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林雨)
【정견망】
날마다 산에 기대어 전만을 바라보니
모산은 푸르고 푸르러 얼굴빛 변하지 않네.
푸른 바다에게 언제 늙느냐 물었더니
맑은 바람은 내게 언제 한가로워질 거냐 묻네.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면 한가로울 수 없고
한가로울 수 있는 이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네.
日日依山看荃灣,帽山青青無顏改。
我問滄海何時老,清風問我幾時閑。
不是閑人閑不得,能閑必非等閑人。
이 시 《이연관해(怡然觀海, 마음 편히 바다를 바라보다)》는 원대(元代) 시인이자 화가인 고극공(高克恭)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고극공은 자가 언경(彥敬), 호가 방산(房山)이며 색목인(色目人)으로 대동(大同)에 적을 두었다가 그의 부모가 나중에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으로 이주하였으며 조상은 서역 출신이다. 고극공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원대의 유명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산수화는 처음에는 미불(米芾), 미우인(米友仁) 부자의 화풍을 배웠고, 나중에는 다시 동원(董源), 이성(李成) 등의 화법을 취하여 산수의 의취(意趣)와 기운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동시에 먹죽(墨竹)에도 능하여 필묵이 맑고 윤택하며 조예가 깊고 깊었다.
이 시 《이연관해》는 시인이 푸른 산과 푸른 바다를 마주했을 때의 소감을 쓴 것이다. 시 속에는 산과 바다, 맑은 바람의 자연적 의경(意境)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한가로움을 누리기 어렵다는 감개도 담겨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가로움(閑)’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고 세속의 명리에 얽매이지 않게 된 후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여유와 자유자재함을 말한다.
“날마다 산에 기대어 전만을 바라보니
모산은 푸르고 푸르러 얼굴빛 변하지 않네.”
시인은 매일 산에 기대어 전만(荃灣)을 바라보는데, 모산(帽山)은 여전히 울창하고 푸르러 마치 한 번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산빛은 늘 푸르고 창해는 아득하다. 짧고 변화무쌍한 인생에 비해 대자연은 마치 세월의 침해를 받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은 홍진 속에서 분주히 일하고 바쁘게 살아가며 얼굴빛이 늙어가고 마음의 경계 또한 득실에 따라 오르내리지만, 푸른 산은 묵묵히 우뚝 서 있고 창해는 여전히 밀물과 썰물이 오가며 맑은 바람 또한 오고 감이 자유롭다. 시인은 이러한 광경을 마주하고 자연스럽게 시간과 인생에 대한 사색을 자아내게 된다.
“푸른 바다에게 언제 늙느냐 물었더니
맑은 바람은 내게 언제 한가로워질 거냐 묻네.”
시인은 바다가 언제 늙을 것인지 물었지만, 맑은 바람은 도리어 그에게 “너는 언제 진정으로 한가로워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한 차례 문답은 매우 절묘하다. 시인은 표면적으로는 바다에 묻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바다가 늙을 것인지 아닌지는 대답할 필요가 없으며, 진정으로 대답해야 할 것은 사람이 어찌하여 종일토록 바쁘게 지내는지, 어찌하여 세상의 명리와 득실에 늘 얽매여 자신의 마음을 끝내 편안히 가라앉히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비단 한가롭기만 하면 육신이 젊음을 유지하여 늙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색이 변하지 않는 푸른 산과 태고부터 흘러온 푸른 바다를 빌어 사람이 세속 속에서 겪는 노고와 덧없음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과도한 욕망을 내려놓고 명리에 대해 득실을 따지며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마음의 경계는 자연히 평화롭고 밝아질 것이며 생명 또한 조급함과 소모가 줄어들 것이다.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면 한가로울 수 없고
한가로울 수 있는 이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네.”
이 두 구절이 시 전체의 화룡점정이며, 그 안에는 ‘한(閑 한가로움)’과 ‘등한(等閑 평범함)’의 서로 다른 의미가 절묘하게 녹아 있다.
소위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면 한가로울 수 없다”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에게 담박하고 여유로운 마음의 경계가 없다면 진정한 청한(淸閑)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하고, “한가로울 수 있는 이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은 번잡하고 복잡한 세속 속에서 명리를 내려놓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한 ‘한가로움’이란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더욱 더 아니고, 일을 할 때는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임하다가 일이 지나간 후에는 또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번잡함 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외부 환경에 의해 동요되지 않고, 명리의 득실을 마주할 때도 여전히 평온과 청성(淸醒)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의 사람들은 사실 진정으로 한가로워지기가 매우 어렵다. 일이 바쁠 때는 휴식을 갈망하지만, 막상 진정한 여유가 생기면 또 온갖 일로 시간을 채우려 든다. 어떤 이는 오락에 빠지고, 어떤 이는 사방으로 접대하러 다니며, 어떤 이는 계속해서 부업으로 돈을 벌고, 또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생각이 끓어오르고 온갖 잡념이 끊이지 않는다. 몸은 비록 멈춰 섰을지라도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편안히 가라앉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한가롭고 한가롭지 않음은 할 일이 있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에 달렸다. 만약 집착을 버리지 않고 인심(人心)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비록 깊은 산속에 홀로 앉아 있다 할지라도 꼭 청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마음이 평화롭고 득실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비록 번잡하고 시끄러운 환경 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역시 어느 정도 여유와 편안함을 지켜낼 수 있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9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만약 당신 자신을 제고하려면 당신은 안에서 찾아야 하며, 당신의 이 마음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그래야만 진정하게 제고할 수 있으며, 가부좌 중에서 당신은 비로소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질 수 있음이 바로 공(功)으로서, 정력(定力)이 얼마나 깊은지는 층차의 체현이다.”
수련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한가로워진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것이다. 모순이 나타날 때 안으로 찾고, 이익이 건드려질 때 버릴 수 있으며, 온갖 욕망과 잡념이 솟구칠 때 그것에 의해 이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집착과 인심을 끊임없이 내려놓음에 따라 마음은 자연히 청정해지고 경계 역시 그에 따라 높아질 것이다.
시 속에서는 비록 직접적으로 수련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수련과 상통하는 이치를 담아내고 있다. 진정으로 청한(淸閑)해질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의 명리를 담박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며, 번잡함 속에서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사람은 그 경계가 자연히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다.
“한가로울 수 있는 이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평범하지 않다(非等閑)’는 것은 어떤 사람의 신분이 얼마나 높고 능력이 얼마나 큰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이 버리기 힘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도도한 홍진 속에서도 한 가닥 청정한 마음을 지켜낼 수 있는지에 있다.
어떤 이들은 경계를 높이는 것이 그리 복잡하지 않고, 자신을 고요하게 하고 한가롭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치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실제로 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어찌 고요해질 수 있겠는가? 집착을 버릴 수 없다면 어찌 진정한 한가로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를 보면 청한(淸閑)이란 밖을 향해 구한 환경이 아니라 안으로 닦아낸 경계이다. 바쁨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고, 득실 앞에서 동요하지 않으며, 번잡함 속에서도 청정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한가로울 수 있는 이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