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
【정견망】
혼자 타향에 있으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귀향의 꿈을 꿀 수 없었던 남송의 시인 사방득(謝枋得)은 어떠했을까? 《무이산중(武夷山中)-무이산에서》은 모두 28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전체 시를 감상해보자.
십 년간 집에 돌아갈 꿈도 못 꾸고
푸른 산과 들판 물가에 홀로 서 있네
산 비 그치니 천지가 적막한데
몇 생을 수련해야 매화에 이를 수 있을까
十年無夢得還家
獨立青峰野水涯
天地寂寥山雨歇
幾生修得到梅花
“십 년간 집에 돌아갈 꿈도 못 꾸고
푸른 산과 들판 물가에 홀로 서 있네”
이 시에서 가장 눈여겨볼 구절이 바로 “십 년간 집에 돌아갈 꿈도 못 꾸고”다. 시인은 왜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걸까? 사실 시인이 말하는 집은 자신의 작은 집이 아니라 ‘큰 집[大家]’즉 자기 나라다. 자신의 나라가 침략당해 망국의 노예가 될 때면 고향이란 개념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여기서 ‘집에 돌아간다(得還家)’는 구절에는 또 가정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시인의 가족은 전쟁 중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소위 가정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후면에서 “푸른 산과 들판 물가에 홀로 서 있네”는 산봉우리와 들판 밖 물가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의 고독을 부각시킨다. 나라도 없고 집도 사라졌다.
“산 비 그치니 천지가 적막한데
몇 생을 수련해야 매화에 이를 수 있을까”
시인은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이 죽은 듯이 고요해지고 비마저 그친 것을 보았다. 이때 시인은 수련(修煉)을 떠올렸는데, 여기서 ‘매화’란 수련인[또는 은사(隱士)]이 지녀야 할 고귀한 자질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이 왜 출가(또는 은거)를 생각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세상의 영화 이면의 처참함을 꿰뚫어 보았든가 아니면 불가(佛家)의 진수를 깨달은 걸까? 하지만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불안정하며 심지어 한바탕 꿈과 같다는 것이다. 어제의 고향은 더 이상 없고, 단지 적막한 대지와 고향의 부서진 담벼락만 남았다.
오늘날에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의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경문이 발표된 후에야 비로소 만고(萬古)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다. 원래 수련만이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이것만이 인류의 진정한 목적이다. 세간의 부귀영화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오직 도(道)를 얻고 원만(圓滿)해서 천국에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만이 영원한 행복이다.
시인이 귀향하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자신도 미망 속에 있어서 왜 존재하는지, 집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이 만고의 기연(機緣)을 파악하지 못한단 말인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