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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경외심이 있어야 한다

고원(高遠)

【정견망】

청대(淸代) 학자 기효람(紀曉嵐)은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에 이런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하북 교하(交河)현 출신의 소두남(蘇斗南)이란 선비가 옹정(雍正) 연간 회시[會試 역주: 향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치는 2차 과거 시험. 여기에서 합격하면 최종 관문인 전시를 치른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백구하(白溝河)를 지나갔다. 주점에서 공교롭게 친구를 만났고 두 사람은 한담을 나눴다. 친구는 막 관직을 마치고 귀향하던 참인데 술에 취한 김에 큰 소리로 선악(善惡)에 보응이 없는데 하늘의 이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등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때 마침 승마복을 입은 한 사람이 마침 주점 옆 큰 나무에 말고삐를 묶다가 두 사람의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은 뒤 이 남자는 소두남의 친구에게 말했다.

”당신은 인과(仁果)가 분명하지 않다고 의심하는가? 사실 호색(好色)하는 사람은 반드시 병에 걸리고,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해지는데 이것은 정말 확실하다. 또 남의 재물을 빼앗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살인하는 자는 반드시 목숨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데 이것이 하늘의 이치다! 그러나 호색하는 사람에게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도박을 하는 사람도 물론 수준의 차이가 있기에 당연히 보응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가령 재물을 강탈하는 강도에게도 두목이 있고 졸개가 있으며, 살인에도 과실이 있고 미리 계획된 것이 다르니 당연히 똑같이 거론할 수 없는데 이 둘의 차이는 아주 미묘하다. 사람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아마 공(功)과 과(過)가 서로 보상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보응이 없을 수 있다. 또 상과 벌이 아직 이르지 않았거나 복보(福報)가 끝나지 않아서 마땅히 있어야 할 보응이 제때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는 작고 미세한 차이로 천리나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소견으로 하늘의 도(道)를 의심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 뒤집힌 것이 아닌가? 게다가 당신이 또 무슨 자격으로 하늘을 원망하는가? 당신은 처음 9품관으로 시작해 7품관이 될 운명이었지만, 바로 당신이 아부를 잘하고 술수가 많아 속으로 이익만 추구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8품관으로 강등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니 자신은 능력이 있어서 9품에서 8품으로 승진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당신이 계략에 뛰어나고 백성을 생각하지 않아 원래 7품 관직에서 8품 관직으로 강등된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말을 마친 후 그는 소두남의 친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고, 말을 마친 후 또 큰 소리로 물었다. “설마 당신이 잊어버렷단 말인가?”

옆에 있던 사람도 대체 무슨 말인지 똑똑히 듣지 못했고 단지 소두남의 친구가 깜짝 놀라서 온몸에 땀을 흘리며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하는 말만 들렸다.

승마복을 입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나만 알겠는가? 삼계(三界)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몸을 돌려 말에 탔는데 말발굽 뒤에서 먼지가 날리는 모습만 보였고 승마복을 입은 사람이 신기하게 사라졌다.

“삼계 안에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는 이 말을 지금 사람들은 들어도 별다른 생각이 없거나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선악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말은 고인에게 있어 마치 천둥소리처럼 너무나도 명백했다. 신(神)이 사람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나타나니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보고 있다. 선(善)을 행하면 선한 보응이 있고 악(惡)을 저지르면 악한 보응이 따른다. 악을 저지른 것이 아무리 비밀스러워도 머리 위 석 자에 있는 신령(神靈)을 벗어나진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경외(敬畏)’란 중공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신령(天地神靈)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신불(神佛)이 만드셨으니 사람이 신불께 공경히 예를 올리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이다. 신불이 정해주신 사람이 되는 표준에 따르면 신불은 계속해서 사람에게 복보를 주어 역사의 긴 흐름에서 더 오래 갈 것이며 일단 정법(正法)을 만나면 정법 속에서 수련해 천국 세계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윤회전세(輪迴轉世)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 몸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늘만큼 큰 기연과 복분(福分)이다.

중공은 거짓말과 폭력으로 중국인들을 굴복시키려 한다. 중국인들은 공산당을 단지 두려워할 뿐 경외심은 없다. 중공은 사람들에게 무신론, 진화론을 주입하고 천지와 투쟁하고 신불과 투쟁하면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고 세뇌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업력(業力)만 축적할 뿐이다. 업력이 누적되어 십악불사(十惡不赦)한 정도에 이르게 되면 생명이 소훼된다. 즉 더는 윤회전세하지 않고 끝없는 고통의 심연 속에서 형신전멸(形神全滅)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세상을 해치려는 중공의 진정한 목적이다.

반면, 전통문화는 선을 중시하고 남을 잘 대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에게 복보를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청대(淸代) 옹정(雍正) 연간에 조정에서 관직을 지낸 장남촌(莊南邨)의 모친 동(董) 부인은 후처였다. 장남촌이 태어난 지 한 달가량 되었을 때 전처 아들이 홍역에 걸렸다. 동부인은 자기 아들에게는 과일과 떡 등을 먹이고 전처 아들에게 자신의 젖을 먹였다. 가족들은 그녀가 홍역에 걸려 장남촌에게 옮길까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자 동 부인이 말했다.

“나는 아직 젊으니 설사 아들이 죽는다 해도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돌아가신 언니[남편의 전처를 말함]는 이 아이 하나밖에 없다.”

그녀는 또 자신의 돈을 절약해 우유를 사서 먹이며 전처 아이가 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했다.

동 씨는 나중에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당시 “다섯 아들이 등과(登科)”했다고 불렸다. 특히 장남촌은 전시에서 이갑(二甲) 2등[역주: 전시 수석인 장원(壯元)과 차석인 방안(榜眼)이 일갑(一甲)이고 삼등인 탐화(探花)를 이갑(二甲)이라 했다.]을 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장원을 놓쳤다. 또 그의 두 아들이 나중에 장원(壯元 수석)과 방안(榜眼 차석)이 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동 부인는 살아생전에 무려 7명이나 되는 자손이 진사에 급제한 성황을 직접 목격했다. 이것은 동 부인이 나중에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후인들은 “동 부인에게 두터운 마음이 있었으니 그녀의 후손들이 잘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반면 중공은 선을 말하지 않고 악을 중시하며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고 투쟁하게 한다. 필자의 친구 중 고등학교 교사가 있는데 “하루 종일 다른 사람과 투쟁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중공은 매번 운동을 시작할 때마마 늘 거짓말로 선량한 사람들을 도발하고 군중들을 동원해 투쟁하게 만든다. 가령 파룬궁을 박해할 때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해 근거 없는 증오심을 선동하기 위해 소위 ‘천안문 분신 자살사건’을 조작해 사람들이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도록 선동했다. 전통문화에서 보자면 파룬궁에 대한 박해, 신불(神佛)에 대한 박해 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생명을 훼멸하는 업을 짓는 악행이다.

악행을 저지르면 악보를 받게 마련이다. 사천 어느 도시에 온 가족이 경찰인 집이 있었는데 늘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생겨 늘 편안하지 못했다. 경찰의 아내는 슬프게 울부짖었다.

“우리는 평생 당을 위해 분투했는데 왜 좋은 보답이 없는가?”

공산당의 말을 따르면 모두 나쁜 일이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라고 명령하자 당신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파룬궁을 잔인하게 박해했으니 어찌 좋은 보답이 있겠는가?

중공은 각종 정치 운동을 통해 5천 년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중국인들에게 대를 이어 당 문화를 세뇌시켰다. 때문에 중국인들이 더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또 사람을 천지(天地)와 단절시키고, 신불(神佛)의 연계를 단절시켜 신불에 대한 경외심을 사라지게 했다. 게다가 중공이 만든 거짓·사악·투쟁·색정이 가득한 가장 부패한 가치관으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들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선과 악을 똑똑히 모르며 우주 특성 진선인(真善忍)을 눈앞에 두고도 감히 접촉하거나 알아보려 하지 못한다. 중공을 건드렸다가 정치적인 희생양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중공은 마치 인간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같고, 신불은 마치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선과 악에 보응이 따름은 하늘의 이치[天理]로 인간 세상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늠한다. 중공도 이 천리의 제약을 받지만 단지 사람의 육안으로 그것의 표현을 볼 수 없을 뿐이다. 중공 자체가 상생상극(相生相剋)이란 하늘의 이치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사람이 있으면 귀신이 있고, 부처가 있으면 마(魔)가 있고, 행복이 있으면 마난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얻은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는 것은 바로 사람의 선량한 본성을 일깨우고 신불(神佛)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우는 것으로, 중공 마귀의 모습과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그것의 사악한 본성을 똑똑히 인식해야만 사람의 미래와 관련된 이 정사대전(正邪大戰)에서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파룬궁 수련생들을 선하게 대하고 파룬궁 창시인을 존경해야만 보다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