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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의 실체》 6: 주변 숙청

제2장 “장쩌민의 권력 농단” 제2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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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좌우 숙청(清洗左右)

1992년 양가장(楊家將) 숙청

장쩌민은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기에, 군 고위 장령들은 장쩌민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이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덩샤오핑이 장쩌민을 위해 마련해 준 ‘고명대신(顧命大臣)’ 양상쿤(楊尚昆)은 장쩌민이 총만 잡으면 벌벌 떨며 사격이 뭔지도 모른다고 놀려댔다.

1992년 8월, 덩샤오핑이 중풍으로 병이 위중해져 입원했다. 당시 중공 제14차 전국대표대회의 인사 및 자리 배치가 한창 진행되던 중이었는데,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지지를 지연한 탓에 극도로 수동적인 처지에 놓였다. 중공 군부에는 몇 개의 계파가 있었는데, 예전의 야전군 출신과 관련이 있었다. 이야(二野, 제2야전군) 출신의 덩샤오핑이 군사위원회 주석일 때, 삼야(三野)와 사야(四野) 등 다른 계파의 사람들은 매우 불만이 컸으며,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양씨(楊氏) 형제는 모두 덩샤오핑의 사람이었다. 양씨 형제는 군에서 권력이 컸고, 군내 다른 계파의 불만은 자연스럽게 양씨 형제에게 옮겨져 집중되었다. 이 세력은 장쩌민에 의해 ‘양씨 타도’ 세력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8월 하순, 양바이빙이 고위 장령 46명을 소집해 베이징에서 ‘간담회’를 열고, 군 인사 배치를 상의했으며, 초점은 장쩌민이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양바이빙은 당내외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고 언급하며, 덩샤오핑 사후에 군이 어떻게 호위하고 받들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관철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참석자들에게 각종 구상과 임기응변의 도를 말해 달라고 청했다. 이 사람들은 가차 없이 장쩌민이 개혁에 반대하면서도 평범하고 무능하며, 군사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고 박력이 없어 군사위원회 주석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장쩌민은 당연히 초청받지 못했고, 이 소식을 접한 뒤 혼비백산하여 양바이빙에게 더욱 이를 갈았으며, 이후 줄곧 양씨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이때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데려온 책사 쩡칭홍(曾庆红)이 장쩌민에게 덩샤오핑의 칼을 빌려 양씨 형제를 죽이는차도살인(借刀殺人) 계책을 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한편으로는 밖으로 소문을 퍼뜨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병상에 있는 덩샤오핑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양씨 형제에게 이미 덩샤오핑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기미가 보이니 마음속으로 매우 우려된다고 말했다. 몇 차례 바람을 잡은 뒤 덩샤오핑이 의심하기 시작했고, 다시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과연 바깥에 이런 말이 돌고 있었다. 이에 양씨 형제는 덩샤오핑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장쩌민과 쩡칭홍은 덩샤오핑과 양상쿤 사이의 관계를 이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공세적인 방식을 취했다. 만년의 덩샤오핑은 두문불출하며 자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태자당의 일원인 쩡칭홍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덩샤오핑의 자녀들을 이용하여 덩샤오핑과 양상쿤의 관계를 이간질할 계책을 세웠다. 쩡칭홍은 역시 태자당 친구인 류징(劉京)과 위정성(俞正聲)을 통해 그들을 덩푸팡(鄧樸方)과 연결시켰다. 류징은 문화대혁명 당시 조반파 두목으로 “아버지가 영웅이면 아들은 호걸이요,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은 개자식(混蛋)”이란 ‘혈통론’의 원작자 중 한 명이며, 당시 쿤밍시(昆明市) 시장이던, 베이징공업대학(즉 훗날의 베이징이공대학) 시절 쩡칭홍의 동창이기도 했다. 위정성은 당시 칭다오시(青島市) 시장이었다. 위정성과 류징은 일찍이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이 이끄는 중국장애인이사회의 부이사장을 차례로 역임한 바 있다. 쩡칭홍의 사주하에 위정성과 류징은 덩푸팡과 만났을 때 일부러 과장된 말로 ‘양가장’의 위험성을 크게 떠들면서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 쩡칭홍은 직접 덩푸팡과 회동해 장쩌민이 덩샤오핑에게 충성하고 능력이 있으나 양씨 형제에게 허수아비로 전락해 소신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쩡칭홍은 덩푸팡에게 양상쿤과 양바이빙의 세력이 너무 크며, 군대 내에서 철저히 ‘어르신’ 덩샤오핑의 인맥을 교체하려 하니 이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쩡칭홍은 양상쿤이 ‘6.4’ 문제에 있어 내심 모순적이며 비교적 뚜렷한 명예회복(平反) 의도를 가지고 있고, 일단 양상쿤이 자오쯔양과 연합하면 전체 형세가 뒤집혀 버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쩡칭홍은 덩샤오핑의 정치적 근심을 어루만지며 ‘증상에 맞는 약을 처방하듯’ 6.4 문제에 대해 크게 대서특필하며 덩-양 관계를 이간질했다. 쩡칭홍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덩푸팡을 공포에 떨게 하며 그렇게 되면 정국이 통제를 잃고 ‘어르신’이 훗날에 청상당할 거라고 위협했다. 쩡칭홍이 덩푸팡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쩌민은 총정치부 부주임 위융보(于永波)를 데리고 직접 덩샤오핑을 예방해,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류화칭(劉華清)도 배석한 가운데 덩샤오핑에게 양씨 형제가 야심을 품고 군권을 찬탈하려 한다고 직접 고발했다.

9월 7일부터 10일까지 중앙군사위원회는 회의를 소집해 제14대(十四大)에서의 군부 인사 배치를 논의했다. 군 인사 조직의 대권을 쥐고 있던 양바이빙은 중고급 장령 100명을 승진시키는 명단을 작성하여, 류화칭과 양상쿤의 비준을 거친 뒤 장쩌민에게 넘겨 심사 비준을 받게 했다. 장쩌민과 쩡칭홍은 명단을 한차례 분석한 끝에 이것이 덩-양을 이간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양바이빙이 제출한 명단을 결재하지 않은 채 묵혀두었다. 양상쿤은 장쩌민이 ‘100인 명단’을 쥐고 흔들며 결재하지 않자, 장쩌민에게 왜 결재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지시를 받겠노라고 대답했다.

장쩌민과 쩡칭홍은 더욱 박차를 가해 양씨 형제를 타격할 흑색 자료들을 수집하는 한편, 한편으로는 은밀히 양바이빙이 제기한 ‘100인 명단’ 사건을 선전·확산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사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일순간 베이징에는 양상쿤·양바이빙 형제를 겨냥한 유언비어가 사방에 난무해, “양가장이 안하무인이다”, “양상쿤이 덩샤오핑을 대신하려 한다”, “양상쿤과 양바이빙이 무혈 쿠데타를 기도하려 한다”, “덩샤오핑이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다”, “양상쿤이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려 한다” 등이 떠돌았다.

중공 군부에는 본래 파벌이 갈라져 있고 모순이 뒤섞여 있었으므로, 일부 사람들은 양상쿤·양바이빙 형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장쩌민과 쩡칭홍은 장아이핑(張愛萍), 왕다오한(汪道涵) 등을 불러들여 군내에서 양씨 형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연락하게 하고, 덩샤오핑에게 짧은 보고를 올려 양씨의 군내 세력이 너무 크고 찬탈의 야심이 있으니 중앙군사위원회를 개조해 ‘양가장’의 군권을 해제할 것을 건의하게 했다.

장쩌민과 쩡칭홍은 다방면의 경로를 통해 양씨 형제가 ‘군권을 찬탈’하고 ‘6.4를 평반(平反 명예회복)하려 한다’는 소문을 사방팔방에서 덩샤오핑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덩샤오핑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으며, 특히 이번 병을 겪은 후 후사를 안배해야 하며 제14대에서 개혁개방의 노선을 확보하는 동시에 ‘6.4’가 뒤집히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장쩌민의 일련의 집요한 위장된 충성 수법 아래, 덩샤오핑은 완전히 장쩌민과 쩡칭홍의 음모 계략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천윈(陳雲)과 보이보(薄一波)의 반대가 겹치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 덩샤오핑으로서도 장쩌민을 교체할 뜻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양씨 형제의 군권을 폐지했으며, 류화칭, 장전(张震) 등 노장성들을 추대해 장쩌민이 군권을 장악하는 것을 보좌하게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내심 장쩌민을 믿을 수 없어 과도기 인물로만 삼을 수 있을 뿐 장기적인 계획에서 젊은 ‘차차기 후계자’을 골라야 한다고 깊이 느꼈다. 중공 제14대에서 덩샤오핑은 뜻밖에도 장쩌민에게 후계자로 49세의 후진타오(胡錦濤)를 안배해 주었다. 후계자를 위해 차차기 후계자를 안배한 것은 중공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류화칭의 회고에 따르면, 제14대 개최를 눈앞에 두고 이미 은퇴한 덩샤오핑이 1992년 10월 6일 중앙정치국에 편지를 보내 중앙군사위원회 인사 배치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앞으로 주로 류화칭, 장전 두 동지가 장쩌민 동지의 영도 하에 군사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주관하도록 한다. 장차 후계자를 선정하는 일은 군에 익숙한 사람이 책임을 맡을 필요가 있다.” 덩샤오핑은 서한에서 차기 군사위원회 지도부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중공 제14대는 1992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고, 양씨 형제는 뜻밖에도 군권을 박탈당했다. 양바이빙은 명목상 승진했으나 실권은 없는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덩샤오핑은 비록 노련하고 속셈이 깊었지만 이번에는 소인배 장쩌민과 쩡칭홍의 수중에 걸려 넘어졌다. 이때부터 친밀했던 덩씨 가문과 양씨 가문은 왕래가 끊겼으며, 덩샤오핑과 양상쿤 사이의 60년 우정은 중공의 잔혹한 내부 투쟁 속에서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사실상 덩샤오핑이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 양씨 형제를 잘라낸 것은 당내와 군대에서 가장 유력한 조력자를 잃은 것과 같았다. 류화칭은 비록 덩샤오핑에게 충성하긴 했으나 나이가 많은 한편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정치 투쟁에서는 장쩌민과 쩡칭홍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몇 년 후 그 역시 장·쩡에 의해 숙청당했다.

1995년 천시퉁(陳希同)의 투옥

중공 제14대에서 덩샤오핑은 수년간의 철통같은 지지자였던 양씨 형제를 군부 핵심에서 물러나게 했고, 덩샤오핑의 건강이 갈수록 악화됨에 따라 일군의 원로들도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되었으며, 장쩌민도 군부 내에서 점차 자신의 측근들을 발탁했다. 이때 장쩌민은 화살을 베이징이라는 이 중요한 정치적 교두보로 돌리기 시작했다.

베이징시는 권력 투쟁에서 반드시 차지해야 할 곳이다. 만약 베이징 위수구(衛戍區), 베이징시위, 시정부, 그리고 중앙경위단의 권력을 단단히 틀어쥐지 못한다면, 중공의 최고 지도자는 조금의 안전감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간부 선발에 있어 장쩌민에게는 오직 하나의 원칙만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천시퉁이 베이징 시장과 시위원회 서기를 지내는 동안 베이징은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제2순환도로와 제3순환로로를 뚫었으며, 베이징시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게다가 천시퉁은 6.4 진압 당시 태도가 강경했기에 자신이 중공의 강산을 수호한 공이 있다고 여겨, 적어도 정치국 위원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장쩌민이 어부지리로 높은 자리에 기어올랐으니 마음속으로 당연히 매우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천시퉁은 덩샤오핑과 관계가 매우 좋았고, 1992년 덩샤오핑이 서우강(首鋼)을 시찰할 때 공개적으로 천시퉁을 개혁파라고 선언했다. 천시퉁은 당시 베이징 TV의 프로그램 틈새마다 개혁을 심화하자는 구호를 끊임없이 내보냈고, 각종 장소를 이용하여 개혁 발언을 발표했다. 천시퉁은 베이징시위 기관지 《베이징일보(北京日報)》에 “조속히 덩샤오핑 동지의 남순강화 정신에 반응을 보이라”고 요구했고, 천시퉁의 지시 아래 《베이징일보》는 중앙 선전부의 장쩌민 ‘보도 지침 통일’에 따른 《인민일보》보다도 하루 일찍 선전 신문의 덩샤오핑 남순강화 관련 내용을 전문 전재(轉載)해 장쩌민을 매우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천시퉁이 장쩌민을 얕잡아볼 수 있는 밑천을 주었기에, 장쩌민이 베이징을 통제하려면 해결해야 할 최대의 문제는 바로 천시퉁이었다.

1995년, 서우강 전 이사장 저우관우(周冠五)가 경제 문제로 실각하고 그의 아들 저우베이팡(周北方)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베이징시 비서 집단 뇌물 수수 사건이 폭로되었고, 부시장 왕바오썬(王寶森)은 같은 해 4월 베이징 근교 화이러우현(懷柔縣)의 치펑차(崎峰茶)라는 산에서 사망했다. 공식적인 발표는 왕바오썬이 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나, 실제로는 현장의 발자국, 상처, 화약, 탄피 등의 단서로부터 왕바오썬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명백한 증거는 현장에서 탄두만 발견되었고 탄피는 경찰이 탐지기를 써서 찾아냈다는 점인데, 그 탄피는 이미 흙속에 짓밟혀 있었다. 왕바오썬이 죽은 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사건 발생 후 현장을 보호했음에도 탄피가 ‘흙 속에 짓밟혀’ 있었다는 것은 왕바오썬이 죽을 때 곁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바오썬의 죽음은 천시퉁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중공 관료 사회의 규칙에 따라 무엇을 보도할 수 있고 무엇을 보도할 수 없는지는 전적으로 최고 지도자의 의향에 달려 있었다. 왕바오썬의 죽음이 중앙텔레비전(CCTV)을 통해 대대적으로 방송된 이상, 이것은 권력 투쟁의 폭풍우가 막을 올렸음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덩샤오핑은 더 이상 천시퉁을 보호할 마음이 없었고, 천시퉁은 마침내 자신이 도망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장쩌민이 온갖 힘을 다 기울여 마침내 파헤친 증거라 해봐야 고작 천시퉁이 “1991년 7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대외 교류 과정에서 고급 선물 22점(그중 금은품 8점, 고급 손목시계 6개, 명품 만년필 4자루, 사진기 3대, 카메라 1대)을 받아 총 합계 55만 5천여 위안에 달했다”【9】는 것뿐이었다. 이는 정치국 위원급의 지도자에게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으며, 오히려 아주 ‘청렴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천시퉁은 이 때문에 감옥에 갇혀 탐오죄로 징역 13년, 직무유기죄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두 죄를 합해 총 징역 16년을 선고받았다.

2003년 말, 천시퉁은 방광암 판정을 받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출소 후 천시퉁은 5만 자 분량의 상소문을 작성하여 장쩌민의 자신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고발하고, 자신은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라고 칭하며 장쩌민 부자의 경제 범죄 문제를 신고했다. 중공의 부패는 이미 시스템 전체의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장쩌민의 ‘반부패’가 권력 투쟁을 위한 것이었음은 중국 내에서 이미 공지의 사실이다.

1997년 차오스의 강제 은퇴

차오스는 장쩌민의 옛 상사이자 장쩌민이 몹시 질투하던 인물이며, 장쩌민의 상극이기도 했다. 1997년 중공 제15대(十五大)가 개최되었을 때, 중공 정치국 안에서 제멋대로 휘젓기 위해 장쩌민은 차오스를 기어코 제거하려 했다. 장쩌민과 쩡칭홍은 차오스가 대중의 신망이 두텁고 명성, 경력, 능력, 민심 모두 장쩌민보다 훨씬 위라는 것을 알았기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차오스를 정계에서 떠나게 할 수 없자, 결국 차오스가 장쩌민보다 나이가 두 살 많다는 점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장쩌민, 쩡칭홍은 보이보(薄一波)와 몰래 모으ㅢ해 차오스를 겨냥해 “정치국 상무위원은 70세에 은퇴한다”는 정책을 제안했다. 그들은 차오스가 성품이 바르므로 반드시 조직에 복종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과연 차오스는 정정당당하게 은퇴를 수락해 ’70세’ 은퇴를 정치국 상무위원의 퇴직 마지노선으로 만들고, 장쩌민에게도 한 임기를 더 한 뒤 권력을 후진타오에게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장쩌민도 당시 이미 71세였으므로 은퇴해야 마땅했으나, 쩡칭홍은 장쩌민이 총서기라는 특수한 이유를 내세워 자리에 남아 내려오지 않게 했다.

정치국 상무위원 차오스, 리루이환 및 원로 완리 등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부지불식간에 당시 덩샤오핑 및 정치국 상무위원이 제4대 영도 핵심으로 후진타오를 확정했을 때 정치국이 통과시켰으며 이는 합법적이라는 소식을 공개했다. 분명히 그들이 이 내막을 폭로한 목적은 당내에 이 합법성을 고지하고, 이 결의를 뒤집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법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은퇴하기 전 차오스의 일련의 움직임으로 인해 장쩌민은 오직 덩샤오핑이 세운 게임의 규칙 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에게 당시 또 하나의 고민거리는 자신이 총을 잡아본 적이 없고 군부에 인맥이 없다는 점이었는데, 보이보는 당이 총을 지휘하는 법이니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군인이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아이디어를 냈다. 옛 규칙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했다. 제15대로부터 시작하여 군인은 정치국 상무위원회 밖으로 밀려났고, 이는 장쩌민을 위해 또 하나의 큰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었다.

1998년 하반기, 차오스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전국인민대표대회 은퇴 노간부들은 대량의 군중 편지에서 공안 부문이 파룬궁을 연공하는 군중에 대한 불법적 대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파룬궁에 대해 일정 기간 상세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 “파룬궁은 국가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움만 있을 뿐 해로움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고, 연말에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국에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마음이 좁은 장쩌민은 차오스 등이 그의 후계자를 공개한 방식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질투를 품었기에 차오스가 칭찬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하려 들었으며, 이는 극히 강한 질투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쩌민의 질투심에 대해 말하자면, 1992년 9월에 한 가지 실례를 들 수 있다. 당시 장쩌민은 저장성 위요시의 ‘허무두 유적 박물관(河姆渡遺址博物館)’을 참관했는데, 이 박물관은 매우 유명하여 7천 년 전의 고대 동물 왕국이라 칭할 만했다. 1982년 허무두 유적은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되었고, ‘허무두 유적 박물관’의 현판 친필 휘호는 차오스가 썼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13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차오스가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저장성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차오스의 부인이 위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기어코 고집을 부려 현판 글씨를 다시 쓰려 했다. 박물관은 비록 난처했으나 1993년 5월 박물관 정비 후 재개방한다는 핑계로 차오스의 휘호를 내리고 그 자리에 장쩌민의 휘호를 걸었다.

사람의 이 질투심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작게는 사단을 만들어내고, 크게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장쩌민은 권력이 공고해진 후 바로 이 질투심에 불이 붙어 온 국가와 전국민의 미래를 도박판에 내거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세상을 놀라게 하고 천인공노할 아주 나쁜 일을 저지른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므로 일단 여기서는 접어두자.

2002년 ‘칠상팔하(七上八下)’로 리루이환 실각시켜

70세에 은퇴한다는 규칙으로 인해 2002년 중공 제16대(十六大)에 이르러 장쩌민 역시 물러나야 했으나, 장쩌민은 막후에서 계속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고 그러자면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리루이환이 장애물이었다. 리루이환은 경력이 장쩌민과 같았고 1989년 이전에는 장쩌민보다 성망이 높았으며, 능력도 장쩌민보다 뛰어났고 민심도 장쩌민보다 훨씬 좋았다.

장쩌민이 1987년 정치국 위원 신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리루이환 덕을 보았기 때문이다. 리루이환은 목수 출신으로 1987년 전후하여 정계에서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날렸고, 1987년 중공 제13대에 진입하려 했으나 중공 원로들은 그가 가장 젊고 단지 톈진시(天津市) 서기일 뿐이므로 만약 그 혼자 정치국에 진입하면 너무 두드러져 보일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베이징시 서기 리시밍(李錫銘), 상하이시 서기 장쩌민, 그리고 최대 성인 쓰촨성 서기 양루다이(楊汝岱) 등이 모두 리루이환을 따라 함께 정치국에 진입했다.

만약 중공 제16대에서도 리루이환이 정치국 상무위원에 남아 있었다면 장쩌민은 서태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장쩌민의 책사 쩡칭홍도 서기처와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조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다시 나이 문제를 조작해 리루이환을 실각시켰다. 2002년 당시 리루이환은 68세로 장쩌민과 쩡칭홍이 1997년에 만들어낸 ’70세’ 마지노선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장과 쩡은 어쩔 수 없이 새롭게 ‘칠상팔하’를 만들어 67세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새로 임명될 수 있고 68세 이상이면 반드시 은퇴해야 한다는 룰을 만들었다. 이것이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칠상팔하’의 유래이다.

‘칠상팔하’는 본래 장쩌민과 쩡칭홍이 리루이환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였으나, 결국 당내에서 하나의 정치 규칙이 되었다. 2007년 중공 제17대에 이르러 쩡칭홍 역시 68세가 되었고, 문득 자신이 들어 올린 ‘칠상팔하’의 돌이 자신의 발등을 찍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도 제17대에서 반드시 은퇴해야만 했다.

1997년 상하이방(上海帮) 현상

‘상하이방’은 장쩌민이 1989년 집권 후 개인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짜 맞춘, 상하이와 장쑤성 간부를 기초로 한 지역 파벌이다. 이 파벌은 뚜렷한 상하이-장쑤-저장 사람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영리하고 실리를 따졌다. 장쩌민이 집권한 13년 동안 ‘상하이방’ 간부들은 중앙과 지방 각급 당정 기관에 만연해 당시 중국 최대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중공 건국 후 상하이는 중국의 공업 중심지이자 제1대 도시로서의 지위 덕분에 중공의 권력 운용과 인사 구성에서 상당한 중요한 역할을 재차 발휘했으며, 상하이시 서기는 흔히 중공 정치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당내에서 권력을 독차지했던 ‘사인방(四人帮)’도 당시 사람들에 의해 ‘상하이방’으로 불렸는데, 그중 3명인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왕훙원(王洪文)이 모두 상하이에서 장기간 근무했기 때문이며,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青)은 1930년대 상하이 연예계에 빌붙어 지냈던바 역시 상하이와 인연이 있었다.

두 번째는 장쩌민 시대다. 쩡칭홍, 우방궈(吳邦國), 황쥐(黃菊), 천량위, 천즈리 등인데, 어떤 이들은 장씨 ‘상하이방’이라는 이 명칭이 정확하지 않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중공 고위층 출신의 상하이 간부들이 반드시 같은 배를 타고 ‘돕는 친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하이 출신의 주룽지(朱鎔基)는 장쩌민과 한통속이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반드시 장쩌민의 직접적인 발탁에 기인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하이방 구성원은 저마다 장쩌민과의 이익 맥락과 연관이 있었고, 천량위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1946년 10월에 태어난 천량위는 1984년 3월 상하이 전기공업회사 당 서기를 지낼 때 당시 전자공업부 부장이던 장쩌민의 부인 왕예핑이 자기 회사 산하 전기연구소 총무실 부주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량위는 이것이 장쩌민에게 아부하고 환심을 살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대단히 기뻐했고, 그리하여 자주 ‘조사 연구’를 명목으로 전기연구소를 찾아가 온갖 방법으로 왕예핑과 친분을 쌓고 관계를 맺었으며, 왕예핑 앞에서 공손하기 그지 없었고 입만 열면 ‘왕 이모(王阿姨)’라고 불렀으며, 왕예핑을 총무실 주임으로 승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로 그는 자주 직접 왕예핑의 집에 찾아가 이것저것 갖다 바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돌보았다. 왕예핑이 병에 걸렸음을 알았을 때는 더욱 자주 문안을 갔고 당시 가장 좋은 의사를 소개해 치료하게 했으며, 직접 부엌에 들어가 왕예핑을 위해 한약을 달여주었다. 장쩌민의 막내 아들이 상하이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즉시 명령을 내려 그의 어머니가 있는 전기연구소로 전근시켰으며, 이어서 연구소로 하여금 돈을 내어 상하이 노동자야외대학에서 공부하며 심화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왕예핑은 매우 감격했고, 천량위의 돌봄에 보답하기 위해 장쩌민이 상하이에 돌아왔을 때 당시 상하이 시장 왕다오한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특별히 천량위를 언급했다. 왕다오한은 이어서 상하이시 조직부에 귀띔을 해주었고, 1985년 1월 천량위를 상하이시 노간부국 부국장으로 임명했으며, 다시 상하이시 황푸구(黄浦區) 구청장으로 승진시켰다. 장쩌민이 6.4 사건으로 최고 지도자에 오른 후에는 천량위를 상하이 시장, 상하이시 서기 및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더욱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로켓처럼 빠르게 상승하며 영달을 누리게 했고, 장쩌민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이자 상하이 대본영을 지키는 대관가(大管家 수석 집사)가 되게 했다. 중공 제16대 이후 장쩌민은 이미 천량위를 후진타오를 대체할 자신의 차세대 후계자로 키울 의도를 가졌으나, 2006년 7월 천량위가 부패 사건으로 낙마하면서 상하이방에 중대한 타격이 되었다.

수년간의 장쩌민-후진타오 투쟁

장쩌민은 줄곧 후진타오를 믿지 못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나중에 올라온 후진타오가 장쩌민을 대신해 파룬궁 탄압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이것이 장쩌민으로 하여금 줄곧 후진타오를 대체할 심복을 찾게 만들었다. 동시에,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 노선을 광적으로 집행하면서 비대해진 중공 정법위(政法委) 및 610 체제는 거의 제2의 권력 중앙이 되어 대량의 자원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멋대로 행동해 후진타오, 원자바오 정권을 허수아비로 만들었기에, 장-후 투쟁은 근래 중공 노선 투쟁의 주선(主線)이 되었다.

천량위가 낙마하자 장쩌민은 부득불 다른 인물을 물색해야 했다. 태자당 보시라이(薄熙来)가 현지에서 파룬공 탄압에 적극적이었기에 눈에 들었으나, 장쩌민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2007년에 후진타오가 점 찍은 리커창(李克强)이 상무위원 자리에 오르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장쩌민파 자체에는 2007년에 상무위원이 되어 저격 역할을 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파벌이 없던 시진핑이 장-후 양측에 의해 수용되어 차기 후계자로 세워졌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은 원로로서 개방적이고 인간미가 있었으며, 전 중공 지도자 후야오방, 자오쯔양과 관계가 친밀했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후야오방이 애초에 발탁했던 이들이자 후야오방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당연히 시중쉰에게도 매우 친밀하고 존중했다.

장쩌민 파는 시진핑을 내세웠고, 시진핑은 바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사제(師弟)’였기에 당연히 기꺼이 수용하고 시진핑을 잘 대우했다.

따라서 시진핑은 장쩌민-쩡칭훙 파벌에 속하지 않았으며, 그의 집권은 단지 장-쩡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장-쩡의 셈법은 먼저 2007년에 후진타오의 후계자가 상무위원이 되는 것을 저지하고, 2007년~2012년 기간 내에 장-쩡의 진정한 후계자인 보시라이를 단련시켜 성숙하게 만들며 위망과 권세를 얻게 하고, 2012년 중공 제18대에서 적어도 상무위원과 중앙정법위 서기의 자리를 얻게 하는 것이었다. 이 방면에서 장쩌민파 정법위 서기 저우융캉(周永康)은 줄곧 보시라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장과 쩡은 제18대 이후 다시 2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당시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가 전국적으로 ‘창홍다헤이(唱紅打黑, 홍가를 부르며 흑사회 타도)’를 통해 전국을 위협하고 조종하여 얻은 힘을 이용해 ‘충칭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다시 보시라이가 장악한 전국 정법위, 무장경찰부대, 그리고 보시라이가 장악한 전국 수많은 군부 인맥, 장쩌민의 군내 세력 등을 이용하여 시진핑 등을 파면 내지 체포할 계획이었다. 그때가 되면 전국은 또다시 장-쩡의 세상이 될 참이었다. 본래 장-쩡의 계획은 순조롭게 관철되어 보시라이와 저우융캉이이미 절반의 공정을 마쳤으나, 누가 알았으랴, 2012년 2월 보시라이의 부하이자 충칭 부시장이었던 왕리쥔(王立軍)과 그가 반목해 청두 주재 미국 총영사관으로 망명함으로써 전체 계획이 폭로되었고, 장쩌민 파는 전면 붕괴되었다.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첫 발행

(에포크타임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