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추배도》 중 남송 건립에 관한 관련 예언
《추배도》 제22상은 남송의 건립을 예언했다. 제22상의 그림에는 말 한 마리가 홍수에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강왕(康王) 조구(趙構)가 남송 건립 초기에 언제든지 금나라에 의해 멸망당할 위험에 직면해 있었음을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하늘이 빈 공간을 가르니
극에 달한 뒤에 태평함이 돌아오네
아득하고 아득하여
나무를 만나 크게 의지하리다
天剔當空,否極泰來。
闖闖淼淼,木遘大賴
“하늘이 가름(天剔)”은 천마(天馬)를 뜻한다. 휘종, 흠종 두 황제가 금나라 사람에게 포로로 잡힌 후 조구(趙構)가 나서서 곤궁의 극치에서 태평함으로 돌아오니, 비록 금병의 위협이 있으나 이로부터 남송이란 치우쳐 편안한 왕조를 개창함을 뜻한다.
송(頌)에 가로되:
신령한 서울의 왕기가 동남에 가득하니
갈수(褐水)가 왕양하여 책략을 막는구나
나무 하나가 2, 8월을 지탱하니
떠날 때 말의 색깔이 반쯤 평안하도다
神京王氣滿東南
褐水汪洋把策幹
一木會支二八月
臨行馬色半平安
그중 “나무 하나가 2, 8월을 지탱한다(一木會支二八月)”는 것은 간신 진회(秦檜)의 이름을 암시한다. 이 네 구절은 두 황제가 포로로 잡힌 후 왕기가 동남쪽으로 옮겨갔으나 금나라의 재앙의 물이 여전히 가장 큰 위협임을 말한다. 두 황제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가 금나라에 의해 남송으로 송환된 진회는 조정에서 재상이 되어 금나라의 공범이 되었으며, 구석에 편안히 있으며 화의할 것을 주장하고 거듭 항금 장수를 박해했다.
남송 건립과 고종의 통치 시기
1127년 금나라 장수 알리불이 개봉을 함락하고 휘종, 흠종 두 황제 및 후비, 종실을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갈 때 송조 조씨 황족의 적계(嫡系) 종실 중 오직 강왕 조구만이 화를 면했다. 강왕 조구는 송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송 흠종의 동생이었다. 금병이 두 번째로 개봉을 포위하기 직전, 그는 친왕의 신분으로 명을 받아 형부상서 왕운(王雲)과 함께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화의를 청했다. 자주(磁州 지금의 하북 자현磁縣)에 이르렀을 때 왕운이 몰래 금나라 사람과 결탁해 조구를 인질로 잡으려 했다. 그 음모가 당시 자주지부(磁州知府) 종택(宗澤)에게 발각되어 조구는 북상하지 않고 상주(相州 지금의 하남 안양)로 물러났다.
금병이 북송을 멸망시키기 직전, 흠종은 사람을 보내 밤에 성벽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게 하여 그를 하북병마대원수(河北兵馬大元帥)로 임명하고 하북의 송병을 조직해 경성을 구원하러 들어오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과연 알리불이 휘종,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금병이 개봉을 철수하기 전에 전 북송 재상 장방창(張邦昌)을 “대초(大楚)” 황제로 책봉하여 그로 하여금 금나라 사람을 대신해 황하 이남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만 괴뢰정권은 금방 무너졌고,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인 강왕 조구가 1127년 5월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하남 상구商丘)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고쳤으니 이가 곧 고종이다. 훗날 고종은 또 임안(臨安 지금의 절강 항주)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이후의 송나라를 남송이라 칭한다.
송 고종 조구는 1127년부터 1162년까지 총 36년을 재위했다. 남송 정권 건립 초기에 금병의 심각한 위협으로 인해 고종은 명망이 아주 높았던 이강(李綱)을 재상으로 임용하여 적극적으로 항금(抗金)에 나섰고; 애국 장군 종택이 군사를 이끌고 북벌해 중원과 북송의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려는 것을 지지했으며; 한때는 악비(岳飛)의 항금 투쟁을 지지하기도 했다. 당시 하북과 하동의 군사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의병을 조직해 적에 대항했는데, 많은 곳은 수만 명, 적은 곳도 수천 명에 달했다.
후에 편안함으로 기울던 고종은 이강을 교체하고 간신 진회의 사주를 받아 금나라와 화의를 맺음으로써 악비의 중원 수복 대업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1142년(소흥 11년), 남송은 금과 “소흥화의(紹興和議)”를 체결했으니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송은 금에 신하를 칭하며, “자손 대대로 공손히 신하의 절개를 지킨다.”
② 송과 금의 국경은 동쪽으로는 회하 중류, 서쪽으로는 대산관(大散關 섬서 보계寶雞 서남)을 경계로 한다. 송은 당주(唐州 하남 당하), 등주(鄧州 하남 등현) 두 주 및 상주(商州 섬서 상현商縣), 진주(秦州 감숙 천수) 두 주의 절반을 금에 떼어준다.
③ 송은 매년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조공한다.
같은 해 악비가 해를 입었다. 20년 후인 1162년(소흥 32년), 금나라가 화의를 파괴하고 대거 남침했다. 송 고종은 부득불 소흥 32년에 퇴위를 선언하고 양자 조빈(趙斌 훗날의 효종)에게 제위를 계승시키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정충보국한 악비의 이름이 천고에 빛나다
남송이 동남쪽 구석에 편안히 머물던 초기, 고종은 항금을 주장하던 대신들을 중용하고 장수 악비의 항금과 북방 잃어버린 땅 수복을 지지하여 “정강의 치”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
악비는 자가 붕거(鵬舉)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악비의 모친이 악비로 하여금 나라에 충성하고 보답하는 마음을 잊지 않게 하려고 악비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후인들은 그가 남긴 사(詞) 《만강홍(滿江紅)》을 통해 악비의 장대한 뜻을 엿볼 수 있다.
성난 머리칼이 관(冠)을 찌를 듯이, 난간에 기대어 서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울부짖으니,
장사의 웅장한 감회가 끓어오른다.
삼십 년 쌓은 공명은 한갓 먼지나 흙과 같고,
팔천 리 원정길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 없구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젊은 머리가 이미 희어졌으니
부질없이 슬프고 애절할 뿐!
怒發沖冠,憑闌處、瀟瀟雨歇。
抬望眼,仰天長嘯,壯懷激烈。
三十功名塵與土,八千裏路雲和月。
莫等閑、白了少年頭,空悲切。
정강(靖康)의 치욕은 아직 씻지 못했으니,
신하로서 이 한을 어느 때나 없앨 수 있으랴?
전차를 몰아 하란산(賀蘭山)의 산봉우리가 닳도록 짓밟으리라.
굳센 뜻으로 배고프면 오랑캐의 살을 먹고,
웃고 이야기하며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옛 산하를 처음부터 다시 수복한 후에,
천자를 알현하러 가리라.
靖康恥,猶未雪。臣子恨,何時滅!
駕長車,踏破賀蘭山缺。
壯志饑餐胡虜肉,笑談渴飲匈奴血。
待從頭收拾舊山河,朝天闕。
악비는 진정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송의 약한 군대와 잔병(殘兵)의 시세 속에서 무적의 “악가군(岳家軍)”을 조직했다. 이 군대는 금병과 대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송이 잃은 모든 성과 현을 수복할 거대한 기세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5백 명의 기병으로 10만의 적병을 격파하여 금인(金人)들로 하여금 바람만 불어도 두려워 떨게 만들었으니 당시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악비의 주요 전공은 다음과 같다.
1128년, 범수관(泛水關)에서 금병을 대패시켰다.
1129년, 떠돌이 도적 장용(張用), 이성(李成)을 격파하고 또 광덕에서 금병을 격파했다.
1130년, 금병을 격파하고 건강(健康)을 광복했고 이 공로로 승진했다.
1134년, 양양(襄陽) 6군을 광복하고 악주(鄂州)로 진영을 옮겼다.
1135년, 동정호의 난을 평정하고 그 공로로 개국공(開國公)에 올랐다.
1136년, 금나라 괴뢰 정부 제(齊)나라 병사를 대파했다.
1140년, 언성(郾城)에서 금올출의 괴자마(拐子馬)를 격파했다. 주선진(朱仙鎮)에서도 금병을 대패시켰다.
악가군이 이토록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악비가 한편으로는 군사 기율이 엄명하고 백성들을 추호도 범하지 않아 “얼어 죽을지언정 백성의 집을 헐지 않고, 굶어 죽을지언정 약탈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명성을 얻어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병사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병사들이 병에 걸리면 악비가 직접 약을 달여주었고; 제장들이 멀리 수비하러 나갈 때는 악비가 직접 그들의 가족을 돌봐주었으며; 전사한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고 그 고아를 보살펴주거나 자녀들의 혼인을 도와주었다. 조정에서 포이 있을 때마다 악비는 모두 부하에게 넘기고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악비는 한마음으로 송조의 안위만을 염려했다. 누군가 그에게 천하가 언제쯤 태평해질 수 있겠느냐 묻자 악비는 “문신이 돈을 아끼지 않고 무신이 죽음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화의를 주장하던 재상 진회는 금인 올출과 사통해 악비를 죽이려 했습니다. 악비를 모함하기 위해 그는 고종 앞에서 참언을 해서 잇달아 12차례나 금패(金牌)를 내려 전선에서 작전하던 악비 부자를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사신이 이르자 악비는 웃으며 말하기를 “황천후토(皇天后土)께서 이 마음을 증명하시리라”라고 했다.
악비가 12개의 금패를 받고 돌아올 때 도월(道月)이라는 선사가 그에게 임안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충의로운 악비는 자신의 충심(忠心)을 밝히기 위해 도월 선사의 권고를 듣지 않고 금의위(錦衣衛)를 따라 임안으로 돌아왔다. 도월은 어쩔 수 없이 시 한 수를 남겨 악비에게 보냈다.
풍파정 아래 물은 도도히 흐르니,
천만 번 굳은 마음으로 키를 잡았네
오직 동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고약해,
자신을 깊은 물결 속으로 밀어 넣을까 두려워라.
風波亭下水滔滔
千萬堅心把舵牢
只恐同行人意歹
將身推落在深濤
악비가 임안으로 압송되자 처음에 진회가 하주(何鑄)에게 심리를 명하니 악비가 옷을 찢어 등에 새긴 “정충보국” 네 글자를 하주에게 보여주었다. 하주는 그의 정성에 감동해 그가 무고함을 알고 돌아가 상세한 내용을 진회에게 알렸다. 그러나 진회는 악비를 시기하고 미워해 다른 사람을 시켜 악비의 억울한 사건을 심리하게 했다. 이 사람은 공(公)을 사(私)로 삼고 온갖 모함을 다 했으나 여전히 증거를 찾지 못했다.
당시 악비가 갇혀 있던 옥중에 풍파정(風波亭)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었다. 악비는 이 모든 것이 모두 명에 정해진 것이요 자신이 이미 천수(天數)가 다한 송조를 떠받들려 한다고 해서 떠받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옥중에서도 여전히 태연했고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진회는 작은 종이쪽지에 친필로 “막수유(莫須有 혹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죄목을 붙여 풍파정에서 충직하고 선량한 부자를 살해했다! 사망 당시 악비는 나이가 불과 39세였고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으며 전국의 군사와 백성들이 악비가 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발을 구르며 통곡하고 비통해했다.
악비를 해친 진회는 도월 선사를 몹시 시기해 시위장인 하립(何立)을 시켜 금산사로 가서 그를 체포하게 했다. 당시 도월은 마침 경전을 강론하며 설법하고 있었는데 하립이 조용히 곁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뜻밖에 도월 선사가 즉석에서 게송 하나를 읊었다.
“내 나이 마흔아홉,
시비는 날마다 있도다;
내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요,
오직 많이 입을 놀렸음이로다.
하립은 동쪽에서 오고,
나는 서쪽으로 가나니;
부처님 힘이 크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남의 손에 떨어질 뻔했구나.”
吾年四十九,是非日日有
不爲自家事,只爲多開口
何立從東來,我從西方走
不是佛力大,幾乎落人手
그러나 선악에는 보응이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니, 악비를 해친 진회는 나중에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을 받았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며 혼비백산했고 자신의 혀를 씹어 고름이 문드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의 아내 왕씨 역시 비명횡사해 혀가 두세 촌이나 길게 삐져나왔다. 진회 부부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도 붕어했다.
효종이 즉위한 후 악비의 충의를 표창하기 위해 명을 내려 악비묘를 수리해 금빛 찬란하게 지었으며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 꿇은 진회, 왕씨, 만사(萬俟), 장준(張俊) 4 간사한 자들의 형상을 주조했다. 누군가 무덤가에 대련을 지어 붙였다.
“청산은 다행히 충신의 뼈를 묻었으나,
무쇠는 무고하게 간신을 주조했네.”
山有幸埋忠骨,白鐵無辜鑄佞臣
악비며 대전 정중앙에는 “정충보국”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