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悟眞)
【정견망】
우리가 신(神)의 존재를 실증할 수 없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눈으로 본 것이 실재”라고 말하지만, 사람의 눈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진실을 볼 수 있는가?
세균과 미생물은 줄곧 존재해 왔지만,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미경은 인류가 미시 세계를 관찰하는 능력을 확장해 주었고, 망원경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먼 우주를 인식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사람의 감각기관에는 제한이 있고, 사람의 인식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영원히 인식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아직 설명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신이 한 것이라 認단정할 수도 없다.
과학의 발전은 그 자체로 끊임없이 탐구하고 검증하며 인식을 수정해 가는 과정이다. 한때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관념이 나중에 새로운 증거에 의해 바뀔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 공간, 그리고 인력을 다시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이 우주의 일체 법칙을 망라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위대한 과학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인류 인식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미래에 더욱 깊은 이론과 더욱 넓은 시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쉽게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신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나는 사람이 우선 겸손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한정된 인식을 최종 답으로 삼지도 않고, 검증되지 않은 추측을 확실한 사실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는 지구를 다시 살펴봐도 좋다.
인류의 생존은 많은 조건의 공동 작용을 필요로 한다. 적절한 온도, 액체 상태의 물, 호흡할 수 있는 공기, 햇빛, 그리고 상호 의존하는 생태계이다. 식물, 동물, 미생물과 자연환경 사이에는 복잡한 연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매일 습관이 된 한 모금의 공기, 한 잔의 맑은 물, 한 끼의 음식 뒤에는 모두 수많은 생명 과정과 자연 규율이 얽혀 있다.
이러한 조건들이 줄곧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지구 역시 어디나 거주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명이 이곳에서 지속될 수 있고, 이처럼 풍부한 형태를 발전시켜 냈다는 것은 여전히 놀라움을 자아낸다. 우리가 경탄하며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돌아서 생명을 잉태한 이 별을 바라볼 때, 이러한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은 왜 일어날 수 있었는가? 우주는 왜 이러한 규율을 가지고 있는가? 생명과 의식은 또 왜 나타난 것인가?
과학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미 많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 자연 규율에 대한 인식은 신에 대한 경외를 반드시 소멸시키지 않는다. 한 송이 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이해한다 해도 여전히 그 아름다움에 탄복할 수 있으며, 생명이 어떻게 운행하는지 이해한다 해도 여전히 생명의 의미를 추구해 물을 수 있다.
생명의 내원에 대해 말할 때, 두 가지 문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리고 생명이 나타난 후 어떻게 진화(演化)했는가이다. 그것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혼동시켜 하나로 말할 수는 없다.
생명의 기원에 여전히 풀리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해서 생명의 진화가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생물의 진화를 어떤 동물이 짧은 시간 내에 사람으로 변한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진지하게 토론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어떤 이론이 실제 설명하는 바가 무엇인지 먼저 이해한 후, 그것이 무엇에 답할 수 있고 무엇에 아직 답할 수 없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설명이 모든 철학적·신앙적 추구를 이미 결론지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식, 도덕, 인생의 목적, 그리고 우주가 더욱 깊은 층차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들 역시 신과 사람의 관계를 사고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과학을 믿으면 반드시 신을 믿지 않아야 하는가?
나는 두 가지가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관찰, 증거, 그리고 검증을 중시하며, 신앙은 흔히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고통에 어떻게 직면하며, 생명을 어떻게 안착할 것인가에 관여한다. 두 가지는 때로 동일한 문제를 논의하기도 하고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단지 “과학”이나 “신앙”이라는 표지만으로 한 사람의 일체 생각을 대신하여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과학자 중에는 신을 믿는 이도 있고 신을 믿지 않는 이도 있다. 한 사람의 전문적인 성취가 그의 신앙적 판단이 반드시 올바름을 직접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사고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가 왜 믿고 또 왜 믿지 않는가, 그의 이유는 무엇이며, 그는 서로 다른 증거와 관점에 어떻게 직면하는가이다.
중국의 전통에는 여와가 흙을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고, 《성경》에도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서술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문화와 신앙 전통에서 유래했지만, 모두 한 가지 이해를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생명에는 온 출처가 있으며, 사람은 세계의 절대적인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흙(泥土)”의 함의에 대해 서로 다른 신앙은 서로 다른 설명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상징으로 보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수련 관념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어느 한 층차의 물질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신앙적인 체험으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이미 과학적으로 실증된 결론으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내가 믿는 관념 속에서, 신은 사람의 출처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의 발전도 보살피고 계신다. 인류는 경작, 직조, 제지, 인쇄, 그리고 의약을 점차 배워 가며 역사 속에서 지식을 축적했고, 예의와 윤리, 문화를 형성했다. 황도파는 면방직 기술을 개량했고, 채륜은 제지 공정을 개량했으며, 필승은 활자 인쇄를 발명했고, 이시진은 《본초강목》을 편찬했다. 역사의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사람의 실천과 창조이지만, 나의 신앙이란 각도에서 보면 그 속의 지혜와 기연을 신의 계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말했고, 노자는 도(道)를 밝혔으며, 석가모니와 예수는 각자의 전통 속에서 사람들에게 욕망, 고난, 그리고 생명에 직면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사상과 가르침은 각자 내함을 가지고 있어 간단히 혼동하여 하나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모두 인류가 자신의 행위와 생명의 의미를 인식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신앙 역시 현실 속의 고난에 직면해야 한다. 세상에는 질병, 재해, 전쟁, 그리고 이별이 있으므로, 단지 신을 믿으면 반드시 상해(傷害)를 면한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나에게 있어 신을 경외한다는 것은 순탄한 환경 속에서 감사할 줄 알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선념(善念)을 지키며, 또한 자신이 일체를 다 이해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신의 존재 여부”를 물을 때, 어쩌면 자신에게도 한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판단은 진지한 사고를 거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익숙한 말을 따라 한 것인가? 미지(未知)에 직면하여 나는 경청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인식을 살펴볼 용의가 있는가?
나는 사람의 생명은 내원이 있으며, 우주 속에 경외할 만한 지혜와 질서가 있음을 믿고자 한다. 이것은 나의 신앙이자 내가 인생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생명을 아끼게 하고, 자신의 행위를 단속하게 하며, 나에게 경각심을 준다. 얼마나 많이 알든 간에 늘 겸손함을 유지해야 하며,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 늘 선(善)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