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태종의 현명한 치세
태종의 원래 이름은 조광의(趙匡義)였으나 훗날 광의(光義)로 고쳐서 하사받았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종이 태어날 때 “붉은 빛이 위로 올라감이 불과 같았고 여항(閭巷 마을)에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고 하니, 이는 그가 장차 범상치 않은 경력을 가질 것임을 예시한다. 태종은 어릴 때부터 매우 위엄이 있어 다른 아이들이 그와 장난을 치다가도 모두 그를 아주 경외했다. 자란 후에는 더욱 “높은 콧날에 용안(龍顔)”을 해서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태종은 성품이 글 읽기를 좋아하고 다재다능했다. 그는 태조를 따라 남정북벌(南征北伐)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태조가 서거한 후 태종이 즉위해 마침내 통일 대업을 완수했다. 태종은 태조 시기의 제반 제도를 준수하며 현명하게 국가를 다스렸다. 그는 농사에 관심을 가져 가뭄이 들 때마다 군신들에게 명령해 함께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한해는 천하에 가뭄이 들고 또한 혜성이 나타났다. 태종은 이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이 몸을 희생해 맹렬한 불길 속에 태워진들 어찌 하늘의 꾸짖음에 보답하기에 충분하겠는가. 마땅히 경 등과 함께 형벌과 정사의 허물 및 농사의 어려움을 살펴서, 만물을 구휼하고 백성을 편안케 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빌어야 할 것이다.”
겨울에 천하에 또 큰 눈비가 내렸다. 태종은 하늘의 이러한 견책을 자신의 죄로 돌려 다시 조서를 내려 사방에서 올리는 표문에 단지 황제라 칭할 뿐 존호를 더할 필요가 없다고 명했다. 군신들이 표문을 올려 존호를 회복할 것을 청했음에도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태조와 마찬가지로 태종은 절검을 제창해 입는 옷이 모두 세탁한 것이었다. 천하의 기이한 물건에 대해서는 소각하란 취미에 빠져 큰 뜻을 잃지 않게 했고, 각지에서 바치는 미녀 등도 모두 거절했다.
태종 시기, 979년(태평흥국 4년)과 986년(옹희 3년) 두 차례 출군해 요나라를 공격함으로써 거란 세력을 장성 밖으로 몰아내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후 북송은 요에 대해 수동적인 방어 방침을 취했다.
태종은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린 지 22년 만인 997년에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군신들이 올린 시호는 신공성덕문무(神功聖德文武)황제였고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송사》는 태종을 찬양해 이렇게 평가했다.
“태종 황제께서는 깊은 계책과 뛰어난 결단을 가지셨고, 원대한 뜻을 품어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셨다. 제위에 오른 후, 진홍진(陳洪進)과 전숙(錢俶)이 잇따라 땅을 바쳐 귀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원(太原 북한)을 취하고 거란을 토벌했으며, 이어서 교주(交州 지금의 베트남 북부)와 서하(西夏)와 전쟁이 있었다.
전쟁이 그치지 않고 천재지변이 잇따라 발생하여 포로로 잡히거나 베어진 적들의 소식이 날마다 들려왔으나, 백성들은 전쟁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홍수, 가뭄, 메뚜기떼의 피해가 거의 천하에 가득했으나, 백성들은 반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황제께서는 자비와 검소함을 보물로 삼으셨으니, 세탁한 옷을 입으시고 기이하고 정교한 기물들을 없애셨으며, 여악(女樂)의 진상을 물리치셨고, 사냥과 유람의 그름을 깨달으셨다. 진귀한 물건을 멀리하시고 상서로운 징조에 대한 보고를 억누르셨으며, 농사를 가엾게 여기시고 다스림의 공적을 살피셨다. 학문을 닦아 견문을 넓히려 하셨고, 헛소리를 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이들을 죄주지 않아 간언하는 선비들을 북돋우셨으며, 가엾게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저녁 늦도록 식사하는 것도 잊으셨다.
심지어 스스로를 불살라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고자 하셨고, 천하의 세금을 모조리 없애어 백성들의 힘을 덜어주고자 하셨으니, 마침내 군사 행동을 하지 않고도 오곡이 거듭 풍성해지는 효험을 보았다. 이 때문에 청주(靑州)와 제주(齊州)의 늙은이들이 자식들을 이끌고 와서 도로를 정비하고 봉선(封禪)을 거행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길에서 끊이지 않았다.
군자가 이르기를 ‘서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천자가 된다’고 했으니, 바로 황제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러므로 황제의 공덕은 역사책에 찬란히 빛나며 훌륭한 군주로 칭송받고 있다.”
진종의 집정시기와 전연의 맹
태종이 서거한 후 셋째 아들이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진종(真宗)이다. 역사상 진종은 뛰어나고 영오(英悟)한 군주에 속했으나 성격이 연약했다. 진종은 민정(民情)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 경성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대신을 보내 약품을 나누어 주었으며, 각지에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조서를 내려 세금과 부역을 감면하고 진휼을 진행했다. 진종은 또한 구준(寇準), 양계업(楊繼業) 등 현명한 대신들을 등용할 줄 알았다.
진종 때 북방의 요나라가 이미 강대한 군사 국가로 흥기해 끊임없이 송조로 출병해 영역을 침범했다. 999년, 1001년, 1003년, 요군이 연속 세 차례 송의 국경을 침입했는데 일종의 탐색 행동이었다.
1004년 2월, 요는 송에 대해 대규모 침입을 감행했다. 요군은 가는 곳마다 거침이 없어 송군이 지키던 많은 주현을 싸워 이기고 곧장 황하 가로 매진해 북송의 도성인 개봉을 압박했다.
이때 요군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 수도를 옮겨 도망치자는 주장과 단호히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일어났다. 진종 역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재상인 구준의 의견을 물었다.
구준은 “마땅히 먼저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한 자들을 목 베고 나서 북벌에 나서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구준은 진종에게 요군을 격퇴하는 데 상·하 두 가지 계책이 있다고 말했다. 상책은 진종이 어가를 이끌고 친정(親征)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전군의 사기가 올라가고 군의 위엄이 배가되어 단번에 요군을 격퇴하고 변강(邊疆)을 공고히 할 수 있다. 하책은 진종이 도성인 개봉에 머물며 성을 굳게 지키며 물러나지 않고 기병을 내어 요병의 뒷길을 교란하고 식량 공급을 끊어, 요병으로 하여금 장기적으로 진전하지 못해 피로하고 흩어지게 만든 뒤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반격하면 역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개봉에 있는 종묘를 버리고 초(楚)·촉(蜀)으로 달아난다면 필시 인심이 무너질 것이다. 그때 요군이 승세를 타 직접 들어오면 송조는 적게는 중원 대지를 잃어 구석에 안주하게 될 것이요, 크게는 천하를 모조리 잃고 종족이 모조리 멸망할 것이다.
진종은 구준의 상책(上策) 의견을 받아들여 1004년 11월 군사를 이끌고 수도를 떠나 하북으로 향했다. 이때 요군은 이미 황하 북안의 전주(澶州 지금의 하남 복양濮陽) 북성(北城)에 도착해 전주 북성에 대해 삼면 포위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요군 선봉 달람(撻覽)이 전쟁을 독려할 때 송 위호군(威虎軍) 두령인 장환(張環)의 상자노(床子弩 대형 쇠뇌)에 이마를 맞아 그날 밤 죽었다. 요군은 대장 한명을 잃어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어쩔 수 없이 잠시 퇴각했다. 바로 이때 송 진종이 구준을 대동하고 황하를 건너 전주 북성에 도착하니, 이는 요군 주장을 죽여 막 고개를 들던 송군의 사기에 흥분제를 주입한 격이었다. 송군의 사기가 이로 인해 크게 진작되었다.
송 진종의 친정은 요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대장 한 명을 잃었으니 만약 다시 송군과 송나라 한복판인 전주에서 대치한다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요군의 위험성이 커졌다. 이에 요나라 통치자는 가급적 속히 송나라와 화의해 속히 위험한 땅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한편 송 진종은 비록 어가친정을 하긴 했으나 사실 승리에 대한 신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송·요 양측은 각자의 고려에 따라 화의하기로 결정했다. 양측의 협상을 거쳐 그해 12월 송과 요는 합의에 도달했다. 송과 요는 형제의 나라가 되어 요 황제 야율융서(耶律隆緒 성종)는 송 진종을 형이라 불렀다. 송나라는 매년 은 10만 량,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요나라에 주기로 했으며, 양측 사신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연의 맹(澶淵之盟 전연은 전주의 한 지명)”이다.
“전연의 맹”의 체결은 송·요 사이의 수십 년에 걸친 연속적인 전쟁을 끝내고 이 이후 두 나라 국경이 장기간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인 상태에 처하게 했다. 이는 양측 국경 지역이 생산을 발전시킬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평화 환경은 중화 문명이 송조에서 번영하고 장족의 발전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조약에 따라 송조는 매년 요나라에 비단과 은을 공물로 바쳐야 했으므로 이러한 방면에서 보자면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진종이 재위한 25년 동안 문화와 경제 모두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송조 천하의 가구 수는 905만 5,729가구였고, 인구는 2,197만 6,965명이었다.
1022년 진종이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55세였고, 훗날 올려 바친 시호는 문명무정장성원효(文明武定章聖元孝)황제라 하고 묘호를 진종이라 했다. 그 아들 조정(趙禎)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송 인종(仁宗)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