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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절 굴원과 《이소》 (1): 단오절이란

동흔(童欣)

【정견망】

제1집. 단오절 개요

오늘은 전통 명절인 단오절(端午節)을 말해보겠다.

먼저 단오절의 이름에 대해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단오절은 중화 전통 명절 중에서 이름이 가장 많은 명절이다. 단오절에서 ‘단(端)’은 발단이나 시작을 의미하며, ‘오(午)’는 정오를 뜻하기도 하고 십이지신 중 오(午) 즉 말에 해당한다. 간지(干支)에 따르면 음력 12달 중 정월은 인(寅)월로 첫 번째 달이고, 5월이 오(午)월이다. 또 중국어로 ‘오(五)’와 ‘오(午)’는 발음이 같아서 단오절의 이름이 매우 다양해졌다.

단오절은 정오의 ‘오’와 관련이 있다. 정오는 하루 중 가장 더운 때이며,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는 여름이다. 하루의 정오처럼 단오절도 무더운 여름의 시작이기에 ‘단오절’이라 한다. 또한 ‘단오(端五)절’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는 음력 5월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숫자 ‘5’를 직접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단양절(端陽節)’은 무엇일까? 5는 양(陽)의 수이기에 단양절이라 부른다. 사실 여름은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때이며, 단양절부터 양기가 점점 더 성해진다.

단오절은 여름 명절로, 이때부터 점점 더워지며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에 ‘하절’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4대 전통 명절을 꼽자면 겨울의 설, 봄의 청명절, 여름의 단오절, 그리고 가을의 중추절(仲秋節 추석)이 있다. 단오절은 중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여름의 주요 명절이다.

또한 ‘중오(重五)절’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흔히 5월 초닷새를 말하는데, 5월 5일은 5가 두 번 겹치므로 중오절이라 한다. 중오(重午)나 중오(重五) 모두 시간상의 의미를 담은 이름들이다.

‘천중절(天中節)’이라는 이름도 있다. 오일(午日)에는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러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5월 5일을 ‘남아절(男兒節)’로 지내는 것도 아마 천중절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남성만이 천지의 중심에 통하는 기운을 이어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단오절은 시간적 관점에서 ‘오월절(五月節)’, ‘오일절(五日節)’, ‘오절(五節)’ 등으로도 불린다.

청명에는 버드나무를 꽂고, 단오에는 쑥을 걸어둔다. 쑥은 약재로 쓰이며 향이 강렬하다. 단오에 쑥을 거는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남북조 시대에 이미 사악한 기운을 쫓고 독을 피하기 위해 대문에 쑥 인형을 걸어두었기에 ‘애절(艾節 쑥 명절)’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단오 쑥

천성적으로 자연을 즐기니,
독한 달에 비범함이 드러나네.
집집마다 정성껏 쑥을 모시니,
마음의 향기에 사악한 담력이 서늘해지네.

天生樂自然,毒月顯超凡。
家家全敬艾,心香邪膽寒。

제2집. 단오절 – 가장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전통 명절

단오절은 ‘창포절(菖蒲節)’이라 부르기도 하며 간단히 ‘창절(菖節)’이나 ‘포절(蒲節)’이라는 이름도 있다. 창포는 물가에서 자라는 초본식물로 땅속뿌리줄기는 향료나 건위제로 쓰인다. 꽃이삭은 몽둥이 같고 잎 모양은 칼처럼 생겼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벽사(辟邪)에 사용하여 단오에 창포를 거는 풍습이 생겼다. 또한 ‘욕란절(浴蘭節)’이라고도 한다. 남방의 난초는 약용 가치가 있어 단옷날 사람들이 난초를 많이 채집해 그 물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단오절을 ‘위생절(衛生節)’이라고도 한다.

‘용주절(龍舟節)’이라는 이름도 유명하다. 용주절은 당시 용선(龍船)을 저어 굴원을 구하려 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용선을 젓는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굴원은 중국 최초의 위대한 시인으로 후세 시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그를 기념하는 단오절을 ‘시인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원소절의 원소, 추석의 월병처럼 단오절의 대표 음식인 종자를 따서 ‘종자절(粽子節)’이라 부르며, 누가 종자 잎을 가장 길게 벗기는지 내기하는 것에서 유래한 ‘해종절(解粽節)’도 있다.

또한 ‘여아절(女兒節)’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나라 심방의 《완서잡기(宛署雜記)》에 따르면, “5월 여아절에는 단오 줄을 매고 쑥 잎과 오독령부(五毒靈符)를 단다. 완(宛)의 풍속은 5월 초하루부터 초닷새까지 어린 소녀들을 지극히 아름답게 단장시킨다. 시집간 딸들도 친정에 돌아오기에 여아절이라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용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용일’, 도교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속죄를 빌며 재를 올리는 중요한 날인 ‘지랍절(地蠟節)’ 등이 있다.

단오절의 수많은 이름은 이 명절이 여름의 특징을 가득 담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계절 중 여름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봄에 씨를 뿌리면 여름에는 성장한다. 추석이 수확을 말한다면 여름은 성장의 단계이며, 만물이 매우 빠르게 자라는 시기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미 오디와 앵두를 맛보았을 것이고, 무더운 여름이 오면 밀이 곧 익으며 살구 등 과일이 점점 더 많이 익어갈 것이다.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온다는 특징이 있다. 청명절 무렵에 “청명을 전후해 오이와 콩을 심는다”라고 하는 이유는 강수량이 적고 온도가 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이 빠르게 성장하려면 더 많은 비와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온도가 높고 강수량이 많은 여름은 만물의 성장에 적합하다. 사실 여름은 성장의 시기이며,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는 과정에서 그 사이의 ‘하장(夏長, 여름철 성장)’은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다 같이 단오절의 이름을 꼽아 보자: 단오절(端午節), 단오절(端五節), 단양절(端陽節), 중오절(重五節), 중오절(重午節), 오월절(五月節), 오일절(午日節), 오일(午日), 오절(午節), 용일(龍日), 하절(夏節), 천중절(天中節), 송시절(送時節), 창절(菖節), 포절(蒲節), 창포절(菖蒲節), 욕란절(浴蘭節), 위생절(衛生節), 굴원일(屈原日), 용주절(龍舟節), 종자절(粽子節), 해종절(解棕節), 시인절(詩人節), 여아절(女兒節), 소아절(小兒節), 지랍절(地臘節), 오단절(五蛋節), 등절(燈節), 사류절(射柳節) 등등.

단오절은 정말 이름이 많다. 과연 이름이 가장 많은 중화 전통 명절이라 할 만하다.

제3집. 단오절의 절기 음식 – 종자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기에 그 과정에서 좋은 것도 자라지만 좋지 않은 것도 함께 자란다. 좋지 않은 것이란 독한 것, 악한 것을 말하며 그래서 5월을 ‘악월(惡月)’이라 부른다. 5월은 특수한 달이기에 과거에는 악월 또는 ‘독월(毒月)’이라 했다. 만물이 빠르게 자라듯 모기, 파리, 독사 같은 좋지 않은 것들도 빠르게 자라며 역병도 창궐하기 쉽다. 기온이 높아지면 전염병이 넓은 지역으로 유행하기 쉽기 때문이다.

‘온역(瘟疫, 전염병)’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온(瘟)’ 자에는 따뜻할 ‘온(溫)’의 음이 들어 있는데, 이는 열병을 뜻한다. 높은 온도는 질병의 전파를 매우 빠르게 촉진하기에 온병이라 한다. 역병은 유행병이나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을 뜻한다. 2003년의 사스나 오늘날의 질병들도 고대의 관점에서는 모두 온역, 즉 광범위하게 유행하는 질병이다. 단오 무렵인 여름철에는 질병이 유행하기 쉬워 많은 풍습이 여름의 특징이나 악월, 독월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먼저 단오절은 종자와 밀접하여 ‘종자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사각형의 종자인데, 북방과 남방의 종자는 조금 다르다. 북방에서는 주로 찹쌀과 대추를 사용한다. 기장쌀로 만든 종자를 먹어본 적이 있는가?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 기장쌀로 종자를 직접 싸서 보내주셨는데, 찹쌀 종자가 더 부드럽고 맛있었으며 기장쌀 종자는 식으면 매우 딱딱했다. 하지만 기장쌀은 황금색이기에 대추를 넣으면 ‘황금이 마노를 감쌌다’라고 하여 매우 상서롭고 듣기 좋았다. 남방에서는 주로 찹쌀 종자를 먹는다. 북방은 기장쌀이 있어 기장 대추 종자를 예쁘게 빚으며, 과일 절임, 단팥 앙금, 대추 페이스트나 오인(五仁) 등 다양한 소를 넣기도 한다.

남방의 종자는 모양이 다양한데 우리가 흔히 먹는 것은 사각형이다. 남방에는 베개처럼 큰 종자도 있고, 소주의 종자처럼 길쭉한 사각형도 있다. 재료 면에서 광동에는 계란 노른자나 오리알 노른자를 넣은 종자가 있고, 북방에서는 드물지만 남방에는 고기 종자도 있다. 또한 붉은 팥이나 녹두를 소로 넣기도 한다.

종자는 매우 맛이 좋다. 요즘은 당뇨 환자가 많아져 잡곡 종자도 많이 먹는다. 특히 고기를 넣은 종자는 열량이 높으므로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단오절에 먹는 절기 음식이 종자이기에 종자절이라 부른다.

단오절의 유래를 말하자면 중화민족의 성현(聖賢)이자 지선지미(至善至美)한 위대한 시인 굴원(屈原)을 빼놓을 수 없다.

탁세(濁世)의 깨끗한 연꽃 – 전국시대 굴원을 찬양함

나라와 백성 걱정하니 복이 만년토록 이어지고,
양강(陽剛)하고 정대(正大)하니 탁세의 연꽃이로다.
홀로 행함에 무엇이 두려우랴?
순선(純善)하고 순미(純美)한 화려한 문장을 남겼네.

憂國憂民福萬年,陽剛正大濁世蓮。
特立獨行何所懼?純善純美著華篇。

제4집. 가로로는 진나라 황제, 세로로는 초나라 왕

단오절의 유래가 굴원을 기념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은 누구나 안다. 오자서나 효녀 조아(曹娥)를 기념한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굴원을 기념한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다. 당시 초나라는 영토가 가장 넓은 국가였지만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서주 시기 천자(왕) 아래 작위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5등으로 나뉘었다. 작위가 있는 자는 모두 제후로 사대부보다 지위가 높은 귀족이었으며 각자의 봉지인 ‘국(國)’이 있었다. 당시 초나라 군주는 고작 자작(子爵)이었다.

본래 초나라 군주의 봉지는 50리 정도였으나, 남방의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영토가 점점 넓어져 훗날 매우 강대해졌다. 전국시대 중후기에는 “가로로는 진나라를 황제로 만들고, 세로로는 초나라를 왕으로 만든다”라는 말이 있었다.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합종은 지도를 세로로 보아 연, 조, 한, 위, 제나라 등이 초나라와 연합하여 서쪽의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으로, 이 연맹의 수장인 초나라가 천하의 ‘왕’이 되는 길이다. 반면 강대한 진나라가 한, 조, 위, 제나라 등과 연합하여 남쪽의 초나라에 대항하는 가로 연합이 성공하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진나라 황제’가 되는 것이다.

전국시대 후기 각국의 혼전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혼란을 끝내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중화 문명은 인문시조(人文始祖) 황제(黃帝)가 천하를 통일한 이래 요순우(堯舜禹) 오제(五帝) 문명의 교화와 하, 상, 서주(西周) 1,000여 년의 통일을 거쳤다. ‘제’나 ‘왕’은 모든 제후의 존경과 추대를 받는 천자였으며 백성의 삶은 안정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서주 말기부터 춘추전국시대 400여 년 동안 예악(禮樂)이 붕괴하고 주 천자의 권위가 사라지자, 대국이 소국을 무력으로 병합하며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관문을 세워 외침을 방어하고 관세를 늘렸다. 이는 국가에는 이득이었으나 천하 사람들에게는 불리했다. 제후국들은 각자 도생하며 문자, 화폐, 도량형 등을 제각각 사용해 서로 소통하고 환산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사상적으로도 백가쟁명(百家爭鳴)이 화려해 보였으나 각자 자기주장만 내세우니, 진리와 사설(邪說)이 뒤섞여 인심이 타락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중화 대지에 귀정(歸正)과 통일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진시황은 천명(天命)에 순응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해 봉건제를 대체했으며 도량형을 통일하고 관문을 헐어 도로를 닦음으로써 물자와 인력의 유통을 도왔다. 문자 통일, 수레 궤도 통일, 인륜 통일을 통해 2,000년 대일통(大一統) 중화 문명의 안정된 기초를 세웠다. 비록 후세에 분열의 시기가 있었으나 결국 통일로 귀결된 것은 그의 공로이다. 진시황은 흉금이 넓고 뜻이 원대해 중화민족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에 천고일제(千古一帝)로 불린다.

당시 초나라의 관점에서 보자면 6국이 연합해 진나라에 항거함으로써 초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하, 상, 서주의 왕도(王道) 정치를 회복할 기회가 있었다. 굴원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초회왕(楚懷王)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패는 굴원이 아니라 초회왕의 뜻과 도량, 덕행에 달려 있었다.

제5집. 합종의 수장 초 회왕이 신의를 저버리다

춘추시대 예악 붕괴의 상징으로 진(秦)나라의 제천(祭天)과 초나라의 칭왕(稱王)을 꼽는다. 이 두 사건은 주나라 천자의 위엄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이를 ‘참월(僭越, 분수에 넘치는 짓)’이라 했으며, 이는 국가의 혼란을 초래했다. 하, 상, 서주 시대에는 오직 천자만 왕(王)이라 불렸으나, 초나라는 작위는 낮으면서 토지와 재물이 풍부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초나라는 제후 중 처음으로 왕을 칭한 나라였고, 진나라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제천 의식을 처음으로 행한 제후국이었다.

초나라 왕이 왕을 칭한 것 자체가 참월이었으나,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진짜 천자가 되기를 원했다. 만약 초나라가 성공했다면 다시 봉건제로 돌아가 결국 춘추패권 다툼과 전국시대의 혼란으로 회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진시황이 2,000년간 이어질 중앙집권 체제를 개창하는 길을 선택했다. 역사상 천고일제로 불리는 이는 당 태종과 강희제, 그리고 진정으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뿐이다.

강대한 진(秦)나라에 맞서기 위해 연, 제, 한, 조, 위, 초 6국은 연합해 초 회왕을 합종(合縱)의 수장으로 추대했다. 당시 초 회왕은 의기양양하게 천하 통일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때 그는 굴원을 등용하여 좌도(左徒)라는 높은 관직을 맡겼다. 굴원은 덕이 높고 박학다식했으며, 아름다운 정치를 구현할 이상과 지혜, 방책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초 회왕은 초기에는 굴원을 중용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초 회왕은 확실히 명군(明君)은 아니었다. 덕이 지위에 미치지 못하는 소인이었으며, 전국시대에는 춘추시대보다 도덕 수준이 낮은 군주들이 많았다. 소인의 특징은 이익 앞에 흔들리는 것이다.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했다. 초 회왕은 이익앞에서 의리를 망각하는 견리망의(見利忘義)하는 자였고, 이를 간파한 진나라의 장의(張儀)가 그를 유혹했다. 당시 제나라는 강대국이었고 초나라와 제나라는 동맹국이었다. 장의는 초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면 진나라 땅 600리를 그냥 주겠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초 회왕은 고작 600리의 땅 때문에 신의를 저버리고 제나라와의 약속을 깼으며 적국인 진나라와 손을 잡았다.

나중에 초나라가 땅을 요구하자 장의는 “내가 언제 600리라 했는가? 내 봉지인 6리라고 했을 뿐이다”라며 말을 바꿨다. 600리가 6리가 되자 격분한 초 회왕은 진나라와의 화친을 깨버렸다. 이는 진나라에 공격의 빌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배신을 당한 제나라가 다시는 초 회왕을 믿지 않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6집. 소인을 가까이하고 현신을 멀리한 초 회왕의 비참한 최후

제나라는 춘추시대 첫 패권국이었던 강대국이다. 그런 제나라를 배신하고 진나라에 아부했던 초 회왕을 제나라 왕이 다시 믿어줄 리 없었다. 신용 없는 소인의 변덕으로 합종 연맹은 파괴되었고, 초 회왕은 천하의 신뢰를 잃었다. 결국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진나라에 붙잡힌 초 회왕은 타향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덕 있는 군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현신인 굴원을 쓰지 않은 초 회왕은 《제자규》에서 말하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해로움이 무궁하다(不親仁,無限害)”라는 말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만약 초 회왕이 굴원을 굳게 믿고 중용했다면 천하를 통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인을 가까이하고 이익에 눈이 멀어 땅도 얻지 못하고 목숨까지 잃었으며 끝내 초나라는 멸망했다. 명군과 혼군의 차이는 명확하다. 군주가 밝고 도덕이 높아야 백성과 국가가 복을 누린다. 초 회왕 개인의 비극을 넘어 수많은 백성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굴원의 위대함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있다. 그는 혼탁한 세상의 깨끗한 연꽃이었고 어두운 밤의 밝은 달이었으며, 자신보다 천하를 걱정하던 성철(聖哲)이자 선지자(先知者)였다. 중화민족이 명절을 만들어 그를 기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굴원은 초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천하를 통일할 기회가 있다고 믿었으나, 초 회왕과 그 뒤를 이은 초 경양왕(頃襄王)은 모두 소인이었다. 정직하고 충성스러우며 무사(無私)했던 굴원은 권력자들의 이익에 방해가 되었고, 결국 소인들의 참소로 두 차례나 유배를 당했다. 첫 번째 유배 시절 그는 자신의 진심으로 군주를 깨우치기 위해 《이소(離騷)》를 지었다. 초 회왕은 이를 보고 잠시 후회하며 그를 다시 불러들였으나, 끝내 소인의 말을 더 믿어 그를 다시 유배 보냈다. 굴원의 부국강병 이상과 바른 행실이 소인들의 모함을 부른 것이다. 《이소》에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굴원은 유배 중에 《이소》를 지었는데, 사마천은 ‘이소(離騷)’를 ‘이별의 근심(離憂)’이라 풀이했다. 혹자는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기에 굴원은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굴원과 같은 성현은 사사로운 불평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의 마음은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 있었고, 이대로 가면 초나라가 망하고 초나랄 백성들을 포함한 천하 백성이 도탄에 빠질 것을 예견한 것이다.

굴원의 흉금은 비단 초나라에만 머물지 않았다. 흔히 그를 애국자라 하지만 진정한 성현은 천하를 품는 법이다. 그는 당시 많은 사람들고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형법이 엄혹하고 통치가 가혹하다고 보았고 때문에 진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실 그는 단지 초나라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하 백성에 관심을 갖고 사랑했던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0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