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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관념을 타파해 오이디푸스 신화를 해독

영정(詠廷)

【정견망】

나는 수년 전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얻어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로 들어섰다. 법 공부가 깊지 못해 내가 배우며 일하는 가운데 접촉했던 서방의 일부 문예 작품들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대부분 애정 소설과 시에 불과하며 신(神)을 찬양하는 작품은 거의 없으며 일부 신화와 전설도 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속인 영웅을 찬양한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정법(正法)이 추진됨에 따라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끊임없이 알려주셨고, 《9평공산당》, 《공산주의 유령은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가?》 등의 일련의 문장이 발표되었으며, 정견망과 대기원 사이트에 신전문화(神傳文化)에 관한 글들이 많이 게재되었다. 특히 사부님께서 중생들에게 하사하신 션윈(神韻)공연은 나로 하여금 당 문화와 변이 관념을 끊임없이 제거해 서방 문학작품에 드러난 신전문화(神傳文化)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생기게 했다.

이에 나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동수들에게 참고 자료로 제공해 구세력 사악한 요소의 간섭에서 벗어나 현대 관념의 독해를 제거하기를 희망한다. 개인의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깨달음에 분명 부당한 점이 있을 것이다. 동수들이 부디 법을 스승으로 삼기 바란다.

현대인들은 아마 거의 모두 프로이드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아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들의 내면에 잠재된 본성이며 이는 선천적이라고 보는데 단지 후천적인 인류 사회의 규범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뿐이라 여긴다. 사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큰 죄였고, 인륜을 어지럽힌 것은 큰 죄였다.

현대인들이 왜 그런지 이유를 묻는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마 신(神)이 정하신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인다는 생각을 비정상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자연(自然)’의 적이라고 여겼다. ‘자연’은 신(神)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은 신(神)의 의지에 부합해야만 자연에 부합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무지(無知)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는데, 그의 운명은 신이 배치한 것이었지만 오이디푸스 불행의 근원은 무지와 죄업(罪業)이었다.

우리 먼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첫 장면을 살펴보자.

약 15년 전 오이디푸스가 청년일 때, 테바이 신전에서 자신이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코린토스의 폴리보스 왕과 왕비가 자신의 친부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는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테바이로 가는 길을 갔다. 이곳은 바로 그를 낳아준 친부모가 다스리던 나라였다.

길을 가던 도중에 그는 마차를 탄 노인(라이오스)과 길을 다투다 시비 끝에 노인과 수행원들을 죽였다. 그가 테바이 성에 도착해서 보니, 왕인 라이오스가 무슨 이유인지 외출했다 돌아오지 않았고, 성 밖에는 한 여자 요괴(스핑크스)가 수수께끼로 테바이 주민들을 가로막고 행인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사람을 죽였다.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의 답을 맞히자 요괴는 스스로 투신하여 죽었다.

이에 테바이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새로운 왕으로 맞이하고 왕비였던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했다. 테바이 사람들은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의 생모인 줄 몰랐고, 또 라이오스 부부가 일찍이 자신들이 낳은 아들(오이디푸스)를 죽이려 한 것도 몰랐다(그들이 신탁에서 자신들의 아들이 태어나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15년 후에 신(神)이 테바이에 역병(疫病 돌림병)을 내리니, 성 안의 사제와 장로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오이디푸스 왕을 찾아가 신이 재앙을 내린 원인을 규명해 다시 테바이를 구원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 다음 단락은, 오이디푸스 왕이 온갖 단서를 추적하며 성실하고 용감하게 마침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자신의 생부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줄거리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맹목적인 무지를 발견하자 고통 속에서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하고 처남인 크레온에게 권력을 넘기고 자신을 추방시킨다.

이 연극에서 부각시키고자 한 것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이디푸스가 범죄를 저지른 뒤 어떻게 자기 부모에 대한 진상을 찾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연극은 여전히 영웅(英雄)의 미덕(美德)을 보여주는데, 즉 자신을 겨냥한 온갖 불길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성실하고 용감하게 직면하고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영웅의 미덕과 빛을 보여준다. 영웅이 저지른 잘못은 관객들의 해석에 남겨 두었다.

서방(西方)의 전통적인 해석은 신(神)이 사람의 운명을 배치했기에 일반인이 운명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런 노력 때문에 신탁이 현실이 되도록 정해진 목표를 향해 운명을 더 추동시킬 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신을 경외(敬畏)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어로 ‘경외’에 담긴 뜻은 사람이 신(神)의 성결함과 위대함에 직면해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의 수치스런 망념(妄念)을 억제하고 신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몇천 년 간 사람들은 점점 더 신의 말씀[神言]을 읽어내지 못하게 되었고, 고난의 결말을 피하기 위해 집착하고, 고난의 불공평함을 불평하는 데 집착하고, 고난을 조성한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의 근원을 운명의 신의 무정함에 돌리며, 점차 원망이 커지게 했다. 심지어 신의 경고를 저버리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을 소위 자연적인 본성 탓으로 돌려 신을 반대하고 자신을 해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들은 정통 문화에 담긴 내함을 읽어낼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다 신의 배치이며 신의 공정함과 자비를 드러낸다. 오이디푸스가 무지 속에서 죄를 저지른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째 신을 배척하려는 그의 사상, 그가 전생에 쌓은 죄업(罪業), 그의 조상의 죄업 특히 아버지인 라이오스의 죄업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원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1. 신을 배척

이상 배경 이야기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들은 후 두려움에 떨면서 첫 번째 한 생각은 즉시 코린토스를 멀리 떠나 신탁을 무위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이는 신(神)과 싸우고 신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죄를 지을까 두려워했는데 이는 속인의 감정적인 반응에는 부합하지만, 그의 이 두려움(즉, 그의 정신 상태)은 영웅에 대한 신의 요구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은 보통 신들의 직계 자손 즉 반신(半神)으로 사실 수련인(修煉人)이다.

신이 그들에게 설정한 인생의 목표는 그들이 자신의 신체 및 정신적인 오염(오염은 고대 그리스 용어로 영혼의 죄를 씻고 정화하는 것과 대응한다)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정화시켜(그리스 종교에서 ‘죄를 씻는 의례’는 후대에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수련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이 전해준 수련 방식인데 아마도 역사적으로 실전되거나 비밀리에 전해졌을 것이다) 지극히 순수하고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를 정의(正義)의 상태라고도 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다른 공간에서 정의로운 영혼의 확대판인 정의로운 도시라고 표현했다.]

낮은 층차에서 오염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면 영웅은 보다 높은 경지의 두려움, 즉 신(神)에 대한 진정한 경외를 얻게 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신에 대한 두려움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이디푸스가 만약 신에 대해 진정한 두려움이 있었더라면 그런 신탁을 듣는 즉시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칠 기회를 달라고 신께 빌었어야 한다. 속인의 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수련인의 운명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신탁이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뉘우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은 신의 말씀 앞에서 사람은 신(神)을 진정으로 경외해야 하며 오만과 망상을 버리고 진심으로 신께 구하고 죄를 뉘우쳐야 한다. 이것이 정면(正面)적인 교훈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신(神)과 싸운 결과 도덕이 떨어지고 절제(節制)를 상실했고 그 후 오이디푸스가 행인(친부)과 다투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바로 신을 배척해서 초래한 비참한 결과였다.

2. 전생의 죄업

오이디푸스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큰 죄를 저지르도록 태어난 원인 중 하나는 그가 전세(前世)에 쌓은 죄업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에 입성하기 전, 여자 요괴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는 사실 오이디푸스의 전생(前生)전세(前世)가 지나간 날만큼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사실 뮤즈 여신에게서 배운 것이다.

“아침에는 다리가 넷이고, 낮에는 다리가 둘이며, 황혼에 다리가 셋으로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독 이 창조물만이 다른 수의 다리로 걸어 다닌다. 다리가 가장 많을 때는 바로 힘과 속도가 가장 작을 때다.”

오이디푸스는 쉽사리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러나 아침, 낮, 황혼이 비유하는 인생에서 오이디푸스는 그 속에 암시된 윤회전세(輪回轉世)를 이해하진 못했다. 만약 사람의 일생이 하루처럼 짧다면, 그럼 생명의 윤회전생, 전세와 내생 역시 어제와 내일처럼 아주 많을 것이다. 다만 사람이 전생(轉生)한 후 전세의 기억을 상실할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이전 몇 세(世) 내지 몇십 세의 덕과 업이 모두 금세(今世)까지 쌓였고, 금세의 화복(禍福 재앙과 복)에는 모두 전생의 원인이 있으며 모두 신이 배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는 마땅히 자신의 운명에 불만을 품지 말았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이때 마침 신과 싸우는 길에 있었고 자신이 만난 낯선 노인과 수행원들을 죽였다. 이는 테바이 신전에 있었을 때보다 그의 영혼이 더 오염된 것이다. 즉 죄업이 더 심해졌고 신으로부터 더욱 멀어졌기 때문에 단지 요괴를 통해 신의 말씀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다시 말해 신의 말씀에 담긴 깊은 함의를 깨닫기란 아주 어려웠다.

3. 조상의 죄업

오이디푸스의 부친 라이오스는 여러 차례 신(神)의 경고와 명을 거역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죄업이 가문의 죄업에서 비롯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첫째, 플라톤의 《법률》(9.836c)에서 신(神)은 라이오스 시대 이전에 동성애를 금지하는 법을 사람에게 주었다고 언급했다(라이오스는 그리스 역사상 최초의 동성애자로 간주된다). 라이오스는 젊었을 때 본국을 탈출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펠롭스 왕의 환대를 받았지만 배은망덕하게도 펠롭스의 잘생긴 어린 아들을 납치했다.

라이오스는 나중에 테바이의 왕이 되어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삼았으나 오랫동안 자손이 없었다. 이에 델파이의 아폴로 신전에 가서 신께 빌자 신탁에서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아들을 주겠다고 대답했지만, 태어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제우스는 라이오스가 그의 아들을 납치했다는 펠롭스의 저주를 들었기 때문이다.

둘째, 라이오스는 주인을 해쳐 제우스의 율령인 주인과 손님의 예[主客之禮]를 어겼다.

주인과 손님의 예란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그리스인에게 하사한 가장 중요한 예의였다. 제우스는 고립무원의 손님(낯선 이)이 주인에게 숙식을 요청하면 주인은 자비를 베풀어야 하며 종종 손님의 요청이 없어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손님에 대한 주인의 존경과 연민은 주신(主神) 제우스에 대한 경건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손님은 주인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데, 이 역시 주인과 손님의 예를 주관하는 주신 제우스의 끝없는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이다.

손님이 주인의 대접을 받은 후 두 사람은 친구가 되며 이 우정의 바탕은 제우스에 대한 경외와 감사다. 설령 해적들이 방문했을지라도 주인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먼저 푸짐한 음식으로 대접한 뒤 상대방의 내력을 물어야 한다. 일단 주인과 손님으로서 정을 쌓으면 해적도 예의와 부끄러움을 알기에 주인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만약 무신론의 기초위에 서서 사회학, 역사학, 인류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연구한다면 주인과 손님의 예가 왜 신의 왕 제우스가 고대 그리스인에게 정한 기본적인 도덕규범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주인과 손님의 예에 담긴 상징적 의미는 신(神)이 천지를 주재하며, 사람은 세간에서 윤회전생하는 것으로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와 같다. 그러니 사람의 의식주(衣食住)는 모두 주신(主神)의 은총에서 나온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이에 감사드려야 한다. 즉 신(神)이 주인이고 사람은 손님이다.

주인과 손님의 예는 세인(世人)들의 도덕을 단속해 낯선 남녀 사이의 혼외 관계는 예의가 뒷받침되지 않게 만들었다. 즉 주인과 손님의 예는 가정과 혼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고대 그리스 여인들은 미혼일 때는 아버지를 따랐고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랐다. 낯선 남자가 집을 찾아오면 남자 주인이 그를 대접한다. 그러면 쌍방은 주인과 손님이 되고 주인과 손님의 우정이 먼저이기에 손님은 주인의 딸이나 아내를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만약 남자가 그 집 여자와 결혼을 원한다면 반드시 방문해서 요청해야 했다. 여자 부친(또는 형제)의 손님이 되는 것이 먼저이고 아내를 맞이하는 의논은 나중이 된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도덕이 무너진 시대에 사람은 더 이상 신(神)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권력이 정의가 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 주인과 손님이 서로 아끼지 않고 선악이 뒤집혔기 때문에 뭇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표현했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미 제우스의 율령을 어긴 것을 의미하며 이 자체만으로도 죄업이 아주 무거운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궁전을 방문해 주인의 환대를 받다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왕비인 헬렌을 유괴한 것이다. 그의 죄명이 바로 주인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이다.

트로이의 도덕이 타락한 징표는 바로 파리스의 죄를 징벌하지 않은 것이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파리스 안건을 원로 회의에 회부했는데, 일부 원로들이 파리스의 뇌물을 받고 파리스를 두둔하며 헬렌의 반환을 거부했다. 또 이 문제로 방문한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우스를 해치려 한 것은 더욱이 주인과 손님 예를 위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온 도시가 멸망하는 재앙을 당한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배경은 바로 이 시기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전이 남녀 간의 풍속이 크게 손상된 시대가 된 것으로 당시 그리스 인들은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에 대한 경외심이 이미 흔들렸고 이 때문에 전쟁의 재앙을 초래했다. 즉 그 시기 문명을 끝장낸 트로이 전쟁을 초래한 것이다.

라이오스가 주인 펠롭스를 모욕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은 바로 제우스를 모욕한 죄다.

셋째, 라이오스가 신탁에 저항한 것은 바로 신과 싸운 것이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아들을 낳은 뒤 신(神)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도록 밧줄로 오이디푸스의 발목을 뚫고 하인에게 아기를 야산에 던져 죽게 했다. 그러나 하인이 이 아기를 불쌍히 여겨 코린토스 왕의 양치기에게 주었고, 양치기는 아이의 발목이 부었다고 해서 ‘부은 발목’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마침 코린토스 왕과 왕비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를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라이오스는 신탁을 들은 후 신을 경외하지 않았고 신과 싸워 아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다 오히려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역시 정확한 인과응보다.

신(神)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큰 죄를 지을 아들을 라이오스에게 준 것은 라이오스에게 불공평한 것이 아니었다. 신이 사람을 만들었고 아울러 사람의 행동을 규범 하는데, 라이오스는 신의 자손임에도 신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를 어겼으며 신의 규칙을 대체하려 했다. 이 무서운 생각은 아버지를 죽이는 것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무분별하고 광기어린 생각의 배후에는 바로 아버지가 다스리던 모든 것을 탐내고 강탈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어머니와 결혼한”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때문에 신이 라이오스에게 이런 아들이 태어난다고 알려준 것은 바로 라이오스에게 죄를 참회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선악(善惡)에는 보응이 따름을 선명히 드러내고 신(神)의 자비와 위엄을 드러냄과 아울러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神)의 배치와 설계는 반드시 존재하며 신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바로 이 메시지를 망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의 눈에 이런 행동은 완전히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현대에도 발생할 수 있을까? 현대 인류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했지만 무신론과 진화론이 사람의 두 눈을 가렸고 이를 맹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라이오스나 오이디푸스보다 더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출로(出路)는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들은 라이오스나 오이디푸스보다 신(神)께 구하는 법을 더 잘 알고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선지자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경고한 것은 ‘신을 믿는 것[信神]’이 무엇인가가 아니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서 자신이 무지(無知)하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표현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크게 우려한 것을 입증한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2000년 이상 전해져 내려왔지만, 역사상 그 누구도 오이디푸스(그리고 오이디푸스의 비극의 관객)가 어떻게 신께 구하고 죄를 씻으며 자신을 정화해야 하는지 분명히 제시하지 못했다. 비록 비극의 정화(淨化 카타르시스)효과에 대한 토론은 수없이 많았고 의학적으로 영혼·자아를 치료하려고 시도한 현대 학문과 이론은 아주 다양했지만 말이다.

오늘에 이르러 진정으로 세상을 구하는 대법(大法)인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이미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지금의 ‘오이디푸스’들이 만약 자신의 고집과 편견을 내려놓는다면 파룬따파에서 우주・생명・수련 등에 대한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있고 정말로 수련에서 구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연극은 정말로 폐막뿐이다. 왜냐하면 신이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설계한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더러 운명을 원망하고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의 위대함을 확고히 믿게 하고, 신을 찾는 성스런 길을 확고히 걸어, 진정으로 죄를 씻고 정화하며 지극히 선량하고 아름다운 경지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파룬따파를 만나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