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년—959년)
심연(心緣)
【정견망】
과학기술편
수리(水利)
오대 시기, 남방의 각국은 모두 수리(水利) 관개(灌漑)를 중시해 토지를 개량하고 물을 치수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으며,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능력을 높여 농업이 신속히 발전하게 했다. 그들은 강남에 강과 호수가 많은 상황에 대응해 둑과 수문을 대량으로 축조하고 물 흐름을 통제해, “가뭄에는 물을 밭으로 운반하고, 장마에는 물을 밭에서 내보냈다.”
오월(吳越) 정권은 각 주마다 도수영전사(都水營田使)와 요호병(撩湖兵), 영전군(營田軍)을 설치하여, “전적으로 논밭 일에 전념하여 강을 인도하고 둑을 쌓아 수해를 줄였다.” 가흥(嘉興), 송강(松江) 해변에서 태창(太倉), 상숙(常熟), 강음(江陰), 무진(武進)에 이르기까지 모든 하천에 보와 수문을 만들어 적절한 때에 가두고 방류함으로써 가뭄과 장마에 대비했다. 또한 무의(武義)에 장안언(長安堰 언은 방죽을 의미)를 축조해 만 여 경의 밭에 물을 대었고, 월주(越州) 감호(鑒湖) 주변 58리에 둑을 쌓아 9천 여 경의 밭에 물을 대는 등등.
오(吳)와 남당(南唐)은 단양(丹陽)의 연호(練湖)를 준설하고, 구용(九容)의 강암호(絳岩湖)를 준설하며, 초주(楚州)에 백수당(白水塘)을 쌓고, 수주(壽州)에 안풍당(安豐塘)을 쌓았는데, 적게는 수천 여 경에서 많게는 만 경 이상의 밭에 물을 대었다. 특히 남당과 오월은 경내에 우전(圩田 역주: 제방을 쌓아 물을 막고 그 안의 물을 빼내 만든 농경지)을 축조했으니, 즉 백성들이 하천이 높고 밭은 낮은 수향(水鄕)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강과 운하 양안 및 농경지 주변에 제방을 쌓아 안으로는 밭을 둘러싸고 밖으로는 물을 막았다. 우전 하나가 사방 수십 리에 이르러 마치 큰 성과 같았다. 제방을 따라 수문을 건설해 물을 통제했으며, 가뭄에는 수문을 열어 물을 이끌어 밭에 물을 대고 장마에는 수문을 닫아 물을 막음으로써,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능력을 크게 강화해 농업 수확량이 어느 정도 안정적이 되게 했다.
차 제조업과 자기
오대 시기, 남방에서는 차 제조업이 가장 발달했다. 초왕(楚王) 마은(馬殷)은 “백성들이 스스로 차를 만들게” 하여, 매년 중원 왕조에 바치는 공차만 해도 25만 근에 달했다. 남당은 건안(建安) 지역(복건 서북부)에 차를 볶는 장소인 자배(茶焙)를 1,336곳 두었는데, 그중 관용이 38곳이었다. 당시 차는 이미 중요한 상품이 되었으며, 남평의 수도 강릉은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차 시장이 있었다.
도자기 산업의 진보도 매우 빨랐다. 오월의 월주 비색(秘色)자기는 바탕흙과 유약 색깔이 모두 이전보다 진보해 당시 도자기 중 가장 으뜸가는 상품이었으며, 전적으로 오월 왕실에서 사용하거나 중원의 여러 왕조에 공물로 바치는 데 쓰였다. 동시에 월요에서는 “금구”(金扣 테두리를 금으로 두른) 도자기도 생산했는데 흔히 만 개 단위로 생산되었고, 외부로 수출되는 대종 상품이었으니 당시 월요(越窯)에서 자기를 굽는 기술이 이미 매우 높았음을 볼 수 있다.
직조업
오대십국 시기의 염색 및 직조업 역시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실크 제조 방면에서 규모가 날로 확대되었다. 항주 성내에는 오월왕을 위해 비단을 짜는 공인만 200명이 넘었다. 염색 방면에서는 남당 때 “천수벽(天水碧)”이라는 색상을 발명했는데, 궁녀가 “벽색(碧色 청록색)으로 물들여 저녁에 뜰 가운데 내놓으면 이슬에 물들어 그 색이 특히 좋았다.” 그리하여 “천수벽”이라 이름 붙였다.
금속 제련과 인쇄업
오대십국 시기의 광산 금속 제련은 각지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구리 제련 기술에서 담수침동법(膽水浸銅法)을 발명했으니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습식 제련 기술이다. 오와 남당은 구리와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고, 남한은 금과 은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이 외에도 당시의 종이 제조업 역시 상당히 발달해 양주(揚州), 월주, 촉주(蜀州)는 유명한 종이 생산지였다. 유명한 남당의 징심당지(澄心堂紙)는 “봄 얼음처럼 매끄럽고 누에고치처럼 조밀하다” 하여 제작이 매우 정교했다. 목판 인쇄업도 크게 발전해 성도(成都)와 금릉(金陵)은 당시 전국 2대 인쇄업 중심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