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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중국문화가 또 한번 휘황했던 송조(宋朝) (4)

(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추배도》 중 유태후 치세에 관한 예언과 경력신정

《추배도》 제18상은 진종이 서거한 후의 북송 조정 시국을 예언했다. 제18상의 그림에는 집 한 채가 그려져 있고 가운데 한 여자가 앉아 있으며 그 아래에 개 한 마리가 있다. 인종이 즉위한 후 유태후(劉太后)가 수렴청정함을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천하의 어머니요 금도복귀(金刀伏鬼)로다
삼팔(三八)의 해에 치안이 공고해지네

天下之母
金刀伏鬼
三八之年
治安鞏固

이 중 “귀(鬼)”는 12지지의 묘(卯)와 대응하여, 금도(金刀)에 묘(卯)를 더하면 “유(劉)” 자가 되며, 엎드린 귀신은 여성을 비유한다. 즉 유씨 성을 가진 여자가 천하의 어머니가 되어 태후의 신분으로 국가를 11년 동안 다스려 국가의 치안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송(頌)에 가로되:

수재와 한재가 빈번해도 재앙이 아니니
어린 주인을 힘껏 부축해 연해(埏垓 국경)를 진압하네
조정에는 다시 비녀 빛(釵光)이 비치고
천하는 태평을 이어받아 상서로운 기운이 열리네

水旱頻仍不是災
力扶幼主鎮埏垓
朝中又見釵光照
宇內承平氖象開

유태후가 인종을 보좌해 송조에 한차례 태평한 기상이 나타나게 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어떠했을까? 1022년 송 인종이 제위(帝位)를 이으니 이때 나이 겨우 13세라 유태후가 수렴청정했다. 유태후는 인종의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황후의 신분으로 권술(權術)에 자못 능했으나 아쉽게도 슬하에 아들이 없어 늘 지위가 불안하다고 느꼈다. 1110년, 궁녀 이(李)씨가 아들(훗날의 인종)을 낳자 그녀는 즉시 아이를 빼앗아 자기 소생으로 만들고 내시를 매수해 작은 들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포대기 속에 넣어 이씨가 들고양이를 낳았다고 말하게 했다. 이 일이 바로 민간에 매우 광범위하게 전해진 “들고양이로 태자를 바꾼(狸貓換太子)” 이야기다.

유태후 집정 시기 송조는 경제, 문화 방면에서 모두 진일보로 발전했다. 그러나 방대한 관료와 군대를 두었기에 국가 재정이 감당하지 못하여 “적빈(積貧 관료·군대 비대화로 인한 누적된 재정 부족)” 문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요, 서하와의 몇 차례 전쟁으로 군사상의 문제도 불거져 “적약(積弱 누적된 군사적 약체)” 문제 역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1033년 유태후가 병으로 서거한 후 인종이 직접 조정 정사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이때서야 인종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유후가 아니라 이씨임을 알게 되었다.

인종은 천성이 공손, 검소하고 어질고 너그러워 가뭄이나 수해를 만나면 궁궐 안에서 비밀리에 기도하거나 맨발로 전하(殿下)에 서곤 했다. 입는 옷은 모두 세탁한 것이었고 일상 침구는 명주실을 꼬아 만든 직물을 많이 사용했다. 이부(吏部)에서 인재를 선발할 때 한 번이라도 사형죄에 오판하여 떨어뜨린 자는 평생 전임시키지 않았다. 그는 늘 보좌하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은 일찍이 사람을 저주한 적도 없거늘 하물며 감히 극형을 남용하겠는가!”라고 했다.

오랫동안 정무를 방치한 인종은 즉위한 후 여이간(呂夷簡) 등 보수적인 대신들을 등용했다. 재상 여이간은 전후 도합 20년 동안 집정했는데, 그는 《중서총례(中書總例)》라는 책을 모두 419권 편찬하도록 건의해 집정 대신들이 일을 처리하는 근거로 삼게 했다. 여이간의 주재 아래 재상이 일을 처리하는 정사당(政事堂)은 과거 관례에 따르는 아문으로 전락했다. 훗날 여이간은 또 왕수(王隨), 진요좌(陳堯佐) 두 사람을 추천해 자신의 후임 재상을 맡게 했다. 이 두 사람 역시 정치적으로 무능한 자들이었다. 얼마 안 되어 왕수는 병으로 휴가를 청했고 진요좌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자주 결근하여 출근하지 않으니, 당시 어떤 사람은 중서성이 “양병방(養病坊 병을 치료하는 방)”으로 변했다고 풍자했다.

조정의 중추 기관이 이러했으니 다른 관원들 역시 자연히 “인정(人情)에 젖어 태만하고 관습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진종 때 태산 봉선 이후 쌓인 폐단이 인종 때 더욱 악성으로 팽창했다. 인종 때 국세(國勢)는 이미 “적빈(積貧)”, “적약(積弱)”의 곤경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서하가 또 기회를 틈타 전쟁의 단초를 일으켰다. 1040년, 서하군이 삼천구(三川口 지금의 연안 서쪽) 전역에서 송군을 대패시키고 대장을 포로로 잡았으며, 1만 여 명의 송군 정예병이 모조리 손실되었다. 삼천구 전투의 참패는 송 인종을 크게 놀라게 했으므로 섬서(陝西) 송군의 장수들을 조정하고 사대부들 사이에서 명망이 자못 높은 한기(韓琦), 범중엄(範仲淹) 두 사람을 변방의 통수로 발탁했다.

범중엄은 진·한 이래 장수의 병법에 정통했고 인재를 알아보아 잘 쓸 줄 알았으니, 송대의 뛰어난 명장 적청(狄靑)이 바로 그가 발탁한 사람이었다. 범중엄이 변방 통수로 부임한 이후에야 송군은 연이은 패전의 역사를 끝낼 수 있었고, 송조 변방 방어선도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된 기색을 띠었다. 1044년(경력 4년), 송과 서하가 다시 화의하니 역사상 이를 “경력화의(慶曆和議)”라 부른다. 화의의 규정에 따르면 서하의 이원호는 제왕의 칭호를 취소하고 송조의 책봉을 받아들이며, 송측은 매년 서하에 은 7만 2천 량, 비단 15만 3천 필, 차 3만 근을 주기로 하여 “세사(歲賜 해마다 주는 은사)”라 칭하고, 양측의 국경 무역을 개방하는 등이었다.

거란이 기회를 틈타 위협하자 북송은 또 세폐(歲幣)로 은과 비단을 각각 10만씩 추가하여 앞뒤로 합계 50만 량·필이 되었다. 이후 비록 송조 서북 변방의 위기가 잠시 잠잠해지긴 했으나, 이 굴욕적인 화약은 다시 한번 송조의 “적약” 상태를 보여주었다.

송과 서하의 화의가 진행되던 경력 3년(1043년), 인종은 내외의 곤경을 벗어나고자 과감히 개혁을 결의하여 여이간의 재상 겸 추밀사 직무를 파면하고 범중엄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해 “경력신정(慶曆新政)”을 추진했다.

범중엄은 상벌을 명확히 해서 요행울 억제하고, 과거를 정밀히 하고, 관원을 잘 선발했으며, 공전을 균등히 하고, 농업과 잠업을 두텁게 하며, 무비(武備)를 수리하고, 요역을 줄이며, 은혜와 신의를 넓히고, 명령을 중시하는 등 10가지 제도를 세우고 기강을 떨쳐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다. 이 10가지 건의의 핵심 내용은 이전의 관원이 고정된 연한에 따라 승진하던 제도를 바꾸어 관원에 대해 엄격한 평가와 심사를 진행해 정치적인 업적의 우열에 따라 각각 승진과 강등을 시키는 것, 관원 자제에게 음서의 특혜를 주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 지방 장관의 파견에 대해 중서성과 추밀원이 책임지고 엄격히 선발하는 것, 과거 제도를 개선해 오로지 사부(辭賦)로 진사를 뽑고 묵의(墨義)로 제과(諸科)를 뽑던 방법을 바꾸어 경세치용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흡수해 관료 대열을 보충하게 하는 것이었다.

범중엄의 건의는 대부분 송 인종에 의해 채택되었다. 경력 3년 10월부터 경력 4년 상반기까지 송 인종은 범중엄의 혁폐(革弊) 주장에 근거하여 속속 조서를 발표해 내외 관원의 고과 승진 방법을 새롭게 규정했고, 대신들이 자제나 친척이 청요직을 맡거나 관직을 전임·승진시켜 줄 것을 청하는 것에 제한을 두었으며, 또 음서 제도에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각급 관원이 음서할 수 있는 인원과 관직에 대해 전보다 더욱 엄격한 제한을 두었고, 각 지역 지방관에게 수리(修利)를 일으키고 작은 현을 합병하는 등 이역(吏役 아전과 하급 관리)의 인원수를 줄이고 감원된 이역은 고향에 돌아가 농사에 힘쓰게 했다.

“경력신정”은 추진된 지 얼마 안 되어 보수파와 무능한 관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리고 한때 폐단을 혁신하기를 바랐던 송 인종도 유언비어의 영향 아래 범중엄, 부필(富弼)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훗날 그들을 잇따라 파직시켰다. “경력신정”은 겨우 1년 정도 추진되다가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송 조정의 정사는 더욱 적약해졌다. 1058년, 막 조정에 불려 들어온 왕안석이 다시 상서를 올려 변법을 실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인종과 뒤를 이어 즉위한 영종 모두 중시하지 않았다.

1063년, 송 인종 조정(趙禎)이 재위 41년 만에 병으로 서거했다. 《송사》는 찬양하여 말했다.

“재위 42년 동안, 다스림이 나태한 듯했으나 일을 맡김에 있어서는 각박하고 잔인한 이들을 배척했고, 형법은 해이한 듯했으나 옥사를 결단할 때는 공평하고 바른 이들이 많았다. 나라에 요행과 폐단이 어찌 없었으랴만 치세(治世)의 근간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고, 조정에 소인배가 어찌 없었겠으나 선량한 이들의 기운을 꺾을 수는 없었다. 군신 상하가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충후(忠厚)한 정치는 송조 삼백여 년의 기틀을 두텁게 북돋아 주었다. 자손들이 그 방식을 일시에 바로잡으려 하다가 점차 혼란에 이르렀으니, 《전》에 이르기를 “군주가 되어 그침은 인(仁)에 있다” 하였으니, 인종 황제는 진실로 이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신종의 진흥 시기와 왕안석 변법

송 인종이 서거한 후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인 조서(趙曙)가 황위(皇位)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송 영종(英宗)이다. 송 영종은 재위 4년 만에 병으로 서거하고 그 아들 조욱(趙頊)이 황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송 신종(神宗)이다. 송 신종은 재위 18년 동안 가장 큰 업적이 1069년(희녕 2년) 왕안석을 참지정사로 등용해 “희녕변법(熙寧變法)”을 추진한 것이다.

신종은 태자로 있을 때 이미 천하의 대사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어 사람들이 모두 매우 현덕(賢德)하다고 여겼다. 그는 20세에 황위를 계승한 후 조심스럽고 겸손하며 보좌하는 재상을 경외하고 직언을 구하며 민정(民情)을 깊이 헤아리고 외롭고 늙거나 궁핍한 이들을 불쌍히 여겼다. 궁실을 수리하지 않고 나들이를 일삼지 않았으며 날마다 정사에 몰두해, 자신이 작위(作爲)를 가져 조씨 강산의 적빈적약(積貧積弱) 국면을 바꾸기를 바랐다.

이때 송조의 관리는 “건국 초기의 10배”에 달했고, 중급 이상의 관원은 대우가 극히 두터웠다. 북송 군대의 수는 더욱 불어나 송 태조 말년 금군(禁軍)과 상군(廂軍)이 37만 여 명이었으나, 영종 치평(治平) 연간(1064년 ~ 1067년)에 이르러 116만 여 명에 달했다. 즉 90년 동안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송 인종 때 사람들의 통계에 따르면 매년 군비 지출 총액이 4,800만 민(緡)에 달해 전체 재정 수입의 6~70%를 차지했다.

대량의 군비 지출 외에 북송 통치자들의 부패가 심해짐에 따라 방탕한 낭비 역시 갈수록 심각해졌다. 예를 들어 교례(郊禮)의 비용이 진종 경덕(景德) 연간(1004년 ~ 1007년)에는 한해 600만 민이었으나 인종 때에는 1200만 민으로 증가했다. 국가 재정이 그야말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신종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찍이 글을 올려 개혁을 제안했던 왕안석을 지강녕부(知江寧府 지금의 남경)에서 경성으로 불러들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고 정견을 피력하게 했다.

왕안석이 부임한 후 송 신종은 즉시 그를 접견했고, 첫 만남에서 간절하게 말했다.

“짐이 오래 전부터 경의 도술(道術)과 덕의(德義)를 들었으니 충언(忠言)과 좋은 지략이 있거든 마땅히 짐에게 아끼지 말고 고하도록 하시오. 지금 다스림에 있어 무엇을 먼저 해야 하오?”

왕안석이 대답했다.

“술(術 학문과 법도)을 선택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했습니다.

조욱이 또 물었다.

“당 태종은 어떠하오?“

왕안석이 그를 격려하여 말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요·순을 본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요·순의 도는 지극히 간단하여 번잡하지 않고, 지극히 요긴해 우회하지 않으며, 지극히 쉬워서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신종이 이에 만족을 표시했다.

두 번째 접견 때 신종이 왕안석에게 “당 태종은 반드시 위징을 얻고 유비는 반드시 제갈량을 얻은 후에야 큰일을 할 수 있었소”라고 했다. 뜻인즉 자신에게 세상에 보탬이 될 인재가 보좌해 준다면 반드시 대업을 일으킬 수 있음을 표시한 것이다.

왕안석이 신종을 깨우쳐 말했다.

“폐하께서 진실로 능히 요·순이 되신다면 반드시 고요(皐陶), 기(夔), 직(稷)과 같은 이가 있을 것입니다.” 뜻인즉 좋은 “천자”가 있으면 반드시 좋은 현신(賢臣)이 있다고 하여, 송 신종이 개혁에 정진하면 사방의 “현인”들이 반드시 그의 곁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를 보좌해 대업을 성취할 수 있다고 격려한 것이다.

송 신종은 1069년 2월 왕안석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고, 이어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라는 이름의 새 기구를 설치해 왕안석이 주재하게 하고 전적으로 변법 조치를 기초하게 했다. 1069년부터 1076년까지 8년 동안 송 신종은 왕안석의 강력한 협조 아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목표를 둘러싸고 신정을 추진했다. 주 내용은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장병법(將兵法) 등 9가지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희녕변법(熙寧變法)”이다.

“희녕변법”은 전후 추진된 지 18년에 달하여 송조 국고 수입을 크게 증가시켰고, 부고(府庫)가전에 없이 충실해지는 국면이 나타나 진종 말년 이래의 “적빈”, “적약” 형세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아쉽게도 신종이 불과 재위 18년 만인 1085년에 병으로 서거하고 아들인 조후(趙煦)가 황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송 철종(哲宗)이다. 계승할 때 아직 10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신종의 어머니 고(高)씨가 태황태후(太皇太后)의 신분으로 수렴청정하여 사마광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가 다시 정권을 잡자 변법을 주재하던 재상 채확(蔡確)과 지추밀원사 안도(安燾)를 잇따라 조정에서 쫓아냈다. 채확은 신주(新州 지금의 광동 신흥新興)로 유배되어 폄소(유배지)에서 박해받아 죽었다. 수구파는 변법파를 철저히 공격하기 위해 또 여혜경(呂惠卿) 등 16명을 왕안석의 “친당(親黨)”으로 정하고 안도 등 10명을 채확의 “친당”으로 정한 뒤, 두 “친당”의 명단을 방에 올려 공포하고 전부 조정에서 쫓아내 다시는 조정에 들어와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변법파를 공격하고 박해한 이 복구 활동은 철종 원우(元祐) 연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역사상 “원우 갱화(更化)”라 부른다. “희녕변법”은 송 신종이 병으로 서거함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