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理福)
【정견망】
이백은 청고(淸高)하고 오만하게 살았다. 범속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꺼렸을 뿐만아니라, 인간 세상을 내려놓지 못했다. 때문에 만년(晩年)에는 고독했다.
《경정산에 홀로 앉아》라는 이 시는 스무 글자에 불과하지만 인간 세상의 고독을 고스란히 전한다.
뭇 새들 모두 높이 날아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로이 떠가네
서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것은
오직 경정산 뿐이로다.
眾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뭇 새들 모두 높이 날아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로이 떠가네”
여기서 “뭇 새들”이 가리키는 것은 세상의 고관대작, 또는 시류에 잘 편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흔히 큰 흐름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시인은 자연스레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 역시 시인을 멀리한다. 반면 “외로운 구름”은 수도인(修道人)을 가리킨다. 그들은 여유롭고 자재해서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시인은 아마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백은 산속의 은사(隱士)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흔히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은사들이 시인의 세상에 대한 집착을 보고 그를 만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 이백의 명성이 천하에 드날림은 본래 좋은 일이었지만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고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을 수 없는데 어떻게 수도인이 될 수 있겠는가?
“서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것은 오직 경정산 뿐이로다.”
시인은 왜 유독 경정산을 그렇게 좋아했을까? 바로 시인이 산속의 신선이 되고자 했으나 얻지 못해 그저 높은 산을 앞에 두고 긴 한숨만 쉬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당시 시인이 인간 세상의 명리를 내려놓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창조해, 오늘날 정법(正法)을 위한 길을 닦은 것임을 안다. 일찍이 산속에서 수도했던 사람들도 모두 앞다퉈 산을 나와 법을 얻고자 한다. 오늘날에 와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생명의 의미는 바로 법(法)을 얻어 자신의 천국 세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백이 정말 세간의 명리에 집착했을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다. 모두 정법을 위해 길을 다지러 온 것이다.
고독한 시인은 이미 법을 얻어 대법에서 수련하고 있지 않을까? 모든 생명이 다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축원할 뿐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