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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치에 대한 나의 견해

역사적 배치에 대한 나의 견해

글 / 워싱턴 dc 대법제자

【정견망】인류 역사상 늘 아주 많은 “공교로운” 일들이 발생하는데, 설령 속인들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우연한 일치”로만 해석하는 것은 역시 억지이다.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일체 역사는 모두 계통적이며 정밀하게 배치된 것임을 알고 있다. 아울러 일체는 모두 법을 위하여 온 것으로, 그 속에는 바른 일면이 있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이 불도신(佛道神)이며 무엇이 수련인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배치한 문화이다. 또한 부정적인 면도 있는데 이른바 대법을 고험하기 위하여 특별히 준비한 수많은 사악한 요소들이 있다. 만약 대법을 주선(主線)으로 한다면 아마도 역사의 일부 맥락을 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배치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제출하고자 하니, 그 중 적절하지 않은 곳은 시정해주기 바란다.

1. 중국의 불도(佛道) 신앙

중국은 역사적으로 대법을 전할 무대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수련방법이 모두 반드시 있어야 했으며, 아울러 아주 강성해야만 비로소 사람들의 “도”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을 수 있었다. 이 한 점은 서양 사회에서 소리없이 남몰래 전해지던 도가 수련과는 다른 점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역사에 진입하자마자 곧바로 도가의 수련문화였는데, 바로 헌원(軒轅) 황제(黃帝)가 개창한 문화였다. 그 당시의 “도(道)”는 종교가 아니었으나 거의 모든 백성들이 모두 “도”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후에 불도(佛道)의 다툼이 생겨 역사적으로 회창(會昌)연간에 도(道)가 부흥하고 불(佛)을 멸하는 법난(法難)이 생겼는데, 이것은 사부님께서는 『미술창작연구회에서의 설법』에서 왜 도교(道敎)가 나타났는가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이 있다.

2. 몇가지 역사상 교묘한 시간적 일치

사람의 사상이 갈수록 타락하면서, 춘추(春秋)시대에는 “대도기은(大道既隐 역주: 대도는 이미 숨어버렸다.)”현상이 나타났다. 공자는 대도(大道)가 이미 사람들에게서 갈수록 멀어져 간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세계 각지에서는 거의 동시에 인류에게 거대하고 심원(深遠)한 영향을 끼친 몇 사람이 탄생하였다.

중국에서는 노자(老子)와 공자(孔子)가 있었고, 인도에는 석가모니, 고대 그리스지역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동서양의 문화체계는 완전히 다르지만 중국이 주요 무대였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문명은 한때 휘황에 도달한 직후 곧 억제당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가장 저명한 이가 플라톤이었고 플라톤의 제자 중 가장 저명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들은 서양문명의 기초를 다진 3대 인물로 불린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탐구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갔다. 그는 논리, 관측, 실험을 더욱 중시하였으며 이것은 바로 현대 서양과학체계에 기초를 다져주었다. 그러나 현대 서양과학은 한 갈래 아주 치우친 길을 갔는데, 여기서는 잠시 논의하지 않겠다.

인도에 불교(佛敎)가 출현한 것도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전해지기 위한 준비였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지 200년 정도 후에 아쇼카왕은 인도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강대한 마우리아 왕조를 건립하였고 또한 세계각지에 널리 법을 알렸다. 그 당시 인도의 사신이 중국에 간 적이 있었으나 마침 진시황(秦始皇)이 통치하던 시기라 불교는 중국에서 자리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도가 외국에 홍법(弘法)하던 방식은 오히려 보존되어 내려왔다.

중국 동한(東漢) 초기에 이르러 불가(佛家)문화가 반드시 중국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였으므로, 한(漢) 명제(明帝)는 한 가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정수리에서 금빛을 발하는 황금사람(金人)이 궁전에서 날아 다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명제는 대신들을 소집하여 해몽하게 하였고, 한 대신이, “서방에 신(神)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를 부처님(佛)이라고 부르며 폐하께서 꿈에 보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한명제는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서천(西天)에 가서 경(經)을 얻어오게 했으며, 마침 아프카니스탄에서 동쪽으로 법을 전하러 오던 두 명의 고승을 만나게 된다. 이리하여 백마(白馬)에 불경을 싣고 낙양으로 갔고 한명제는 두 명의 인도 고승을 위해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하니, 즉 불교가 정식으로 중국에 들어온 시작이었다.

이때 불교는 인도에서 아직까지 소실되어선 안 되었다. 불교가 대량으로 중국에 전해진 때는 남북조(南北朝)와 수당(隋唐) 시기였고, 불교가 중국에서 왕성해질 때를 기다린 후에야 인도 대륙의 불교는 그 사명을 다 하였다. 당조(唐朝) 중기에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기원후 8세기부터 시작하여 인도의 불교는 천천히 힌두교로 변이되었고 후에는 기본적으로 소실되었다.

3. 중국문화의 흥성

중국 문화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만국이 조공을 바치러 오는(萬國來朝)” 중심이 2개가 나타나면 안 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문화와 과학이 최고봉에 올라갈 때 서양문화는 강력한 억제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그리스, 고대 이집토, 고대 페르시아, 고대 이스라엘과 고대 바빌로니아 등 북아프리카, 중동, 유럽의 최고 문명 성과를 모두 수집하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뮤즈박물관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케사르(=시이저)가 이집트를 원정할 때 단번에 불로 태워버렸다. 이어서 중세 유럽에는 “신권(神權) 우위의 정교(政敎) 일치” 정권이 나타나 사람들의 사상을 심하게 속박하였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자연스럽게 주변 국가들이 와서 배우는 학습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북미 대륙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하게 찬란한 빛을 발하는 문명이 바로 중국이었다. 한조(漢朝) 초기에 한(漢) 무제(武帝)는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천신만고 끝에 신강, 중동을 지나 로마에 닿게 하였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장건이 구사일생으로 로마에 간 것은, 역시 각지 사람들에게 중국과 중국문화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에 명대(明代)의 정화(鄭和)가 서양에 간 것도 일종의 문화수출인 셈이다. 동시에 각국 사자들은 이런 교류를 통하여 중국과 인연을 맺었다.

중국문화는 줄곧 위로 발전하는 추세였고 당조(唐朝)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으며 유불도(儒彿道) 3교는 전에 없던 휘황을 누렸다. 중국의 과학적 성취는 세계를 풍미하였고 최소한 동시대 다른 나라보다 몇백년에서 천년 정도 선진적이었다. 중국에 대법을 고험하기 위한 공산당이 출현하도록 하기 위하여 낡은 세력은 이 방면에서도 준비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중국문화를 쳐내리고 서양문화를 부추긴 것이다.

4. 서양 문화의 부흥

당조(唐朝) 이후, 중국은 짧은 5대10국(五代十國) 시대의 전란을 겪은 후 송조(宋朝)로 통일되었다. 송나라 때에는 정주리학(程朱理學 역주: 성리학을 만든 정자와 주자의 이름을 딴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한다.)이 나타났는데 개인적인 소견으로, 정주리학은 공자의 진정한 유학과는 다르다. 이 또한 중국문화가 내리막 길을 걷게 하기 위한 준비였다.

중국문화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동시에 오스만투르크가 일어나 동로마제국을 침략하였다. 이때 많은 학자들이 대량의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품과 문화, 역사, 철학 등 서적들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피신하였다. 이는 서유럽인들에게 고대 그리스의 휘황한 문화와 예술성과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당시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회복하고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문예부흥(=르네상스)”이다.

“문예부흥 운동”은 서양과학과 문화가 깨어나 흥성하는 기점이었고, 같은 시기 중국은 마침 원조(元朝)와 명조(明朝)로 접어들어 문화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한쪽은 흥하고 다른 한쪽은 쇠퇴하는 것은 2500년 전(前)에 동서양 문명의 흥쇠(興衰)와 아주 흡사한 것으로, 단지 주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원나라를 다스린 몽고인들은 수당(隋唐) 시대 선비족(역주: 고대 중국에 거주하던 몽고 퉁구스계열의 유목 민족)이나 청조(淸朝)의 만주족들과는 달리 한화(漢化)된 정도가 높지 못하였다. 명조(明朝)에 이르자 중국은 “공자를 받들고 경전을 읽으며 팔고문으로 과거를 시행하는” 팔고문제도가 시작되었다.

팔고문(八股文)이란 “성인을 대신하여 주장을 펴는 것(代聖人立言)”으로 이는 분명히 난잡한 것이다. 사람이 어찌 공자가 무엇을 말했는 지를 알 수 있으며, 무슨 자격으로 공자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팔고문은 지식인들에 대한 속박이 아주 커서, 이것 또한 중국 과학이 그 시기부터 기본적으로 발전을 멈추게 한 요인이 되었다. 중국은 송대(宋代) 이후부터 과학에 대한 공헌이 극히 적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중국문화가 안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중국문화를 이탈하고 천지와 우주에 대한 거대한 지식과 포용 정신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낡은 세력이 중국문화를 억제한 첫 걸음이었다.

중국이 과학문화에서 속박을 당하는 것은 서양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였고, 이런 무력침략은 또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침입하기 위한 준비였다.

5.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보존

여기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항은, 송대(宋代) 이후의 현상이었던 “성세수서(盛世修書)”이다. 송대 이후 비록 중국문화가 몰락하기 시작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관념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중국의 매 왕조는 온갖 힘을 기울여 전인(前人)들의 저술 중 정수(精髓)들을 수집하여, 국가가 자금을 대고 가장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중화 문명을 책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송대에는 『태평어람(太平御覽)』을 만들었고 명조(明朝)는 『영락대전(永樂大典)』을 만들었으며 청조(淸朝)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만들어 중국의 진정한 전통을 될 수 있는 한 완전하고 계통적으로 보존하려 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인들로 하여금 몇 천년 동안 축적된 신(神)이 전해준 문화를 철저히 잊지 못하도록 하였다.

6. 항해, 진화론과 산업혁명

15세기부터 시작하여 바스코 다가마, 콜롬부스,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였고 후에 다윈이 『진화론』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서양 열강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서양에서는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에 과학이 극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는데 몇 년 간의 발명이 과거의 백년 혹은 몇백년에 상응하였다. 표면적인 기술을 놓고 말하면 중국을 아주 빨리 초월하였다.

중국인은 역대로 자신의 문화를 자랑으로 삼았고, 전쟁 중에 비록 무력에 의해 정복되더라도 최후에는 거의 중국문화가 침략자에 대한 문화정복으로 변했다. 즉 침략자를 한화(漢化)시켰다. 그러나 서양 과학발전이 만들어낸 단단한 배와 위력적인 대포들은 기독교 문명을 들고 들어와 중국인들을 무력으로 정복했을 뿐만아니라 또한 문화적으로도 자괴감이 생기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사교(邪敎)가 중국에 침입하도록 문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7. 마르크스의 출현과 제정 러시아의 선택 및 “신문화운동”

마르크스주의는 일종 사설(邪說)로서 강대한 경제적 힘과 폭력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서양에서 근본적으로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의식형태 영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서양 종교의 힘과 싸워 전혀 이길 수 없었다. 그 당시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국왕의 교회에 대한 육성을 극력 공격했는데 역시 이런 원인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낡은 세력은 제정 러시아를 선택하였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정 러시아가 선택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영토가 아주 크고 대부분 지역의 기후 또한 아주 열악하여 이렇게 큰 영토를 정복하고 점유한 국가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용병술에 뛰어났던 나폴레옹마저도 모스크바에 투항한 적이 있었다. 이는 “10월혁명” 후에 소련이 유럽 열강들과의 대항 속에서 살아남게 된 원인이며 또한 2차 대전에서 히틀러에 의해 무너지지 않은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존재라야만 마르크스 사교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보증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인접하여 중국에 직접적으로 혁명을 수출함에 있어서 많은 편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낡은 세력은 아편전쟁부터 1차대전까지 쌓인 중국인들의 치욕감을 계속 이용하였는데 낙후하고 공격당하는 원인을 중국 전통문화로 인한 것이라며 오도(誤導)하였다. “5.4운동”이 이른바 “신문화운동”으로 불리운 것이 바로 전통을 버리고 마르크스-레닌의 사설을 옹호한 시작이었다. 그 당시 나온 백화문(白話文)운동과 좌익작가는 모두 이 한 단락의 역사가 배치한 일부분이다.

전통문화는 수천년 동안 계승되고 축적한 것으로 훼멸시키고자 해도 절대 하루 아침에 해낼 수 없다. 그러나 필경 이때 하나의 돌파구가 생겼고 이리하여 소련 공산당은 그것의 돈과 무력으로 마르크스-레닌의 사설을 중국에 강제로 주입하였다. 이 구체적인 경과는 『구평공산당 : 제2평』에서 참고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8. 미국을 선택

미국의 출현 역시 계통적인 배치의 일환이다. 미국이 없는 세계를 한번 상상해 보라.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서유럽을 휩쓸었고 일본은 극동(極東) 전쟁터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만약 미국이 없었다면 소련은 히틀러가 서쪽, 일본이 동쪽으로 쳐들어오는 공격을 받게 된다. 사실상 스탈린은 바로 이런 공포 때문에 중국 공산당에게 시안(西安)사변 후에 장개석을 즉시 죽이지 못하게 하고 대신 장을 핍박하여 일본에 대항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민족적인 대의(大義)를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9.18 만주사변” 이후 중국 공산당은 “무력으로 소련을 보위(保衛)하자”라는 구호를 따라야 했다.

미국의 존재는 반(反)파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관건적인 일보였으며, 동시에 2차 대전에서 유럽국가들과 소련이 합작하게 했는데, 이것 역시 나중에 소련이 동유럽을 점령하고 사회주의 진영을 건립하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하였다. 아울러 미국은 남달리 아주 좋은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직접 전쟁을 겪지 않았다. 전쟁 후에는 서유럽에서 부흥한 “마샬계획”의 주도자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계경찰의 지위를 다지게 되었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역사는 이외에도 아직 많고 많은 배치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진시황이 6개 국가를 통일하고, 동일한 문자를 쓰고, 동일한 바퀴를 만들었으며, 변경을 개척하고, 넓고 곧게 뻗은 도로를 건설한 등등이다. 지면상의 관계로 이런 자세한 것들은 생략하기로 하고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시대로 돌아오자.

9. 대법이 전해지기 시작

대법이 전해지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우주의 존망(存亡)문제와 관계되기 때문에 낡은 세력도 반드시 이를 위하여 조건을 창조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박해를 위하여 준비하였다.

80년 대에 기공(氣功)고조가 나타났고 90년대 초에는 “전국민 건강운동”, 1992년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로 사회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등등은 모두 대법을 위해 길을 닦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장(江) 귀신이 살인을 통해 무대에 등장하였고 1993년에 나타난 마오쩌둥 열조는 중국 공산당의 지위와 형상(形象) 등을 강화시켰는데. 이 역시 모두 박해를 위해 준비한 조건들이었다.

10. 경제 수혈(輸血)과 자본 철수

중국의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은 대법이 세계에 널리 전해지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동시에 낡은 세력도 이 점을 이용하여 세계 각국이 중공에 수혈(輸血)을 하도록 하고 중공의 탄압능력을 강화하였다. 지금 만약 중공에 대한 역사배치를 결말로 나아가게 한다면 경제적인 지지 역시 곧 끊어질 것이다.

1년 반 전에 내가 미국에서 한 연방 하원의원의 후원회에 참가했을 때, 그가 『본토(本土)투자법』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회사가 해외에서 올린 수입의 소득세 세율을 대폭 내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외국에서 거둔 투자 이윤을 본토로 가져올 수 있으며 또한 세금때문에 해외에 남겨 확대재생산하는 자금에 대한 탈세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는 이것 또한 역사의 배치임을 깨닫지 못했다.

며칠 전 미국 하원 세무위원회는 『본토투자법』을 통과시켜 세율을 35%에서 5.2%로 조정하였으며 기한은 일년으로 하고 조건은 이 수입을 미국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모건 체이스의 예측에 의하면 이는 미국에 4000억 불 이상의 자금이 돌아오도록 한다고 한다.

중국은 이로 인하여 장차 무역수지에 역조가 발생할 것이다. 동시에 일본도 중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중단하려 하는데, 이는 금융업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아, 외자에 의지해 생활하던 중국 공산당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결 론

지면이 제한되어 있는 관계로 많은 일들은 주마간산 식으로 스쳐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독자 여러분들도 역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늘 그 배치의 세밀함에 감탄하곤 한다. 신(神)은 항상 우리가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는 방위에서 시작하여, 보기엔 아주 우연하고 극히 사소한 작은 일로부터 전반 역사의 노정을 개변시킨다. 인류사회의 매 한가지 일은 대법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아울러 일부 일들의 축적과 준비는 짧은 것은 몇 년, 긴 것은 수백년에서 수천년에 이른다.

이것은 또 단지 최근 5천년의 역사만을 열람한 것에 불과하다. 아울러 인류는 잡다하고 호번(浩繁)한 역사책 속에 미혹되어 그속에서 뛰쳐나와 역사의 진면목을 볼 길이 없는데, 그의 지혜는 실로 비천하고 가련하다.

사존께서는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겠다. 대각자들이 오늘의 이 일을 배치하였다면 우주 연화(演化)과정 중의 일체 일은 모두 이 일을 위하여 길을 열어야 한다. 우주가 형성되는 초기에 최후의 대사(大事)를 위하여 배치하였다.”(『법륜대법의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만고(萬古)의 멀고 오랜 배치였다. 이에 비하면 사람의 지혜와 역사는 티끌 위의 먼지보다도 보잘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멀고 오랜 배치를 위한 한 분자(分子)로서 정법(正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행운이며 영광이겠는가?

“유유세월 영예와 고생은, 다만 이때에 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네.(悠悠歲月榮與苦,只爲此时了洪願.)”

이상은 아주 얕고 천박한 개인의 인식에 불과하며 단지 교류를 위해 제공할 따름이다.

문장발표:2004년 12월 28일 화요일
문장분류 : 문명신견
원문위치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4/12/28/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