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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신전(濟公新傳)》을 본 소감

글/ 성광(聖光)

【정견망】

오늘 ‘씬탕런’에서 방영한 드라마 《제공신전(濟公新傳)》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간단히 적어본다.

1.

이수연(李修緣 역주: 제공 스님이 출가하기 전 속명)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한 승려가 우산을 들고 걸어온다. 수연이 승려와 우산을 나눠 쓰자면서 수련자는 자비로워야 하며 사람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편의를 봐달라고 한다. 하지만 승려는 오히려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된다면서 이번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교훈을 명심해서 앞으로는 주의하라고 한다. 이후 혼자 앞으로 걸어가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선기(仙氣)로 변화 사라진다.

이는 혜원(慧遠)대사가 이수연을 고험한 한 가지 작은 일화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담긴 뜻이 아주 깊다. 수연은 수련자가 남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것을 위난(危難)에 빠진 사람을 구도하는 행동이자 불가(佛家)의 자비심이라고 보고, 부처의 선(善)과 중생에 대한 자비로운 행동을 ‘사람을 제도’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불타의 말씀과 차이가 아주 먼 것이다. 불타가 사람을 제도함은 사람마음의 교화(敎化)를 중시하고 사람이 마음속에서부터 불법(佛法)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며 이를 통해 각종 고험과 간고한 수련을 거쳐 인생을 깨닫고 속세를 간파하며 사람을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극락의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불타의 자비는 절대 사람더러 얼마나 편안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수연의 이런 생각은 바로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불타의 자비와 아주 유사하다. 자신이 명리를 얻기를 바라고 자신이 잘 살기를 바라거나 심지어 자신이 남을 해치도록 도와달라고 부처님께 빈다. 부처(佛)란 이 장엄한 단어가 오히려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 없고 오직 부처님이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할 능력이 있음을 알고 부처님의 자비를 이렇게 대한다. 사람마음의 변이가 진실로 가련하고 비참할 정도에 이르렀다.

2.

혜원대사가 선기로 변해 사라진 후 비가 그치고 구름이 흩어지더니 즉각 날이 갠다. 수연이 막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 때 한 맹인승려가 길을 지나갔다. 장난기가 발동한 수연이 다가가서 놀리려다 승려에게 발각되어 손에 든 지팡이로 한 대 얻어맞는다.

수연은 맹인 승려가 등불을 든 것을 보고는 묻는다.

“당신은 빛을 보지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등불을 들고 있습니까?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해 비춰주려는 겁니까?”

그러자 맹인 승려가 말했다.

“비록 남을 비춰주기 위한 거라곤 하지만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한 거란다. 다른 사람이 나와 부딪치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이를 가리켜 ‘남에게 장미를 선물하면 손에 향기가 남는다’고 한단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일화를 들어보았을 텐데 확실히 그렇다. 진심으로 남을 위하려고 생각할 때 자신이 얻는 수확히 가장 크다. 다른 사람을 위하려는 일념(一念)은 이미 더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남이 당신이 감당한 것을 얻을 때면 아마 무의식중에 당신이 치른 감당을 보상해줄 것이다.

3.

수연이 영은사(靈隱寺)에서 여러 차례 사찰의 규범을 어기자 모두들 다 그를 징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연이 혜원 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칼을 들어 처분을 기다렸다. 혜원대사가 오히려 칼을 땅에 던지자 여러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대사가 말했다.

“덕으로 원수를 갚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징벌이다.”

여기서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이란 수련계의 한마디 말이자 전통문화의 미덕(美德)으로서, 덕으로 원수를 갚는 것이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일시적인 화를 참으면 단지 자신을 수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냉정하게 반성하게 만들어 남을 감화시킬 수 있다. 또는 아마도 남의 정신 경지를 승화시킬 수 있으니, 최대의 징벌이라기 보다는 더없이 큰 선(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불가의 말에 따르면 덕과 원한은 전세(前世)에 쌓은 것으로 덕은 선을 행해서 얻은 것이고 원한은 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얻는 것이다. 하지만 선악(善惡)에는 보응이 따르는 것으로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 속담에 “언제나 원한을 갚을 것인가”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원한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다음에 또 다시 갚아야 한다. 만약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전세의 원한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를 통해 선연(善緣)을 맺거나 또는 선덕(善德)을 쌓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렇게 여기지 않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사상이 주류를 차지한다. 자신이 무엇을 얻기 위해 걸핏하면 싸우거나 음모를 꾸미는데 사회에서 더는 믿음과 성실이 사라지게 했고 결과적으로 자신도 안전감이 사라지게 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곤경에 처했을 때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말이지만 그 진정한 함의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