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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天의 眞我를 수련하다

先天의 眞我를 수련하다

글/ 대경 대법제자 미립자(微粒子)

[정견망] 오늘 한 동수가 나에게 그들 지방의 일부 동수들은 어떻게 수련할 줄을 몰라 막막해 한다고 말했다. 또 어떤 동수는 십여 년을 수련했음에도 어떤 집착심은 제거하지 못했고 사상 잡념이 매우 많다고 한다. 또 어떤 동수는 형세가 긴장해지면 놀라서 집안에 숨어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동수는 舊勢力의 병마 교란으로 發正念을 해도 소용이 없고 병업 상태는 계속 개변되지 못했으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어찌하여 이러한가? 어떤 동수들은 왜 수련의 아름다운 정경을 보지 못했는가? 다른 동수들의 神의 상태가 그들 몸에서는 왜 체현되지 못하는가?

우리의 많은 동수들은 “7,20”에서 오늘날까지 이미 비바람 속에서 12년을 지났다. 이 12년의 비바람 속에서 우리 수련상태는 어떠한가? 아마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우리는 모순이 있으면 안으로 찾는다는 것을 다 잘 알고 있고 안으로 찾아 자신의 그 마음을 수련하고 철자하게 구세력의 안배와 고험을 부정한다. 그러나 어떤 동수들은 모순에 부딪히면 그의 출발점은 모두 먼저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익이 손실을 당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은 자신의 관념 혹은 견해를 수호한다.

또 다른 동수들이 말을 못하게 하고 말을 하기만 하면 곧 폭발한다. 사부님께서 “맨해튼 설법”에서 지적하신, “많은 신은 나의 귓전에 이야기한다. 당신들 대법제자에게 말을 할 수가 없다. 말을 하기만 하면 바로 폭발하는데, 말도 못하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이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이게 무슨 수련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등등등등이다.”

혹은 명백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로 “그는 맞고 그는 틀렸다”하고 논의하고. 배후에서 수구하지 않으며 함부로 말을 한다. 표면상에서는 세 가지 일을 하고 또 잘하고 있는데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 본성의 일면으로 법을 실증하지 못하고 “先天의 眞我”를 수련해내지 못한 것이다.

선천의 진아를 수련해낸다는 것은 법에서 성숙한 일종의 표현이다. 그것은 일종 행위에서 언어, 또 사상 염두도 모두 순정한 표현이며 법 중에서 성숙한 표현이다. 현재 밍후이왕과 정견망은 모두 “신이 인간 세상에 있다” 문장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법이 여기까지 온 현상이다. 대법제자들이 선천의 진아를 수련했을 때는 사람 표면상에서 볼 때 世間의 名利에 대한 추구가 없어지고 情에 대한 곤혹도 사라지며 모두 대법 법리로 엄격하게 자기를 요구한다. 다른 공간의 정경을 보지 못하지만 그러나 인간세상에서 표현되어 온 일부 사회현상과 천재인화(天災人禍)는 모두 법에서 답안을 찾을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의 제1강에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기에 앉아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이 손발을 움직여서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우주 각 공간의 진정한 이치를 보고, 우주의 진상을 볼 수 있으며, 속인이 보지 못하는 일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수련하여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닌가? 대각자(大覺者)가 아닌가? 속인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수련하여 깨달은 사람이 아닌가? 각자(覺者)라고 부름이 틀리는가?”

우리 많은 동수들은 정념이 아주 강할 때는 많은 좋지 못한 요소를 소멸하거나 제약할 수 있다. 사람들이 손발을 놀려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착실하게 수련하는 과정 중에서 부단히 안으로 찾음이 이미 기제로 형성돼 어떤 때는 각 공간의 이치를 볼 수 없지만 대법과 사부님에 대한 순진함은 정말로 많은 동수들이 감동해한다. 이는 신이 인간세상에서의 표현이다.

며칠 전 소형교류회에 참여했는데 교류회에서 여러 동수들은 하고 싶은 말을 탁 터놓고 했으며 모두 대법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찾았다. 절대 다수 동수들의 그런 순정한 내심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모두들 최대한도로 속인상태에 부합된 후 곧 세 가지 일 중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대법제자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했다.

나로 말하자면 이 12년의 비바람 속에서 사악에 납치당한 경험도 있었고 가정의 마난을 박차고 나온 간고함도 있었으며 자신의 집착에 직면해 후회, 자책, 통곡하며 자기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5-6년 전 내 최대의 집착심은 色心과 불평이 많은 嫉妬心이었는데 매일 나를 고험했다. 더욱이 그 불평이 가득한 질투심은 매일 나를 고험했다. 매번 고험이 올 때면 부친이 하는 일부 일에 대해 화가 났고 아내가 가정 마난을 설치한데 대해 불평이 많았다. 또는 동수들을 때리고 불구로 만들거나 죽인 경찰에 대해 원한이 생겼는데 어떤 때는 심지어 이를 갈 정도였다.

그런데 1초 혹은 몇 초가 지나면 즉각 이런 상태가 못마땅하게 여겨지고 대법제자는 이러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法正乾坤,邪惡全滅”를 외워 제거했다. 한동안 좋아졌고 이런 집착심이 적어졌다. 내 법공부가 진일보 깊어짐에 따라 색욕심도 갈수록 약해졌고 이전같이 쉽게 착오를 범하지 않았다. 원인을 추적해보니 그것은 평소 출근하거나 퇴근 시에 “論語”, “洪音” 등을 외운 까닭이다. 퇴근 후에는 곧바로 시간을 법공부에 투입했다. 생활을 유지하는 필수 시간외에 기타 시간은 곧 “세 가지 일”을 했다. 이렇게 해도 불평하는 마음과 색욕심은 깨끗하게 제거되지 못했다. 여기서 이런 집착심을 폭로해 이런 좋지 못한 요소와 생명을 철저히 깨끗하게 제거한다.

또 하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중생을 많이 구도하라고 하셔서 우리는 더욱 힘을 들여 진상을 알리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걷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언어 표현 능력이 강하다면 당신은 곧 대면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한다. 당신에게 컴퓨터 기술이 있다면 당신은 곧 자료를 만든다. 당신의 수련이 순정할수록 사상 잡념이 적고 정념은 강하면 당신은 근거리 발정념을 한다. 당연한 것은 우리 대법제자 대다수는 한 몸에 여러 가지 일들을 책임졌는데 곧 진상도 알리고 또 근거리 발정념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바삐 보내면서 정진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와 친척에게 진상을 말하고 또 농촌 혹은 좀 먼 곳에 가서 진상을 알린다.

현재 백성들은 미혹 속에 있다. 당신은 그들의 집착을 파악하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시시각각 법속에 용해됐을 때에야 당신의 심신은 즐겁고 아주 편안하다. 이때서야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를 감수할 수 있고 정법노정의 발걸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되면 어떻게 미혹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캐나다 법회 “축사”에서 말씀하셨다.
“견정(堅定)하게 최후의 길을 잘 걷도록 하라. 법공부를 잘하고 자신을 잘 수련한 기초 위에, 정념은 자연히 강해지기 마련이며,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반드시 잘 할 것이다. 사악이 끝장났고, 환경이 변했다고 해서 더욱 자신의 수련을 느슨히 하지 마라. 중생을 구도하는 신성한 사명 중에서 당신들의 위덕과 휘황함을 만들고 이루도록(鑄就)하라!”

최후에 도달할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긴박함을 느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천 백년에도 만나기 힘든 대법에 손상 없고 “정법시기 대법제자”, 이 우주 중 제일 칭호에 부끄럽지 않는 것이다. 이래야만이 우리에게 아주 큰 기대를 품고 있는, 우리 공간장 범위 내 중생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법에 용해되는 것이 많을수록 당신 本性 일면의 개변도 갈수록 커진다. 그런 좋지 못한 물질과 요소가 당신에 대해 압력을 줌이 곧 그렇게 크지 않게 된다. 이러하면 당신의 신의 일면도 자연적으로 표현되어 나온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법의 요구대로 할 수 있고 다시는 강제적인 요소, 혹은 구하는 마음, 집착심으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순정한 상태에서 또 그러한 “사악에 대한 두려움”과 자식정에 이끌리겠는가? 또 그런 일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이런 좋지 못한 마음이 일어날 때는 당신 몸에서의 강대한 에너지마당이 그를 맹아 상태에서 소멸할 것이다. 이런 상태는 곧 “금강백련(金剛百煉) 청순(淸純)함 나타내거니”(감개)의 상태인 것이다.

나는 늘 사부님의 “도 속에”의 시로 자신을 격려한다.


마음에 두지 아니하거니
세상과 다툴 것 없노라

보고도 보지 못한 듯하니
미혹되지 않노라

듣고도 듣지 못한 듯하니
마음이 어지럽지 않노라

먹고도 맛을 모르는 듯하니
입맛의 집착을 떼노라

하면서도 구하지 않거니
늘 도 속에 있노라

조용하나 생각하지 않나니
현묘함을 알 수 있노라

“도속에”의 이런 6가지 상태로 나는 늘 자신을 반성하고 내가 어떤 곳을 잘하지 못했는지 반성한다. 안으로 찾고 착실하게 세 가지 일을 잘하고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다. 무엇이 또 막연한 것이 있는가? 부동한 층차에서는 부동한 인식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말하는 이러한 것은 모두 나의 천박한 인식이므로 부족한 점이 있으면 동수들이 지적해주기 바란다.

발표시간 : 2011년 4월 19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4/19/736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