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풍
【정견망】
송나라 때의 대문장가 구양수가 53세 되던 해에 《추성부(秋聲賦)》란 글을 지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구양(歐陽)선생이 막 밤중에 책을 읽고 있는데, 서남(西南)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오싹해져서 귀 기울이며 말하기를,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우수수하면서 바람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뛰어오르며 부딪치는 것이 마치 파도가 한밤중에 일어나고 비바람이 갑자기 몰려와 그것이 물건에 접촉하여 쨍그랑거리며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듯하며, 또 마치 적에게 다가가는 병사들이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데 호령은 들리지 않고 다만 사람과 말이 가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네가 나가서 살펴 보거라.”라고 하니 동자(童子)가 대답하기를, “별과 달은 밝고 깨끗하며 밝은 은하수가 하늘에 있는데,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아아! 슬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이다. 어찌하여 왔는가? 대개 가을의 형상이란 그 색깔은 참담(慘淡)하여 안개는 흩어지고 구름은 걷히며, 그 모습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이 높고 해가 맑으며, 그 기운은 싸늘하여 사람의 피부와 뼛속을 찌르며, 그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하다. 그러므로 그 소리의 성격은 처량하고 간절하며 울부짖듯 세차게 일어나, 많은 풀이 푸르고 성하게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가 울창하여 즐길 만하다가 풀은 이것이 스치면 색이 변하고 나무는 이것을 만나면 잎이 떨어지니, 시들고 떨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한 기운이 남긴 매서움이다.
가을은 형벌을 맡은 관리로 시절(時節)에 있어서는 음(陰)이 되고, 또 무기의 형상이라서 오행(五行)에 있어서는 금(金)이 되니, 이것을 천지(天地)의 의기(義氣)라고 하며 항상 매서움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는다. 하늘은 만물에 대하여 봄에는 키워 주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음악에 있어서는 상성(商聲)으로 서쪽의 음악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7월의 음률이 된다. 상(商)은 상심하는 것이니 만물이 늙어지면 슬프고 상심하는 것이며, 이(夷)는 죽이는 것이니 물건이 성할 때를 지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슬프다! 초목은 감정이 없어 때가 되면 날리어 떨어지지만, 사람은 동물이고 오직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온갖 근심이 그 마음을 느끼게 하고 수많은 일이 그 몸을 수고롭게 하여,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을 동요시킨다. 하물며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하고 자신의 지혜가 할 수 없는 바를 근심하는 경우이겠는가. 짙게 붉던 얼굴이 마른 나무처럼 되고, 까맣게 검던 머리가 허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찌하여 금석의 재질도 아닌데 초목과 더불어 무성함을 다투고자 하는가? 누가 이것에 대해 상하게 하고 해치는 가를 생각해보면 또한 어찌 가을 소리를 한탄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동자(童子)는 대답도 없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조는데, 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 소리만 찌륵찌륵하고 들려와, 나의 탄식을 돕는 듯하더라.】
최근에 인터넷에서 무심코 이 글을 보다가 마음속에 어떤 것이 건드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에 원문과 일부 관련 문장을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 필자는 이 글을 수련의 각도에서 한번 해독해보고 싶어졌다.
역대로 이 문장에 대한 설명은 일반적으로 구양수가 정치적으로 실각한 후 관료사회의 풍파와 고달픈 인생에 대해 가을을 모티브로 삼아 묘사한 것으로 본다. 사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 글은 구양수가 가을의 속성을 통해 수련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또 이런 각도에서 보지 않으면 이 문장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구양수 본인 역시 수련인이었고 또한 그 층차 역시 낮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문장을 읽을 때 마음을 조용히 하고 세밀하게 음미하면서 가능하면 구양수란 이 인물의 ‘배역’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이 문장을 쓸 때 듣고 보고 접촉하고 느낀 것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그런 후에 나는 진실로 “책을 백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떠오른다(書讀百遍其義自見)”는 말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백번을 읽는 과정 중에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글쓴이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만약 최후에 글쓴이의 사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럼 그 뜻이 저절로 떠오르는데 마치 물이 흐르다보면 자연히 도랑이 형성되는 것과 같다.
그럼 지금부터 이 글을 한번 감상해보자.
【구양(歐陽)선생이 막 밤중에 책을 읽고 있는데, 서남(西南)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오싹해져서 귀 기울이며 말하기를,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우수수하면서 바람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뛰어오르며 부딪치는 것이 마치 파도가 한밤중에 일어나고 비바람이 갑자기 몰려와 그것이 물건에 접촉하여 쨍그랑거리며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듯하며, 또 마치 적에게 다가가는 병사들이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데 호령은 들리지 않고 다만 사람과 말이 가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네가 나가서 살펴 보거라.”라고 하니 동자(童子)가 대답하기를, “별과 달은 밝고 깨끗하며 밝은 은하수가 하늘에 있는데,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라고 하였다.】
이 단락에서 글쓴이의 생생한 이미지 표현만 중시하다보면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놓치게 되는데 그것은 왜 구양수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동자는 듣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인의 이치에 따르자면 이 글을 쓸 때 구양수의 나이는 이미 반백이 넘어 청력 등 여러 방면이 모두 쇠퇴할 때였고 동자는 아직 어려서 감각이 아주 민감할 때다.
사실 그가 책을 읽고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입정(入定)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앞에 내려놓은 책은 단지 모양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각종 감각이 모두 아주 예민해지기 때문에 가을하늘에서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남(西南)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아주 정확하게 방위를 말하는 것이 이를 더욱 잘 설명한다. 하지만 동자는 어려서 안정된 상태가 아니고 게다가 수련인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그 어떤 것이든 다른 공간에서는 다 생명으로 체현될 수 있으며 춘하추동(春夏秋冬) 역시 생명이다. 무형(無形)의 생명이지만 때로는 구체적인 사람의 형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가령 중경(重慶) 장강(長江)대교 양쪽에 춘하추동 네 사람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는 순전히 공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평소 누가 무엇의 화신(化身)이란 말을 하는데 가령 어떤 사람은 정의의 화신이고 어떤 사람은 악의 화신이라는 등이다. 이 말이 지금 상황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고 또 구체적으로 비교하자면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저 이런 뜻만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구양수는 이곳에서 사람의 형상(人形)으로 변한 가을을 본 것이다.
바로 이 가을이 올 때 소리가 난 것인데 이 소리는 구양수가 묘사한 것처럼 그렇다. 사실 평소 사람이 길을 걸을 때도 바람소리가 나지만 단지 일반적으로 주의하지 않을 따름이다.
다음 단락을 보자.
【대개 가을의 형상이란 그 색깔은 참담(慘淡)하여 안개는 흩어지고 구름은 걷히며, 그 모습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이 높고 해가 맑으며, 그 기운은 싸늘하여 사람의 피부와 뼛속을 찌르며, 그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하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이 확실하게 느낀 가을이란 이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이는 속인들이 말하는 그런 감각이 아니다. 이 단락은 뒤에 나오는 가을의 역할과 오행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 및 다른 사물과의 대응관계를 분명히 해준다.
사실 우주에는 성주괴멸(成住壞滅)이 존재하며 매 단계 속에는 또 무수히 많은 작은 성주괴멸이 존재한다. 작은 성주괴멸 속에는 또 보다 작은 성주괴멸이 있는데 한 층 한 층 아래로 내려가서 사람이란 이 가장 낮은 층차에서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바로 하나의 대응이 된다.
【많은 풀이 푸르고 성하게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가 울창하여 즐길 만하다가 풀은 이것이 스치면 색이 변하고 나무는 이것을 만나면 잎이 떨어지니, 시들고 떨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한 기운이 남긴 매서움이다.】
여기서 풀과 나무는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성장하며 가을에 시들고 겨울에 죽는다. 이는 성주괴멸과 대응하며 매 단계에서 또 춘하추동과 관련되는데 가을은 이중에서 숙살(肅殺)의 계절이다. 가을의 작용과 역할이 바로 이와 같아서 마치 주방장이 요리를 하고 의사가 병을 보는 것처럼 그는 오행 중에서 다른 사물과 대응하는 것이다.
【가을은 형벌을 맡은 관리로 시절(時節)에 있어서는 음(陰)이 되고, 또 무기의 형상이라서 오행(五行)에 있어서는 금(金)이 되니, 이것을 천지(天地)의 의기(義氣)라고 하며 항상 매서움을 가지고 마음으로 삼는다. 하늘은 만물에 대하여 봄에는 키워 주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음악에 있어서는 상성(商聲)으로 서쪽의 음악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7월의 음률이 된다. 상(商)은 상심하는 것이니 만물이 늙어지면 슬프고 상심하는 것이며, 이(夷)는 죽이는 것이니 물건이 성할 때를 지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글쓴이가 아주 확실하게 본 것으로 단순히 오행(五行)학설을 부연 설명한 것이 아니다.
오행학설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아주 허황해 보이지만 사실 아주 높은 층의 공간에서 보면 아주 분명히 그런 것이다. 마치 하나의 ‘극본’과 같은데 이 ‘극본’ 자체도 생명이며 또한 법(法)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그는 우주 평형과 안정적인 운행을 유지하는 것으로 바로 신이 이런 배치를 했다.
오행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 경험의 총괄이 아니다. 수련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볼 수 있다. 물론 층차가 다르면 보는 것 역시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오직 아주 작은 일부만을 볼 수 있고 어떤 이는 좀 더 많이 볼 수 있는데 층차가 높아질수록 보는 것이 더욱 뚜렷하고 전면적이다.
사실은 일반인도 이를 일부 느낄 수 있다. 가령 수극화(水克火)나 금극목(金克木) 등을 말하면 누구나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속인의 층차에서 감수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며 구양수의 층차는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다.
【슬프다! 초목은 감정이 없어 때가 되면 날리어 떨어지지만, 사람은 동물이고 오직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온갖 근심이 그 마음을 느끼게 하고 수많은 일이 그 몸을 수고롭게 하여,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을 동요시킨다. 하물며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하고 자신의 지혜가 할 수 없는 바를 근심하는 경우이겠는가.】
이 단락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자세히 음미해보면 마치 노자가 말한 “오색(五色)이 사람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이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오미(五味)가 사람의 입을 썩게 하며, 사냥하면서 뛰어다니면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의 행실을 어지럽힌다.”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보인다.
이는 구양수의 수련 층차를 더욱 설명해주는데 그는 가을의 숙살에서 수련에 대한 깨달음을 이끌어냈다. 다시 말해 “짙게 붉던 얼굴이 마른 나무처럼 되고, 까맣게 검던 머리가 허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모두 자신의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집착으로 조성된 것으로 남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어찌하여 금석의 재질도 아닌데 초목과 더불어 무성함을 다투고자 하는가? 누가 이것에 대해 상하게 하고 해치는 가를 생각해보면 또한 어찌 가을 소리를 한탄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명리정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수련인의 수심단욕(修心斷慾)과 아주 가깝다. 물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해내기란 어렵다.
노자는 “내 말은 참으로 알기도 쉽고, 실천하기도 쉬운데, 천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실천도 못한다. 말에는 요지가 있고, 일에도 핵심이 있다. 무릇 요지도 핵심도 모르니까, 나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아는 이가 드무니, 내가 귀해진다.”고 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어부와 황금물고기 이야기에서 어부의 아내는 만족을 모르고 늘 새로운 요구를 내건다. 할머니는 이런 끝없는 탐욕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전처럼 가난해졌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아주 의미심장한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부의 아내와 같은가?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들 하는데 정말로 그렇다. 어부의 아내가 맞은 결말은 그래도 좋은 편인데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낫다.
글의 마지막은 첫 단락과 대응되는데 동자가 아무 말도 못하고 망연한 것은 저자의 수련층차를 더욱 부각시켜준다.
흔히들 이 문장의 기조가 너무 슬퍼서 진취적인 기상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사실 슬픈 가을(悲秋)은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체현한 일종이다. 왜냐하면 슬픔이 오행 중 금(金 가을)에 속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껏 가을에 관한 수많은 글들을 읽어봤지만 그 글이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워도 모두 속인 한 층차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에 가을을 묘사한 문장 중에서 이 글의 층차가 극히 높은데 그 원인은 저자가 서 있는 각도가 속인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토록 오랫동안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73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