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纖纖)
【정견망】
당조(唐朝) 시인 두보(杜甫)의 작품 《망악(望岳)–태산을 바라보다》는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기백이 뛰어난 시의 하나다.
우선 전체 40글자로 이뤄진 시를 감상해보자.
태산은 대저 어떠한가?
제나라와 노나라까지 푸른빛이 다하지 아니하였네.
조물주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모아놓았고,
산의 앞뒤로 아침과 저녁이 나누네.
가슴을 트이게 하는 층층 구름이 생겨나고,
눈을 부릅뜨니 둥지로 돌아가는 새가 들어오네.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
주위의 작은 산들을 한 번 내려다보리라.
岱宗夫如何
齊魯青未了
造化鍾神秀
陰陽割昏曉
蕩胸生曾雲
決眥入歸鳥
會當淩絕頂
一覽眾山小
“태산은 대저 어떠한가?
제나라와 노나라까지 푸른빛이 다하지 아니하였네.
조물주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모아놓았고,
산의 앞뒤로 아침과 저녁이 나누네.”
시인은 태산(泰山)을 묘사하면서 신령스런 기운을 모아놓았고 양옆을 마치 음양처럼 갈라놓았다고 한다. 이 시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즉 시인이 태산에 올라 쓴 것인가 아니면 태산 아래에서 쓴 것인가? 제목이 ‘태산을 바라본다’는 《망악》이니 마치 멀리 떨어져있거나 또는 인근 산 위에 올라가서 쓴 것 같다. 사실 이 시는 마땅히 산기슭에서 썼을 것이다. 왜 산위에 올라가 쓴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마치 소동파의 말과 같은데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는 것은 단지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산위에 도달했다 해도 아마 그렇게 완전하게 보는 그런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당사자는 미혹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도리이다.
“가슴을 트이게 하는 층층 구름이 생겨나고,
눈을 부릅뜨니 둥지로 돌아가는 새가 들어오네.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
주위의 작은 산들을 한 번 내려다보리라.”
시인은 가슴이 벅차올라 또 눈을 크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본다. 시인의 소원은 태상 정상에 올라 천하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일에서 정상에 오르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중국 고대에는 마땅히 재상에 오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재상이 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여겼으니 즉 자신을 치국의 동량(棟樑)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의 제목을 태산에 오른다는 ‘등악(登岳)’이 아니라 멀리서 바라본다는 ‘망악(望岳)’이라 한 것은 당시 자신이 정상에 오르려는 소원은 있지만 아쉽게도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바람일 뿐임을 안 것이다.
사실 두보는 민간의 고통을 반영한 글들을 많이 썼으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우국(憂國)・우민(憂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릴 책략은 내놓지 않으면서 분개하고 불평하는 마음만으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사실 단지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가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좋게 할 방법을 생각한 사람만이 회사 이익에 부합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수련인 역시 이러하다. 낙천적이고 불평이 없는 것이 필수다. 물론 또 명리에 대해 담담해야 하는데 시인은 아마도 자신을 실증하려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반대로 얻지 못했을 수있다. 수련인이 자신을 실증하려 하는 것 역시 큰 집착이다.
지금은 정법 시기이고 시인 역시 문화를 개창해 대법을 위해 사용하고 대법제자들이 참고로 하도록 했다. 그러니 시인이 꼭 그렇다기보다는 마치 하나의 배역일 뿐 본인은 그렇지 않았을지 모른다. 마치 어떤 대법제자가 일찍이 몇 세(世)를 수련인이 되었다가 나중에 오히려 위충현(魏忠賢)이란 이런 나쁜 역할을 맡은 것과 같다. 겉으로 보자면 위충현은 좋지 않지만 배우는 오히려 좋은 것이다.
명리(名利)를 좀 더 가볍게 생각하면 생활이 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6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