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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경림》 통독: 석도귀신(釋道鬼神) (5)

자궁(紫穹)

【정견망】

【원문】

원적이니 다비는 치류(淄流 승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고
선유니 시해는 우사(羽士 도사)의 사망을 애도하는 것이다.
여자 도사는 무(巫) 남자 도사는 격(覡)라 해서 예전부터 구별이 있었고
남자 승려는 승(僧) 여자 승려는 니(尼)라 해서 종래로 구별이 있었다.
우객(羽客)과 황관(黃冠)은 모두 도사를 가리키고
상인(上人)과 비구는 모두 승려에 대한 존칭이다.

曰圓寂,曰荼毗,悲淄流之已故;
曰仙遊,曰屍解,悼羽士之雲亡。
女巫男覡,自古攸分;
男僧女尼,從來有別。
羽客黃冠,皆稱道士;
上人比丘,並美僧人。

【주석】

(1) 원적(圓寂): 불가 용어로 승려나 비구의 죽음을 말한다.

(2) 다비(荼毗): 산스크리트 어 투피(tú pí)를 중국어로 음역한 것. 불가 용어로 화장을 뜻한다. 불교에서 비구나 비구니가 사망한 후 시신을 화장하는 것을 ‘다비’라 한다.

(3) 치류(淄流):승려. 치(淄 zī)는 원래 검은 색을 뜻하는 치(緇)와 같다. 승려들이 주로 검은 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치류는 승려를 가리킨다.

(4) 시해(屍解): 도가의 용어. 주로 고대 수도자가 도를 얻어 신선이 된 것을 가리킨다. 대개는 신발이나 검, 옷이나 죽장 등의 물건을 자신의 육신 형상으로 만들어 대신 관에 넣고 매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의 인연을 해결하고 사람들에게 죽었다고 믿게 만들어 친지들이 더는 그를 찾지 않게 한다.

(5) 무(巫)와 격(覡): 고대에는 여자 무당을 무(巫)라 하고 남자 무당을 격(覡)이라 했다. 《설문해자》에서는 “재계하고 엄숙하게 신명을 모실 수 있는 자를 남자는 격 여자는 무라 한다.(能齋肅事神明者,在男曰覡,在女曰巫)”고 했다. 고대에는 이들이 신령(神靈)과 통해 점치고 기도하거나 심지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正)과 사(邪)를 구별하기 어렵다.

(6) 유분(攸分): 구별이 있다는 의미.

(7) 우객(羽客):도사는 하늘을 날아 신선이 될 수 있기에 날개가 달린 사람이란 뜻에서 ‘우객’ 또는 ‘우인(羽人)’이라 불렀다. 또 다른 설명에서는 남당(南唐)의 도사 담초(譚峭)에게 당왕(唐王)이 ‘금문우객(金門羽客)’이란 칭호를 하사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8) 황관(黃冠): 도사들이 쓰는 머리를 묶는 관을 말한다. 금속 또는 나무로 만드는데 색깔이 주로 노란색이라 황관이라 한다. 나중에 도사의 별칭이 되었다. 당대(唐代) 이순풍(李淳風)의 부친이 도사로 있을 때 호가 ‘황관자(黃冠子)’였다.

(9) 상인(上人): 불교에서 지혜와 덕행이 높아서 여러 승려들의 스승이 되는 고승(高僧)을 말한다. 남조(南朝) 이후에는 대개 일반 승려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다.

(10) 비구(比丘):불가 용어로 집에서 수행하는 남자 승려를 화상(和尙)이라 한다. 불교 전장(典章)에 따르면 어려서 출가해 처음 수계를 받으면 사미(沙彌)라 부르고 20세가 되어 다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정식 비구가 될 수 있다.

【평가】

이곳에 나오는 도가와 불가 용어는 고서나 시사(詩詞)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령 이백의 왕우군(王右軍 왕희지)이란 시를 보면 “산음에서 우객을 만났는데 거위를 좋아하는 이 손님을 좋아했다네(山陰過羽客,愛此好鵝賓)”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우객이란 바로 도사를 가리킨다. 왕희지는 거위를 좋아했기 때문에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은 왕희지를 가리킨다. 즉 산음의 도사가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했다는 뜻이다.

무당에 대해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속인의 육안으로 진짜와 가짜, 정과 사를 구별하기는 어려우니 접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마치 《서유기》에서 묘사한 것처럼 신불(神佛)이 존재하면 반드시 요마귀괴(妖魔鬼怪)도 있다. 지금 소위 초상적인 능력을 지닌 무당들은 상당수 사령(邪靈)이나 귀괴(鬼怪)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무사(巫師)가 저령(低靈)과 소통한다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작지 않다. 속담에 “신(神)을 청하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어렵다”는 말은 대체로 이런 ‘저령의 귀괴(鬼怪)’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공자에 쉽게 말하려 하지 않았던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이런 것들이다. 이들이 불러오는 것은 흔히 사람에게 자비한 정신(正神)이 아니다. 재물을 뜯어내거나 사람 몸에 달라붙어 사람의 것을 훔치려는 것들이 다수인데 일반인의 눈으로는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어렵다.

옛말에 “신의 눈은 번개와 같고 선과 악에는 보응이 따른다(神目如電,善惡有報)”고 했다. 사람 마음에 정기(正氣)가 존재하고 덕행(德行)을 중시하며 신불(神佛)을 공경하고 마음에 선념(善念)을 품기만 하면 신불이 스스로 알고 조용히 보우해주어 절로 편안해진다.

여기서 한 가지 특별히 언급할 것은 지금 신불을 비방하고 적대시하는 가장 큰 조직이 바로 중공(中共)이다. 그것을 창시한 마르크스 자체가 서방 사탄교 신도였다. 때문에 그것은 가장 큰 악마가 되었으니 이으 무당이 미칠 바가 전혀 아니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이 세계 최대 사령조직에 가입했음에도 모르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것이다. 중공 관련 조직에서 탈퇴하지 않으면 곧 마귀의 멤버가 되어 머지않아 신불이 소멸할 대상이 될 수 있다.

시해(尸解)로 신선이 된 일화

고대 도가 수도자 중 일부는 ‘시해’의 방법을 사용해 세상을 떠나 도를 얻고 신선이 되었다. 이에 대해 여러분 모두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당나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연간(847-860년) 말기에 유조청(柳條青)이란 이인(異人)이 있었다. 그는 소주(蘇州)에서 구걸하곤 했으며 죽장(竹杖)을 두드리면서 혼자 춤추며 노래했다. 어느 날 대설이 내린 후 그는 땅에 쓰러져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얼어 죽었다고 생각해 장례 지내주었다. 하장한지 얼마 안 되어 그 분묘에 5,6척 높이의 자색 기운이 솟아오르자 사람들은 신기하다고 느꼈다. 1년 후 묘를 열어보니 관 속에는 시신이 오간데 없고 죽장 하나만 들어 있었다.

북송(北宋)의 수도 변량(汴梁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에 정(鄭)씨 성을 가진 도인이 있었다. 그는 늘 동으로 만든 방울(요령)을 흔들며 탁발했고 이렇게 시주한 물건 중에서 자신이 먹을 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정요령(鄭搖鈴 정씨 성을 가진 방울 도사란 의미)’이라 불렀다.

그러다 북송 휘종 선화(宣和) 말년에 갑자기 변량을 떠나 양주(揚州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로 내려갔다. 선화(宣和)란 송나라 휘종의 6가지 연호 중 마지막 연호로 1119-1125년을 말한다.

양주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요령을 흔들며 탁발을 했다. 변량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이면 여관을 빌려 거주했다. 이렇게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정요령이 갑자기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내가 곧 세상을 떠나려 하니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얇은 관을 하나 구해 내 몸과 내가 지닌 의복, 물건 등을 같이 넣어 화장해 주셨으면 합니다.”

과연 그가 말한 시간이 되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여관 주인은 그의 당부대로 시신과 그의 유품들을 관 속에 넣고 관을 메고 성 밖 화장터로 향했다. 관을 들고 나갈 때 갑자기 요령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정요령이 살아있을 때 내던 소리와 꼭 같았다. 요령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 잠시 후에는 수십 보 밖에서 들렸다. 소리가 점점 더 멀어졌는데, 관을 든 사람은 요령소리가 멀어짐에 따라 관이 갈수록 가벼워졌고 나중에는 마치 빈 관처럼 가벼웠다. 화장터에 도착해 관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대나무 지팡이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정요령이 득도한 사람이며 시해의 방법으로 신선이 되어 떠났음을 알았다.

이상 두 가지 사례에서 죽장을 두들기면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동냥하거나 또는 요령을 흔들며 탁발한 목적은 모두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그들에게 기억하게 하고 나중에 공개적인 방식으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는 시해의 방식으로 직접 유체가 물건으로 변한 신적(神跡)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 목적이 있는 것으로 수도자가 신(神)으로 성취한 사적을 널리 유전시켜 신선의 존재에 대해 백성들이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게 한 것이다.

사실 시해로 신선이 되는 방식은 단지 도가뿐 아니라 불가에도 있었다. 가령 앞서 언급한 달마 역시 이렇게 사후에 매장했지만 나중에 북위(北魏)의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에서 돌아오던 길에 총령에서 달마를 만났는데 손에 신발 한 짝만 들고 혼자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송운이 어디로 가는지 묻자 달마는 돌아간다고 하면서 황제가 이미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송운은 경성에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진상을 안다. 황제가 이를 알고는 놀라 관을 열어 보니 과연 안에는 신발 한 짝만 들어 있었다. 달마는 일부러 송운에게 자신을 보여 준 것으로 그 목적은 민중들과 황제에게 신적을 펼쳐내 수련문화를 남기려 했던 것이다.

(이상의 일화들은 모두 정견망에서 인용)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4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