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제1장 진화론——영원한 ‘가(假)’설
오랫동안 진화론(進化論)은 중국 생물 교과서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3대 기초 중 하나로서 정치서적에서는 보편적인 진리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사회적인 각종 경험을 통해 어쩔 수 없이 진화론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정말 유인원에서 진화해 온 것일까? 생명의 의미는 정말로 그저 단백질이 존재하는 한 가지 형식에 불과할 뿐인가? 도덕은 정말 단지 비(非)객관적이고 허무맹랑한 것에 불과한가? 계급투쟁이 정말로 사회진보의 유일한 원동력인가? 사람의 도덕성을 높이려면 먼저 꼭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의문들을 풀기 위해 필자는 우선 세 가지 각도에서 진화론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고 그리고 나서 진화론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진화는 종(種)사이의 간극을 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세진화(微細進化 Microevolution)와 대진화(大進化 Macroevolution)라는 두 개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린네가 제안한 양계(兩界) 분류 시스템을 예로 들자면, 대부분의 생물은 식물계(植物界)와 동물계(動物界) 두 개의 큰 계(界)로 나뉘며 각 계는 다시 점차적으로 세분화된다. 생물의 ‘상관(相關) 현상’에서 출발하여 생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등급을 나누는데 큰 것부터 낮은 순서로 나열해보면 문(門), 강(綱), 목(目), 과(科), 속(屬) 및 종(種 품종이 아니라 생물의 종을 의미)다. 뒤로 갈수록 더욱 비슷해진다.
예를 들어, 개와 늑대는 같은 속(屬)에 속하지만 개와 물고기는 같은 문(門 척추동물 아문)에 속하지만 강(綱)은 다르다. 즉, 개와 늑대 사이의 거리가 개와 물고기보다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미세진화란 생물의 후대가 이전 세대와 똑같지 않고 변하는 것을 의미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차이처럼 이런 작은 차이가 바로 미세진화가 발생한 것이라 한다.
현재 관찰 가능한 유전변이는 단지 ‘종(種)’ 내부의 변이일 뿐이며, ‘미세진화’는 ‘종’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미세진화와 상대되는 것이 대진화(大進化)다. 대진화란 생물 유전의 변이가 충분히 긴 시간이 주어져서 자손의 수가 충분하면 단지 종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속, 과, 목, 강, 문 및 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본다. 소위 ‘진화론’이란 바로 이 ‘대진화’를 말한다.
진화론에서는 앞서 언급한 생물 분류의 ‘상관 현상’을 ‘친연(親緣) 관계’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아울러 자연계의 모든 생물은 모두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해 수십억 년의 맹목적인 진화를 거쳐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난 150년 동안 신(新)다윈주의자들이 제공한 증거는 ‘미세진화’ 수준을 넘지 못했다. 사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미세진화에 대해서는 다툼이 없지만 대진화에 대해서는 이를 옹호하는 진화론자들이 전자(前者)를 근거로 후자(後者)의 이론을 확립하려 한다. 그러므로 정의상에서 ‘미세진화’와 ‘대진화’란 두 가지 진화를 구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2. 화석에서 대량의 중간형을 찾을 수 없다
실제 생물학에서 사람들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기형이고 도태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다윈은 오랜 진화 과정에 수많은 중간 과도기가 존재해야 하며 각 유형 간에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즉 진화는 점진적인 모델이라고 추론했다. 아울러 하나의 생물종을 말하자면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소멸에 이르는 것은 당연히 느리게 ‘적음-많아짐-적음’의 과정이라고 추론했다. 만약 생명이 정말로 무기물질에서 점차 진화해서 생겨났고 그런 다음 단순함에서 복잡함, 저급에서 고급으로 끊임없이 진화해왔다면 화석에서도 반드시 이런 진화의 증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화석 증거는 진화론 관점에 아주 불리하다. 심지어 다윈 자신조차 화석 증거는 “나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가장 명백한 이유”라고 인정했다. 그는 이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답을 줄 수 없으며” “자연계가 일부러 증거를 숨기고 우리가 과도기적인 중간형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고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
동시에 진화론자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점진적인 변화와는 달리 화석 증거는 생물종이 정체되어 변하지 않다가 갑자기 동시에 나타났다가 또 갑작스레 동시에 사라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는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명한 캄브리아기 생명의 대폭발을 예로 들자면, 5억 3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시대에 불과 2백만 년 사이에 생명진화에 비약적인 발전이 나타나 거의 모든 동물의 ‘문(門)’이 바로 이 시기에 동시에 나타났다. 하지만 일단 생성된 후에는 이들 ‘문’이 그 후 수억 년 동안 매우 안정적이며 ‘진화’를 거부한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문제에서 과도기 종인 ‘유인원’을 찾는 것이 오랫동안 과학계의 ’10대 현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소위 인류의 시조(始祖)는 여러 차례 부정되었다. 예를 들어 진화론 교과서에 인류 조상 화석으로 등재된 필트다운 맨은 1953년 비너(J. S. Weiner)와 오클리(K. P. Oakley)가 다른 영국 과학자들과 공동으로 사기극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두개골은 철분을 함유한 화학 약품을 칠해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고, 하악골은 원숭이 상악골은 인간의 것인데 이 둘을 짜맞추고 변형시켜 마치 유인원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1892년 발견된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과도기 화석인 소위 ‘자바인’은 유인원의 두개골과 여기서 40피트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의 다리뼈를 모아 만든 것이다. 학술계에서는 ‘자바인’을 부정했지만 과학교육 분야에서는 아직도 이를 선전하고 있다. 그러다 1984년에 이르러서야 ‘자바인’은 새로 발견된 유인원 화석인 ‘루시’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후 감정을 통해 루시 역시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루시는 인간과 무관하게 멸종된 것이다.
사실 1924년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루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 종의 대표다), 라마 원인 등 이른바 ‘유인원’ 종류의 화석들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지만 화석이 극히 불완전하다. 가령 두개골과 손가락 몇 개만 있는 식이다. 마치 루시처럼 많은 학자들이 인간과 진화적 전후 관계가 없다고 본다. 즉 아직까지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서 과도 단계 종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
3. 인체의 정밀한 구조와 정교한 생리 기제
사람의 눈이 좋은 예다. 우리는 시각 계통이 자연적으로 변화되어 생겼다고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시각이 만약 천만 년에 걸친 변이와 자연 선택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려면 이는 마치 태풍이 쓰레기 더미에 부딪힐 때 쓰레기가 자발적으로 모여 한 대의 비행기로 결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될 확률이 너무 작다고 느끼자 진화론자들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시간이 아주 길고 또 쓰레기 더미의 수가 대단히 크다면 당신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알 수 있는가?
사실 다윈 자신도 자연선택에 의해 눈이 형성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했고 《종의 기원》을 발표한 후에도 눈을 생각하면 여전히 두려워했다. 바로 그 자신의 내면 고백에서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이 생겨난 과정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는 무신론적이며 순수하게 자연적인 방법으로 생명의 기원을 밝혀야겠다는 믿음과 결심이 있었고 소량의 관찰에 근거해 진화 가설을 제시한 다음 그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선택적으로 찾아내 불리한 증거는 아예 무시한 것이다. 즉, 다윈의 진화론은 주로 충분한 과학적 근거보다는 그의 주관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진화론 학설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
관찰, 가설 및 검증이란 ‘3부곡’은 아직도 실증 과학을 하는 과학자들이 자연 법칙을 발견하고 과학 정리를 추상하면서 떠받드는 기준이다. 그러나 다윈 자신은 물론이고 나중의 신다윈주의자들조차 이 3부곡 중 세 번째 단계를 완주하지 못했다. 다윈은 원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발견될 수많은 화석들이 자기 가설의 증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사실상 이 세 번째 단계는 아주 어려웠다. 거의 1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까지 화석은 진화론을 과학의 단상으로 끌어올리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환영받지 못하는” 화석들이 필사적으로 진화론을 주저앉히고 있다.
진화론은 아마 ‘3단계’를 영원히 완주할 수 없는 단지 하나의 ‘가(假)’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수많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과학자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과학’의 자태로 존재한다. 특히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에서 진화론은 보편적인 진리의 이미지로 전 국민에게 주입되고 세뇌되어 마르크스주의의 3대 기초 중 하나가 되었고 자연스레 세계 모든 사물을 인정하는 표준이 되었다. 우리가 이미 보았다시피 진화론은 그 자체에 많은 문제들이 있고, 거짓과 논리적인 착오도 수두룩하다.
진화론과 같은 이런 학설은 사실 사회에 대해 거대한 영향을 끼친다. 진화론은 생명에 대해 유전자와 단백질의 일종 존재 형식이라며 아주 천박하게 해석한다. 또 사회적 다윈주의는 물종 간의 생존경쟁과 도태되는 기제를 동물계에서 무한 확대시켜 인류사회에 까지 적용해, 사심 없고 이타적인 정신은 철저히 이론적 지지와 근거를 잃고 기점에서부터 제거되었다. 진화론은 과학과 진리라는 이미지로 등장해, 손쉬운 정치적 몽둥이가 되어 모든 정통적인 신앙과 도덕 이념을 멋대로 공격했는데, 중국 공산당은 특히 우수한 전통문화를 ‘네 가지 낡은 것’으로 폄하했다.
특히 정치 투쟁을 벌일 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서로 고발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해치고, 부부가 서로 반목하며, 엄마와 딸이 서로 고발하며, 교사와 학생이 서로 투쟁한다. 공산당의 소위 당성(黨性)이란 수성(獸性 짐승의 본성)과 같거나 심지어 금수(禽獸)만도 못한 것이다. 진화론의 기점은 사람의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명은 지극히 중요며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다”는 정통적인 가치관을 생명을 극도로 무시하거나 마비된 심태로 변하게 만들었다.
가령 독분유, 독만두, 가짜 계란, 폐식용유, 독백신 및 학교나 병원 등의 각종 부실공사, 인명을 우습게보고 거리낌 없이 사람을 해치며, 야만적인 강제 낙태, 산 사람의 장기를 적출하여 폭리를 취하는 등등. 구(舊)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말처럼 “한 사람을 죽이면 비극이 되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내심 깊은 곳에서부터 철저히 도덕을 상실한 이런 ‘감각’이 세상의 도(道)를 망치게 했는데 그 안에서 흐름에 따라간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가해자까지 포함해 모든 사람을 희생자로 만들었다. 진화론은 이론적 기초이자 사람을 때리는 몽둥이가 되어 인류문명의 서로 돕는 정신과 도덕관을 완전히 정글의 법칙으로 대체하게 했다!
도덕과 정신세계의 충실함을 잃으면, 사람은 곧 자신의 뿌리를 잃게 되는데, 사람들은 삶이 공허해지거나 무감각해져서 각종 유혹에 시달린다. 다시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인생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삶이 즐겁지 않은 이런 사람들 무리 속에 있으면 점점 더 아무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더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사람이 어떻게 자신과 야수(野獸)의 차이에 신경 쓸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시체나 사람의 옷을 입힌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윈은 일찍이 자신의 학설을 가리켜 “마왕(魔王)의 성경”이라고 불렀다. 본래 기독교를 겨냥해 한 말이었지만 진화론이 탄생한 후 100년이 넘는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 명칭이 아주 적절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2/6/30/2595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