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源馨)
【정견망】
해변에서 한 젊은이가 버려진 낡은 선박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이 선박을 고치고 수선해서 날마다 노래를 부르며 바다에 나갔다. 설령 빈 그물로 돌아올지라도 배에서 내려 모래사장에 누우면 석양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는데 날마다 아주 즐거웠다.
한편 모래사장 맞은편에는 해변가 별장에 사는 생선장수가 있었는데 날마다 일찍 가게에 나와 늦어서야 들어갔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날마다 얼마를 벌었는지 계산하느라 분주해 하루 종일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수시로 바다상태와 날씨를 걱정했고 또 고기값이 등락하는 것을 걱정하느라 온종일 심정이 무거웠다.
그는 젊은 어부가 이렇게 날마다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많은 물고기가 있어도 즐겁지 않은데 저 친구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아도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그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 생선장수는 어부의 작은 배 안에 금덩이를 하나 넣어두었다.
태양이 산으로 질 때 작은 배에 올라 탄 어부는 첫눈에 이 금을 발견했다. 뜻밖의 횡재에 기쁜 나머지 손으로 이 금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속으로 이것으로 어떻게 배를 수리하고 나중에 큰 배로 바꿀까 하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폈다. 이렇게 그는 날마다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았다. 나중에는 더 큰 배를 사고 어부들을 고용해 그들에게 고기를 잡도록 시켰다. 이렇게 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해변에서 가장 큰 생선가게를 가진 사장이 되었다. 또 생선가격을 멋대로 통제해 해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어부는 금을 얻어 밤새 상상의 나래를 펴던 바로 그 날부터 노래를 잊어버렸다. 밖에서 줄곧 그를 관찰하던 생선장수는 어부가 더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된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어부에게 번뇌가 생겼고 더는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헌 배를 팔고 또 금을 사용해 높은 이자를 주고 더 큰 돈을 빌려 큰 배를 한 척 샀다. 많은 금전적인 빚을 지자 날마다 압력을 느끼며 살아가야 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부 역시 생선장수가 되었고 해변 별장에 살았다. 돈 계산에 바빠 하루 종일 근심하며 인상을 썼는데 날마다 바다를 바라보며 날씨를 걱정했고 또 생선가격의 등락을 걱정했다. 그는 너무 근심이 많아져 내심으로 더는 한순간도 편안하지 않았고 또 단 한순간도 즐겁지 않았다.
어느 날 용권풍(龍卷風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그의 몇 척 어선을 좌초시키자 그는 심한 손해를 보았다. 어부의 마음은 온통 엉망이 되었고 얼굴도 타들어갔다. 해변 모래사장을 천천히 걷는데 모래사장에서 즐겁게 노래부르는 한 떠돌이를 만났다. 그의 모습은 과거 아무런 근심 없이 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자신도 모르게 떠돌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즐거운가?”
떠돌이가 말했다.
“어찌하여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합니까? 내게는 모래사장도 있고 햇빛도 있고 건강도 있고 먹고 입는 데 걱정도 없는걸요.”
이 순간 그는 즐거운 떠돌이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본래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금(金)이 그의 즐거움을 앗아간 것이다. 그 금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쉽고 또 이렇게 철저하게 본래의 순수함을 잃고 즐거움을 잃게 하고 내심의 평온을 잃게 만드는가!
이 이야기에서 나는 “남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만 못하다(授人以魚,不如授人以漁)”는 속담을 떠올렸다. 흔히 이 속담은 어떤 사람에게 한 마리 물고기를 주어 하루를 살게 하는 것보다는 물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줘 평생을 살 수 있게 하는 게 낫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물고기(魚)는 물질(物質)을 주는 것이고, 물고기 잡이(漁)는 생활이나 어떤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로 본 것이다. 그러나 물질과 기술이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 기술은 결국 물질을 얻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진정으로 사람을 충만하게 하진 못한다. 반대로 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초월한 외재적인 것은 내심의 소탈함과 큰 자유를 빼앗아간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물질생활은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원래 존재했던 내심의 순박함과 즐거움과는 오히려 점점 멀어졌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보아만 이 속담 뒤에 감춰진 옛사람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물고기를 뜻하는 어(魚 yú)는 원래 욕(慾 yú)과 발음이 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물고기’는 사실 ‘욕망’을 가리킨다. 또 ‘고기잡이(漁)’에서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이 필요하다. 즉 이 단어는 ‘법망(法網)’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악을 처벌하며 불필요한 사람마음의 욕망을 제거하는데 사용된 법망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마음이 외사(外邪)에 유혹당하면 마음의 바다에 끝없는 욕망이 날뛰게 되어, 결국 생명이란 이 작은 배가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거나 혹은 위험이 잠복되어 있는데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정한 즐거움이란 물질적 부(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게 아니라 내심의 경지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에게 물욕을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야만 본래의 진실하고 순정(純淨)한 내심을 얻을 수 있고 진정으로 자유자재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개인 능력에 의지해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이는 아주 어렵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명백하다 해도 스스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위아래로 찾고 있는데, 내심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바로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도(道)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 평범하고 일상적인 도)가 아니다.”
여러분이 이 어지러운 속세에서 절대 진법(真法)대도(大道)를 스쳐지나가지 말아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