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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현장(玄奘)이 서천에서 경을 얻고 돌아온 후

불가이야기 :현장(玄奘)이 서천에서 경을 얻고 돌아온 후

작자:루신원(陸欣文)

【정견망 2006년 11월 22일】
고전명작 《서유기》는 현장이 곤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천축에 가서 경을 얻은 경력을 예술적으로 서술했다. 그럼 그가 진경(真經)을 얻어 귀국한 후의 정형은 또 어떠했을까? 필자는 사료(史料)의 기재에 근거하여 현장이 귀국한 후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현장은 귀국 도중 장장 2년을 걸었다. 그가 20년 만에 조국에 돌아왔을 때는 마침 당나라 정관(貞觀)19년 정월 24일이었다. 당시 경성(京城, 역주: 지금의 서안) 서쪽 교외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몇 십 만의 승려와 속인들이 거기에 집중하여 북적거렸고 서역에서 경전을 가지고 돌아온 현장을 맞이하였다. 그 이튿날, 현장은 가지고 온 경서와 불상을 홍복사(弘福寺)에 바쳤다. 이때 태양 주위에는 채색 구름이 출현했고 불상에는 홍백색(紅白色)의 빛이 발사되어 나와 중생들의 찬탄이 끊이지 않았다. 현장의 귀국으로 경성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5일 동안 휴업했고 많은 사람들이 불문에 귀의(皈依)했다. 현장에 대한 성대한 환영은 가히 천고에 보기 드물 정도였다.

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올 때 당태종은 낙양에서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장은 낙양에 가서 당태종을 만나 가지고 온 진기(珍奇)한 보물들을 바쳤다. 두 사람은 궁궐에서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다 출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야 끝냈다. 당태종은 방현령에게 유시를 전달하여 사람을 파견해 현장을 보호하고 일체 비용을 지급하라고 전했다. 후에 현장이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자신과 함께 불경을 번역할 것을 요청하자 태종은 동의하였다. 이렇게 현장은 귀국한 후 적극적으로 불경을 번역하고 불법을 널리 전했다. 그는 중국 불교 역사상 4대 역경사(譯經師 역주: 경전을 번역한 스승이라는 의미)의 하나이다.

당태종이 적들을 토벌하고 경성으로 돌아온 후 현장은 글을 올려 태종에게 자신이 번역하는 불경에 서문을 써줄 것을 청했다. 현장은 “폐하의 지혜는 흰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 같고 위명(威名)은 백왕(百王)을 초월합니다. 저는 불법(佛法)은 무변(無邊)하다고 여기는데 신(神)의 사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의 도리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성스런 가르침은 현묘하고 아득하여 성인의 글이 아니면 서문을 쓸 자격이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폐하의 위엄을 건드림에도 불구하고 성스런 경전에 서문을 써주실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제왕의 말은 영향이 심원(深遠)하므로 더 이상 겸손해하지 마십시오.”

이리하여 태종은 현장의 여러 차례 요청에 의해 유명한《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를 썼다. 백관들이 들은 후에 앞을 다퉈 칭찬했다. 이때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다투어 경전을 읽어 불법이 전에 없이 널리 전파되었다.

나중에 현장은 당태종의 요구에 따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출판했다. 책에서 그가 직접 겪은 110개 국가와 전해들은 28개 국가의 풍속, 문화, 지리, 역사, 종교 등 각종 정황을 진실하고 생동하게 서술하였다. 글이 아름답고 우아하여 중국 고전 중에서도 명작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나중에 여러 국가의 문자로 번역되어 널리 전해졌다.

현장은 불문에 입문한 이래 자신이 죽은 후 미륵천으로 갈 것을 희망했다. 당 고종 인덕(麟德) 원년(664년)에 현장은 자신과 같이 번역하던 승려와 제자들에게 “내가 65세 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지금 누가 문제가 있다면 속히 물어보도로 하라.”고 말했다.

“연세가 아직 정정하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사람들이 놀라 물으니 현장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나 자신이 알고 있다.” 이에 또 불상 앞에 나아가 고별했다. 어떤 사람이 외출하려고 하면 현장은 그에게 “당신은 가시오. 나는 지금 당신과 고별합니다. 당신은 다시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아도 되며 온다고 해도 나를 볼 수 없을 것이오.”

정월 9일 현장이 시중드는 승려에게 말하기를 “나는 죽는다. 내가 죽은 후 내 시체를 절 근처 조용한 곳에다 안장하라.” 말을 마치고 누워서 눈을 감자 단지 큰 연꽃만이 보였다. 또 자신의 높고 큰 신상(身相)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곧 승천할 때가 되었음을 분명히 알았다. 현장은 시중 들던 문인들을 전부 불러 다시 한 번 뭇 승려들과 고별했다. 또 황제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자신은 미륵을 염불했다.

2월 4일이 되자 현장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워 적연부동(寂然不動)했다. 문인들이 그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자세입니까?” 현장은 “묻지 말라, 나의 정념을 방해한다.” 5일 밤중에 어떤 제자가 물었다. “당신은 반드시 미륵천으로 가실 수 있습니까?” 현장은 “그렇다. 반드시 될 수 있다!” 말을 마치자 현장은 호흡을 정지하였다. 현장이 죽은 두 달 후에도 시신은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현장은 처음에는 백록원(白鹿原)에 안장되었고 나중에 황제의 명에 의해 번천(樊川)에 묻었다. 이장하기 위해 현장의 시신을 땅에서 들어 올리니 현장의 안색이 마치 살아있을 때와 똑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감탄하면서 그가 확실히 비범한 도를 얻은 고승임을 깊이 느꼈다.

현장이 생사를 무릅쓰고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서역에 가서 불경을 얻어와 풍부하고 다채로운 신이 전한 아름다운 중국 문화에 한 획을 더했다. 그가 사람에게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은 중국 문명사에 휘황한 한 페이지를 남겼다.

발표시간:2006년 11월 22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6/11/22/410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