하도록 명했으나, 돌궐을 친정(親征)하던 중 급병으로 사망했으니 당시 나이 겨우 35세였다.

당조는 불교와 도교를 크게 부흥시켜 수련과 신앙에 있어 하나의 정점을 이루었으나, 당 무종(唐武宗) 이염이 등극한 후 다시 한 번 멸불 운동을 일으켰다. 회창 5년(845년), 그는 불교 사원을 대거 파괴하고 수많은 불경을 불태웠으며, 불상을 녹여 돈을 주조하게 하고, 26만 명이 넘는 승녀들을 강제로 환속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종은 병으로 죽었으니 향년 겨우 32세였다.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시영(柴榮) 역시 멸불(滅佛)이란 씻을 수 없는 죄업을 저질렀다. 시영이 보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조서를 내려 불교 사원과 불상을 대거 파괴했고, 거의 1백만 명에 달하는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당했다. 진주(鎭州) 대비사에는 구리로 만든 대관음보살상이 있어 지극히 영험했는데, 불상을 부수러 간 자들은 모두 손목이 부러져 죽었기에 감히 다시 훼손하는 자가 없었다. 시영이 이 소식을 듣고는 뜻밖에도 직접 큰 도끼를 들고 보살의 가슴을 찍었으니 그 광기와 오만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중에 시영은 대군을 이끌고 유주(幽州)를 치러 가다가 병룡대(病龍台)에 이르렀을 때, 가슴에 악성 종기가 돋아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의 종기가 곪아 터져 죽었다. 그가 불법을 파괴한 지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교훈을 기억하게 하려고 역사는 이토록 많은 군주들을 안배해 직접 세상 사람들에게 이처럼 신에 반대하는 자들이 보응을 받는 한바탕 연극을 연출해 보이게 했다. 그 목적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결코 신을 반대하고 배척하며 모욕하는 일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단지 금세의 복덕을 덜어낼 뿐만 아니라, 더 무서운 것은 사후에도 생명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업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교훈은 줄곧 중국인의 사상과 도덕 관념을 규제해 왔다. 시영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는 신을 헐뜯고 불교를 멸하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황제는 더는 없었다. 하늘을 거스르고 신을 반대하는 마귀인 중공이란 당이 겁난에 응해 생겨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중공은 중화를 찬탈한 후 전통을 파괴하고 무신론과 진화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며 천지를 뒤엎었다. 공산당의 선전 속에서 선악에 보응이 따름은 거짓이고, 신불(神佛)은 낙후된 옛사람들의 환상일 뿐이며, 수련과 신앙은 공허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위안을 삼는 일종의 자기 위안일 뿐이고, 종교의 목적은 세간의 권력을 다투기 위해 신도들을 세뇌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혁명을 해야 하고, 증오해야 하고, 투쟁해야 하고, ‘소리 없이 큰돈을 벌어야(悶聲發大財)’ 한다.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다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백만 인플루언서 죽음은 겉보기에는 자신의 무지와 광기 어린 언행이 초래한 응보로 죽은 것 같지만, 실상 공산당이야말로 그녀를 ‘죽인’ 주범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의 정신, 사람의 선념, 사람의 영혼을 파괴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중화민족의 도덕과 뿌리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온갖 재앙을 과거처럼 자신을 반성하고 도덕을 끌어올리는 계기로 여기지 않고, 단지 우연한 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선악에 보응이 있음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금기가 되었고, 사람에 대한 악의적인 저주가 되었다. 장샤오러우는 가련하다. 공산당에게 기만당한 수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산당의 무신론 선전 속에 원혼(冤魂)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공을 똑똑히 간파해, 중공에서 이탈하며, 도덕을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중국인이 자신을 보호하고 민족의 미래를 유지하기 위한 당면 과제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