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중강(金中鋼)
【정견망】
한산자(寒山子)는 당대(唐代) 정관(貞觀) 연대의 고승으로 성이며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천태산 바위굴에서 은거했으며 나무 껍질로 관(冠)을 만들고 다 떨어진 옷이며 신을 신었다. 혹 장랑(長廊)에서 시를 읊거나 혹 마을에서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대나무와 나무 돌과 벽에 시를 쓰거나 시골마을 벽에 3백여 수의 시를 남겼다.
어떤 사람이 그가 쓴 시와 게(揭)를 수집해 3백여 수를 얻어 책으로 엮었다. 조산(曹山) 본적(本寂)선사가 주해를 달아 《한산자시(寒山子詩)》라 이름을 지었다. 그의 시는 통속적이고 활달하고 매끄러워 대부분 불가의 이치로 인생의 진리를 설파했다. 생사를 초월한 소탈한 시어로 널리 유전되었다.
그는 시와 게를 읊조리길 좋아했고 장기간 태주(台州) 시풍(始豐 지금의 절강 천태) 서쪽의 한암(寒岩 즉 한산)에 은거했기 때문에 호를 한산자(寒山子)라 했다. 한산자는 국청사의 풍간이나 습득과 사귀며 교류했다. 지금 사람 여희석(余嘉錫)의 고증에 따르면 당 현종(玄宗) 선천(先天)연간인 712년부터 한산자에 관한 행적이 있고 사망한 해는 덕종(德宗) 정원(貞元) 9년인 793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대략 백 살 넘게 장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욕을 하는데
분명히 확실히 알고 있으라 하네
내 비록 응답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네
有人來罵我,分明了了知
雖然不應對,卻是得便宜
여기에 담긴 도리와 전통문화 속의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음”에 비춰보면 그 사상경계의 내함이 더욱 깊고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어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은 한 사람의 참을성과 함양(涵養)을 체현한 것이다. 한산자는 수련인으로서 욕을 먹는 것이 오히려 편안하며 욕을 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그의 몸에 덕을 던져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덕이란 공(功)이 자라는 관건이니 수련인이 구하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편안함을 마땅히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68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