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아(唐雅)
【정견망】
중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고국(文明古國)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인류 사회의 발전과 조대의 교체뿐만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전문화(神傳文化) 및 역대로 전해 내려온 수도(修道) 방법과 원만의 길을 더욱 포함한다.
남당(南唐)의 심분(沈汾)이 지은 《속선전(續仙傳)》에는 신라 사람 김가기(金可記)가 중국에 와서 도를 닦고 백일비승(白日飛昇 대낮에 하늘로 올라감)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김가기는 통일신라 사람으로, 일찍이 외국 공생(貢生)의 신분으로 당조(唐朝) 과거에 참가하여 빈공진사(賓貢進士)에 급제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도술(道術)을 좋아했고 사치와 화려함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복기(服氣)하고 연형(煉形, 몸을 단련함)하며 그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맑고 아름다운 문장을 지었다. 용모가 준수하고 행동과 말씨에서 유별나게 중화 예의의 풍도가 더욱 드러났다.
김가기는 진사에 급제한 후, 공명과 이록(利祿)을 좇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와서 초가집을 짓고 은거하며 세사를 초탈하고 청정을 사모하는 지취를 드러냈다.
그는 손수 온갖 기이한 꽃과 과일나무를 많이 심었고, 늘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마치 골몰히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또 《도덕경(道德経)》 및 각종 선가(仙家)의 경전을 끊임없이 암송하며 몰입하여 수련했다.
3년 뒤, 김가기는 고국을 그리워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그는 다시 도복(道服)을 입고 중국으로 돌아와 다시 종남산으로 들어가 수련했다. 그때부터 그는 적덕행선(積德行善)을 더욱 중시했다. 남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있으면 한 번도 물리치거나 거절하지 않았고, 늘 온 힘을 다해 일을 잘 처리했다. 그의 부지런함과 선행은 일반 사람들이 비길 바가 아니었다.
당 선종(宣宗) 대중(大中) 11년(857년) 12월, 김가기가 갑자기 표문을 올려 말했다.
“신은 옥황의 조서를 받들어 영문대시랑(英文台侍郎)이 되었으니, 내년 2월 25일에 마땅히 상승(上升)할 것입니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겨, 사신을 파견해 그를 궁 안으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그는 굳건히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선종이 또 옥황의 조서를 보기를 청하자, 김가기는 그 조서는 이미 다른 신선이 관장하는 바라 인간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에 당 선종은 그에게 궁녀 4명과 향약(香藥), 금백(金帛) 등을 하사하고, 또 궁중 사신 2명을 보내 특별히 시종하게 했다.
그러나 김가기는 줄곧 혼자 조용한 방에 살며 궁녀와 사신들을 거의 가까이하지 않았다. 매일 밤 사람들이 그의 방에서 손님들이 웃으며 담소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궁중 사신이 호기심에 몰래 훔쳐보니, 수많은 선관(仙官)과 선녀들이 각각 용과 봉황 위에 앉아 엄연히 마주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또 적지 않은 선계의 시위(侍衛)들이 있었다. 궁녀와 사신들은 이 광경을 보고 감히 놀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 해 2월 25일이 되자, 봄볕이 곱고 화창하며 온갖 꽃이 만발했다. 공중에는 과연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고 선학(仙鶴)이 울며 난봉(鸞鳳)과 백곡(白鵠)이 날아올랐다. 생황과 피리가 함께 울리고 금석(金石)악기가 화답하였으며, 우개(羽蓋 깃털 덮개)와 경륜(瓊輪, 옥바퀴 수레), 번장(幡幢, 당기)과 의장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신선의 의장이 지극히 성대하고 광경이 매우 수승(殊勝)했다. 김가기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
당시 조정의 관리들과 선비, 백성들이 다투어 구경하러 몰려와 인파가 산골짜기에 가득 찼다. 이 수승한 광경을 마주하고 우러러보고 예배하며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라는 한반도 역사상의 중요한 국가 중 하나로,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으로 불렸다. 이곳은 원래 한반도 동남부의 부족 연맹이었으나 나중에 점차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일하였고, 말기에 다시 분열되어 마침내 서기 935년 고려에 귀순했다.
김가기는 먼 길을 마다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왔는데, 표면적으로는 학문을 익히고 과거에 참가하기 위함이었으나 나중에 벼슬길을 택하지 않고 종남산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를 닦았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그를 진정으로 끌어당긴 것은 비단 중원의 학문과 제도뿐만이 아니라 중화 대지에 유구하게 전해 내려오는 수련 문화였다.
중국이 특수한 까닭은 찬란한 인류 문명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선 일찍이 신이 사람에게 전하신 수많은 문화 및 다양한 법문(法門)의 수련 방법이 널리 전해졌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서로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중국에 왔는데,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지식과 재물, 공명이 아니라 생명이 도(道)를 얻어 원만하고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김가기가 보여준 것은 고대 수도인이 원만할 때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끄는 일종의 형식, 즉 백일비승이다.
고대 사회는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었으며,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신불(神佛)과 천국 세계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상서로운 구름, 선학, 난봉, 선악(仙樂 선계의 음악)과 천계의 의장을 직접 목격했을 때, 이 모든 것을 단순히 허망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경외심을 품고 우러러보며 예배했다.
그러나 만약 똑같은 광경이 오늘날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또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쩌면 누군가는 그것을 마술이라 여길 것이고, 누군가는 환각일 것이라 의심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그것이 어떤 현대 과학이 만들어낸 시각 효과라고 말할 것이다. 신적(神跡)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관념이 변했기 때문이다. 인심이 변하고 사유 방식이 변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변했으니, 똑같은 일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낳게 된다.
사람이 오직 눈으로 볼 수 있고 기계로 측정할 수 있는 사물만을 믿을 때, 자신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는 모든 것을 문밖으로 밀어내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잠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고서에 남겨진 수많은 백일비승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신선은 실존하며 수련 역시 결코 허무맹랑한 전설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의 수련 도리로 볼 때는, 고대 수련인이 비록 천계(天界)로 올라갔다 할지라도 반드시 삼계(三界)를 진정으로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인간 세상보다 더욱 아름답고 수승한 경지에 들어갔을 뿐, 아직 생명의 최종적인 해탈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수련 이야기와 신적의 등장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신을 향한 신앙을 유지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화민족을 위해 수련 문화를 다져주어 후세 사람들이 수도, 적덕, 원만 및 천국으로 돌아가는 진정한 내력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김가기가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와서 벼슬길을 버리고 종남산에 은거하며 도경(道經)을 암송하고 기를 마시며 형체를 단련하고 음덕(陰德)을 널리 쌓다가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일비승한 것은, 그의 일생이 마치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인간의 삶은 짧은 명리를 좇기 위해 온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은 내 생명이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고대의 수련 문화는 오늘날을 위해 기초를 다진 것이다. 오늘의 정법(正法) 시기야말로 생명이 진정으로 삼계를 닦아 나가 원만해서 천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 때이다. 대법이 널리 전해짐에는 신분, 지위, 재산의 문턱이 없으며, 중시하는 것은 사람이 선념(善念)을 지킬 수 있는지, 진상을 명백히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아직도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만고(萬古)의 기연은 단 한 번뿐이다.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품는 일념이 생명의 아득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현대 관념의 구속 때문에 신전문화(神傳文化)를 거부하지 말고, 미혹과 주저 속에서 이 만고에 만나기 힘든 회귀의 기연을 놓치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