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源馨)
【정견망】
사람은 누구나 분주히 애쓰며 목표를 갖고 무언가를 추구한다. 혹은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거나, 돈과 권력이 많아지거나, 복을 누리고 장수하거나, 자손이 번창하거나, 지혜와 능력이 출중하거나, 왕이나 성인, 영웅이 되는 등등이다. 요컨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인생의 극치란 대략 이런 것들일 것이다. 그중 하나를 성취하는 것만으로도 실로 쉽지 않으며, 어쩌면 평생의 노력을 다 쏟아부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 모든 것을 다 성취한다면 이 생명은 곧 마음대로 뜻을 이루며 대자재(大自在)하고 번뇌와 고통이 없어지게 되는 것일까?
《서유기》 맨 처음에 화과산 수렴동(水簾洞)이 나온다. 당시에는 이름도 성도 없고 그저 미후왕(美猴王)이었을 때, 오공의 생활은 이미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다. 이른바 “봄에는 온갖 꽃을 따서 음식으로 삼고, 여름에는 온갖 과일을 찾아 삶의 방편으로 삼네. 가을에는 토란과 밤을 거두어 세월을 이어가고, 겨울에는 황정(黃精)을 찾아 세월을 보내네.”라며 한없는 즐거움을 누렸고, 그렇게 삼오백 년을 보냈다.
근심 걱정 없이 삼오백 년을 보낸다는 것이 사람에게 과연 어떤 개념이겠는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것은 고작 이 정도일 것이다.
미후왕에게 최초의 진정한 번뇌가 생길 때까지는 말이다. 원숭이 왕이 말했다.
“오늘은 비록 인왕(人王)의 법률에 속하지 않고 짐승의 위복(威服)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장차 나이가 들어 혈기가 쇠해지면 암암리에 염왕 늙은이의 통제에 들어갈 것이다. 일단 하루아침에 몸을 잃는다면 그릇된 모습으로 세상에 윤회하면서 천인(天人)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될 수 있지 않겠느냐?”
어쩌면 이 세상에 들어온 생명은 결국 생명의 영원에 관한 이 문제를 생각하고 번뇌하게 마련인가 보다.
원숭이 왕은 부처, 신선, 신성(神聖) 이 삼자(三者)를 찾으면 윤회를 피할 수 있고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일 당장 너희들을 떠나 산을 내려가 세상을 유람하고 아득한 하늘 끝까지 두루 돌아 기어코 이 삼자를 찾아 불로장생을 배워 영원히 염왕의 재난을 피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방백(旁白)이 있다.
“아! 이 한마디 말이 그로 하여금 문득 윤회의 그물에서 뛰쳐나와 제천대성(齊天大聖)을 이루게 하였구나.”
이것은 아마도 생명의 불성(佛性)이 발동한 것일 터이니, 이 생각이 일단 나왔으니 성공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후에 보리조사에게 이르러 ‘손오공’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바로 “완고한 공(空)을 타파해야 비로소 공을 깨닫는다(打破頑空須悟空)”는 것이다. 이곳에서 도법(道法)의 구결을 얻어 선체(仙體 신선의 몸)를 닦았고, 또 72가지 변화와 구름을 타는 법을 배웠다. 화과산으로 돌아온 후 혼세마왕을 소탕하였고, 또 여의금고봉을 얻으니 더욱 대단해졌다. 염왕전(閻王殿)에 가서 생사부에서 자신과 다른 원숭이들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으니,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이미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행복의 극치에 도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육신은 이미 병도 없고 고통도 없고 재난도 없는 불로장생(不老長生)에 이르렀다. 나중에 천계(天界)로 올라가 ‘제천대성’이 되니 더욱 소요자재했는데, 그 천궁(天宮)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다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때 오공의 마음은 마성(魔性)이 우세해졌다. 천정(天庭)에서 회유하여 필마온(弼馬溫)을 시키자 그는 천하다고 여겼고, ‘제천대성’을 시켜주자 천궁을 크게 어지럽혔으며, 나아가 귀왕(鬼王)들과 요괴들을 동료로 삼았다. 글 속의 호칭도 ‘요후(妖猴 요괴 원숭이)’, ‘괴물을 잡는다’ 등등으로 바뀌었는데, 이 역시 하나의 반영이다. 결국 “오행산 아래에 마음 원숭이를 안정시키다(五行山下定心猿)”에 이르게 된다.
오공은 자신이 이미 무적이라고 여겼고, 심지어 옥황상제 자리라도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여래불의 손바닥을 빠져나가지 못하겠는가? 그 결과는 빠져나가지 못한 채 오행산 아래에 갇히고 말았다. 오행산이란 무슨 뜻인가? 그가 생각했던 자신이 아무리 대단하고 높고 크다 한들 삼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오행으로 구성된 이 물질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신불(神佛)의 지혜와 능력, 자비와 위엄에 비하면 그야말로 거의 말할 가치조차 없다.
그가 보살의 점화를 받아 당승(唐僧)과 함께 서천 취경(取經)의 길을 걷는 것은, 사실상 비로소 진정으로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며,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마침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요괴를 베고 마를 제거하며 자심(自心)의 마성을 닦아내고, 불성을 채워나감과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니 마침내 투전승불(鬥戰勝佛)로 수련 성취되었다.
시작 부분에서부터 볼 수 있다시피 오공의 진정한 내력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애초에 그는 이 공간에 속하지 않고 고층 상계(上界)에서 인간세상으로 떨어진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명이 어찌 영원히 범진(凡塵) 속에 갇혀 있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오공이 취경의 길을 걷게 된 경위는 바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러한 명리정(名利情)의 것들이 얼마나 허황하고 의미 없는 것인지, 그리고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움 또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한 것들은 오직 사람의 본성을 더럽히고 묻어버려 자신의 진정한 내원을 망각하게 만들 뿐이다.
사대 명작의 하나인 《서유기》는 중화문화 속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글 속에서 늘 ‘심원(心猿, 마음 원숭이)’을 말하는데, ‘심원’은 ‘심원(心願 마음의 소원)’과 음이 통한다. 이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생명은 모두 고층 공간, 즉 신(神)의 경지에서 이 홍진(紅塵)의 미혹된 세상으로 떨어진 것이며,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진정한 마음의 소원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의 추구로부터 생명이 회귀하는 길로 마음을 내서 걸어간 오공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