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明月)
【정견망】
9. 중년 작품 《몽유천모음류별》
이백의 시가는 도성과 선경의 장면으로 가득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몽유천모음류별(夢遊天姥吟留別)–꿈에 천모산을 노닌 것을 읊고 떠나다》이다. 이 작품은 《별동로제공(別東魯諸公)–동로의 여러 벗들과 이별하다》라고도 불리는 칠언고시(七言古詩)다.
45세의 이백은 이 시에서 “예로부터 모든 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로다(古來萬事東流水)”라며 인생과 우주에 대한 활달한 자신의 인식을 드러냈다.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꿈에 천모산을 노닌 것을 읊고 떠나다》
바다 사람들 영주(瀛洲)를 말하지만
안개 낀 파도 아득히 깔려 참으로 찾기 어렵다네.
월(越) 사람들 천모산을 말하는데
구름 노을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혹 볼 수 있다네.
천모산은 하늘과 맞닿아 하늘가에 비껴있는데
기세는 오악을 뽑고 적성산도 덮는구나.
사만팔천장(四萬八千丈)이나 되는 천태산도
이 산을 마주하니 쓰러질 듯 동남으로 기울었네.
이에 나는 오월(吳越)을 꿈꾸었으니
어느 밤 달 비치는 경호를 날아갔네.
호수 달이 내 그림자 비추더니
나를 섬계(剡溪)로 보내주었네.
海客談瀛洲(해객담영주)
煙濤微茫信難求(연도미망신난구)
越人語天姥(월인어천모)
雲霓明滅或可睹(운예명멸혹가도)
天姥連天向天橫(천모연천향천횡)
勢拔五嶽掩赤城(세발오악엄적성)
天台四萬八千丈(천태사만팔천장)
對此欲倒東南傾(대차욕도동남경)
我欲因之夢吳越(아욕인지몽오월)
一夜飛度鏡湖月(일야비도경호월)
湖月照我影(호월조아영)
送我至剡溪(송아도섬계)
사령운(謝靈運) 머물던 곳 지금도 남아
맑은 물결 넘실대며 원숭이는 맑게 우네.
사공(謝公)의 나막신 신고 푸른 구름사다리를 오르나니
산허리에는 바다 위로 뜨는 해가 보이고
허공에는 천계(天雞 천상의 닭) 소리 들렸네.
천개 바위와 만개 굽이에 정해진 길 없으니
꽃에 홀려 바위에 기대니 문득 이미 어두워졌네.
곰이 포효하고 용이 울듯 시끄러운 바위샘
소리깊은 숲을 떨게 하고 겹겹의 봉우리도 놀래키네.
구름은 어둑해져 비가 오려는 듯
물결은 출렁이며 물안개 피어나네.
하늘이 갈라진 틈으로 번개와 우레 치더니
언덕이며 산이 무너지고 꺾여
신선 사는 동천 돌문 우르릉 쾅쾅 열렸네.
푸른 하늘 넓고 넓어 끝도 보이지 않는데
해와 달은 금은대(金銀臺)를 반짝반짝 비췄네.
謝公宿處今尚在(사공숙처금상재)
淥水蕩漾清猿啼(녹수탕양청원제)
腳著謝公屐(각착사공극)
身登青雲梯(신등청운제)
半壁見海日(반벽견해일)
空中聞天雞(공중문천계)
千巖萬轉路不定(천암만전로부정)
迷花倚石忽已暝(미화의석홀이명)
熊咆龍吟殷巖泉(웅포용음은암천)
栗深林兮驚層巔(율심림혜경층전)
雲青青兮欲雨(운청청혜욕우)
水澹澹兮生煙(수담담혜생연)
列缺霹靂(열결벽력) 丘巒崩摧(구만붕최)
洞天石扉(동천석비) 訇然中開(굉연중개)
青冥浩蕩不見底(청명호탕불견저)
日月照耀金銀台(일월조요금은대)
무지개로 옷 해 입고 바람으로 말을 삼아
구름위 신들이 어지러이 내려오는데
호랑이는 비파를 타고 난새는 수레 끌며
신선들이 삼대처럼 늘어섰네.
갑자기 혼백이 놀라 요동치니 멍하니
놀라 일어나 길게 탄식하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침상만 남아있고
지금껏 있었던 안개와 노을 사라져버렸네.
세간의 즐거움 역시 이와 같으니
예로부터 모든 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로다.
그대들과 이별하고 떠나가면 언제 돌아올까?
장차 푸른 절벽 사이에 흰 사슴 풀어 놓았다가
떠날 때 그것 타고 명산을 찾으리라.
어찌 눈썹 낮추고 허리 숙여 권귀(權貴 권세와 부귀)를 섬기느라
내 마음과 얼굴을 펴지 못하게 하겠는가?
霓爲衣兮風爲馬(예위의혜풍위마)
雲之君兮紛紛而來下(운지군혜분분분이래하)
虎鼓瑟兮鸞回車(호고슬혜난회거)
仙之人兮列如麻(선지인혜열여마)
忽魂悸以魄動(홀혼계이백동)
恍驚起而長嗟(황경기이장차)
惟覺時之枕席(유각시지침석)
失向來之煙霞(실향래지연하)
世間行樂亦如此(세간행략역여차)
古來萬事東流水(고래만사동류수)
別君去時何時還(별군거시하시환)
且放白鹿青崖間(차방백록청애간)
須行即騎訪名山(수행즉기방명산)
安能摧眉折腰事權貴(안능최미절요사권귀)
使我不得開心顏(사아부득개심안)
이 시는 당 현종 천보(天寶) 4년인 745년 작품으로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1년 전인 천보 3년(744년) 이태백은 장안에서 황제가 하사한 황금을 받고 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동로(東魯 지금의 산동지방) 남쪽에서 오월(吳越)을 유람하면서 꿈에 천모산에 놀러간 장면을 그린 이 시를 써서 동로의 벗들에게 남겨주었다.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을 《몽유천모산별동로제공(夢遊天姥山別東魯諸公)–꿈에 천모산에서 노닌 것으로 동로의 여러 친구들과 작별하다》라고도 한다.
감상: 이 시는 신선을 노래한 유선시(遊仙詩)다. 꿈에 명산을 놀러간 것을 시로 읊었는데 의경(意境)이 특이하고 웅장하면서고 비범하며 감정이 깊고 격렬한데다 내용이 다채롭고 변화가 많다. 예술적 형상이 다채롭고 표현한 수법도 참신하고 기이해 지금껏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붓 가는 대로 써서 흥이 넘치는 작품으로 시재(詩才 시에 대한 재능)가 흘러넘쳐 그야말로 절세(絶世)의 명작이다.
[역주: 이하 작품 설명은 《천고영웅인물 이백 편》에서 인용해 본문을 보충한 것이다.]
이 시는 꿈에서 노닌 것을 묘사했지만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다. 이는 그가 본 선경(仙境)을 꿈속의 경치로 표현한 것이다. 속인들은 이를 허황한 꿈속의 이야기로 여겨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가 술집에 몸을 감춘 것과 마찬가지로 속인사회의 ‘미혹’을 타파하지 않았다.
“바다 사람들 영주(瀛洲)를 말하지만 안개 낀 파도 아득히 깔려 참으로 찾기 어렵다네. 월(越) 사람들 천모산을 말하는데 구름 노을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혹 볼 수 있다네.”는 고대 전설에 바다 바깥에 영주라는 신선이 사는 곳이 있는데 허무하고 묘연해서 찾기가 아주 어렵다고 한다. 한편 현실 속 천모산은 뜬 구름에 가려 때로는 나타났다 사라지긴 하지만 오히려 볼 수 있다.
천모산은 섬계(剡溪 절강성 소흥의 계곡) 근처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산에 오르면 천모(天姥)라는 신선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이 천모산이 되었다. 천모산은 천태산과 마주보는데 이백이 한림학사가 되어 경성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차례 놀러간 적이 있다. 그에게는 이곳 산수가 아주 익숙했다.
천모산은 비록 월(越) 땅 동쪽에서 빼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다른 오대 명산인 오악(五嶽)에 비하면 손색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백은 오히려 시에서 “천모산은 하늘과 맞닿아 하늘가에 비껴있는데 기세는 오악을 뽑고 적성산도 덮는구나.”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적성산(赤城山)은 천태산(天台山)의 다른 이름이다. 천모산이 하늘에 맞닿아 기세가 오악을 뽑을 듯하니 천하명산 천태산마저 마치 천모산에 예를 올리는 것처럼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후인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어 의아해 한다.
“왜 이백의 붓끝에서 천모산이 천하의 유명한 오악이나 천태산보다도 높다고 했을까?”
때문에 이것을 이백이 평생 경험한 기산준령(奇山峻嶺 기이한 산과 빼어난 고개)의 환영(幻影)으로 보고 현실 속의 천모산을 이백의 붓끝에서 과장된 그림자로 본다. 하지만 수련을 통해 아주 높은 경계에 도달한 후 이백이 이때 본 천모산은 다른 공간에서 드러난 천모산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 선계(仙界)의 표현이다. 그러니 인간세상의 오악 등에 비교하면 자연히 훨씬 높고 커서 비교조차 할 수 없으며 수승(殊勝)한 장관 역시 속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천모산이 아니었다.
달밤에 푸른빛이 비추자 이백은 맑은 거울과도 같은 경호를 날아 지나갔다. 밝은 달이 그의 그림자를 경호 위에 비추더니 또 그를 섬계에 떨어뜨렸다. 남북조(南北朝) 시기 위대한 시인이자 수련인이었던 사령운(謝靈運 사공)이 천모산을 노닐 때 일찍이 섬계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백은 사령운이 전에 특별히 제작했던 나막신을 신고 일찍이 그가 올랐던 돌길인 청운제(青雲梯 푸른 구름사다리)를 올라간다. 그 후 바다에서 뜨는 해를 보고 굽이굽이 꺾어진 수많은 바위들을 보았다. 그러다 꽃에 취해 바위에 기대니 곰이 포효하고 용이 울부짖는데 구름은 짙어져 비가 올 것만 같고 물결은 출렁이며 물안개가 피어난다.
여기서 이백은 다른 공간에서 본 것을 한걸음 더 나아가 묘사한다. 그곳에서 이백은 시공을 초월했고 주위의 일과 사물이 다른 공간에서 하나로 융합되어 나타났다. 다른 공간에서 일체 물체는 전부 생명(生命)의 체현이다. 세인들이 보는 봉우리나 깊은 숲, 돌은 마치 아무런 생명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그들 모두 생명의 체현형식이며 시인과도 서로 소통할 수 있다.
계속해서 시인은 “하늘이 갈라진 틈으로 번개와 우레 치더니 언덕이며 산이 무너지고 꺾였다”고 묘사하는데 번개와 우레에 “신선 사는 동천 돌문 우르릉 쾅쾅 열렸다.”
갑자기 신선세계가 나타나더니 “푸른 하늘 넓고 넓어 끝도 보이지 않는데 해와 달은 금은대(金銀臺)를 반짝반짝 비췄네. 무지개로 옷 해 입고 바람으로 말을 삼아 구름위 신들이 어지러이 내려온다.”고 했다.
이는 분명 신선들의 모임이니 성대하면서도 열렬했다! “신선들이 삼대처럼 늘어섰다.”고 했으니 수많은 신선들이 대열을 지어 시인을 영접하러 온 것이다. 금대(金臺)와 은대(銀臺)가 일월과 더불어 서로 비추니 경치는 장엄하고 화려하며 이채롭기 그지없다!
많은 이들은 이런 것들을 시인의 꿈속 상상이나 낭만 등으로 간주하지만 사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는 바로 이백이 수련에 성취가 있고 열선(列仙)의 반열에 올라 천모산을 노닐고 여러 신(神)들이 그를 맞이하러 나와 선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백은 꿈에 노닌 것을 차용해 이런 기이한 경지를 써냈다.
한편 다른 공간의 선경(仙境)이 홀연히 사라지자 시인은 곧 현실공간으로 되돌아온다. 즉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속인들에게 “예부터 모든 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고 일깨워준다. 아득한 만사(萬事)는 모두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천기(天璣)를 깨닫는다면 홍진(紅塵)을 간파할 수 있다.
물론 시인은 “장차 푸른 절벽 사이에 흰 사슴 풀어 놓았다가 떠날 때 그것 타고 명산을 찾으리라.”라고 했으니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선경을 다시 방문할 수 있다.
본래 이 시의 뜻은 이곳에 와서 거의 다 펼쳐냈지만 마지막에 또 “어찌 눈썹 낮추고 허리 숙여 권귀(權貴 권세와 부귀)를 섬기느라 내 마음과 얼굴을 펴지 못하게 하겠는가?”라는 두 구절을 첨가했다. 이는 이백의 처지가 이와 같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선인들이 그를 수련하라 초대하는데 어찌 인간 세상에서 권력과 부귀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이백은 비록 현종의 지우(知遇)와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끝내 간신들의 질투 때문에 황금을 받고 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그의 사명 역시 황제를 모시고 황궁에서 늙는 것은 아니었다. 이백이 보기에 당시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이것만도 못하니 어찌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힐 수 있겠는가?
이백의 많은 유선시들은 대부분 술에 취해 술기운을 빌리거나 또는 꿈속의 장면을 썼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속인사회의 미혹을 타파하지 않았다.
두보는 이백을 생각하면서 “이백 형을 못 본지 꽤나 오래 되었는데 미친 척하며 떠돈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네. 사람들이 모두 다 그를 죽이려 한다지만 나는 그가 불세출의 인재임을 안다네(不見李生久 佯狂眞可哀 世人皆欲殺 吾意獨憐才).”(《불견(不見)》)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이백이 ‘미친 척(佯狂)’하면서 술기운을 빌려 진실을 드러낸 고충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다. 또 다음 구절에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 하지만”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니 이는 단순한 과장법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백을 미워하고 질투했음에 틀림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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