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심찰기 (3) : 동수와의 해후
작자:정련
【정견망 2008년 4월 9일】
늘 여행하듯이 도처에서 진상을 알리는데, 사부님의 한 수의 시를 회상한다.
<여래>
여의 진리를 지니고 와
소탈하게 온 천하를 거니네
법리를 세간도에 뿌려
중생을 가득 싣고 법선을 띄우네
여기에서 느낀 것은 : 당초 사부님께서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를 구도하셨고 우리를 데리고 법륜대법의 정법의 배에 오르게 하신 것이고, 오늘 우리는 신불(神佛)처럼 자아를 버리고 수신(修身)하여 성불하며 더욱 세인을 잘 구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는 길에 우연히 동수를 만나는데, 인자하고 선량한 아주머니도 있고 경험있고 중후한[稳重] 중년남자도 있으며 젊고 활발한 어린 대법제자도 있으며 역시 수려하고 시원한 언니도 있다. “나도 당신같다”는 회답을 들으면 마음에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두손으로 허스하며 인사한 후 우리는 또 각자 자기의 일을 하러 바쁘게 간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정념과 정진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 어제 또 한명의 동수를 해후했는데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최근에 소위 국내형세에 주의하며 더욱 진상을 하는데 편리하게 한다는 이유로 늘 인터넷에 연결하여 사이트들을 열람했다. 어떤 때는 심지어 한번 보면 몇 개를 보았다. 매일 인터넷을 보면서 소식을 보지 않으면 그날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매우 불편하다. 아무리 세 가지 일을 하고 책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집착심이 아닌가? 나로 하여금 걱정하며 내려놓지 않게 하는 것은 수련해버리지 못한 집착심이 아닌가?
나는 오히려 늘 세 가지 일을 한다는 이유로 자기를 위해 엄호하고 있다. 수련은 부단히 집착심을 버리는 과정이다. 내가 인터넷을 좋아하는 것, 소식을 보기 좋아하는 집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또 어떻게 바로 걸어가 사람을 구하고 정법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늘 진상을 말하는데 어떤 때는 환경이 갈수록 좋아짐을 느끼고 형세가 갈수록 좋아지며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대법을 인정하는 것을 느낀다. 기쁜 나머지 우리는 안전의 문제를 홀시하는 현상이 생기고 있지 않은가? 매일 네 차례의 발정념도 한다. 그러나 한밤의 그 한차례는 늘 잠이 들어버리며 그저 10분~20분 앉아서 발정념하지 않고 있다가 곧 누워서 잠이 들어버린다. 낮의 발정념 역시 사상이 깨끗하지 못하고 교란당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것은 응당 내가 경고하고 주의해야할 것이 아닌가?
나의 과시심을 말해보자. 명(名)을 구하는 이 한 마음도 나는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어떤 때는 스스로 주의하지 않고 표현한 것을 멈추지 않는다. 법리에 대한 깨달음이 다른 사람보다 좀 나은 것 같고 삼퇴를 권하는 것도 좀 많이 했으니 나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기분이 든다. 늘 진상을 하거나 대법의 법리와 정황을 소개할 때 자기가 속인보다 높다는 정서가 그 안에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득의양양해 한다. 매번 사이트에 글을 발표할 때 어떤 것은 가족들도 모르니 비록 무엇을 과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마음속에는 자못 득의만만하다. 각 방면에서 모두 나의 이름을 구하는 마음이나 과시심이 반영된다. 무엇을 하지 않을 때는 반영되어 나오지 않는다. 약간의 결과가 있을 때는 이 마음이 정말 뚜렷함을 느낀다.
내가 한 일체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인가? 그것은 더욱 법실증을 잘하고 정법하고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나의 능력은 대법이 부여한 것이며 나 역시 대법중의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 박대정심한 불법 앞에, 위대한 사부님 앞에 우리는 호한한 우주중의 한 알의 먼지일 뿐이다. 세 가지 일은 내가 해야할 일이며 천만 년 전의 서약과 역사의 필연적인 안배이다. 잘못했을 때면 나는 깊이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바로 이기적인 마음이 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후천의 나를 벗어날 수 없고 더욱 해야할 일체를 잘하지 못하게 된다.
동시에 동수의 집착심을 볼 때 나에게는 어떠한 심리가 나오는가? 원용하는 자비심인가? 아니면 방관자적인 질책심인가? 선의적으로 동수를 가지해주는가? 아니면 자신과 무관하다고 보는가? 이는 그중에서 씬씽과 층차를 높거나 낮다고 나누는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의 수련이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진정으로 안으로 찾고 안으로 수련하며 자기 내심 깊은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씬씽은 이 순정한 표준과 신불의 수준에서 많이 떨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수련해버려야 할 집착심이 아직도 많은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번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한다. 나는 “고생을 참고 정진하여 집착을 버리노라”(<<홍음>> <태산에 올라>)로서 더욱 세 가지 일을 잘할 것이다.
발표시간 : 2008년 4월 9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8/4/9/522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