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애(天涯)
【정견망】
당조 시인 최도융(崔道融)은 일찍이 《목수(牧豎)》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이 시에 “수(豎)”라는 글자가 하나 있지만 흔히 해석할 때 무시되곤 한다. 즉 조사(助詞)라서 별 뜻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시인이 아무 이유 없이 수라는 글자를 썼겠는가?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전문을 감상해보자.
목동은 도롱이와 삿갓 들고
사람을 만나도 의기양양
소 등에 누워 피리 불다가
개울 옆 밭을 가누나.
牧豎持蓑笠
逢人氣傲然
臥牛吹短笛
耕卻傍溪田
즉, 도롱이와 삿갓을 쓴 목동이 아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 등에 누워 피리를 불다 소가 밭을 갈 때는 또 개울가까지 따라간다.
사실 이 시에서 우리가 진정하게 표현한 것은 목동의 의기양양함과 자부심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목을 “의기양양한 목동”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문해자》에서 “수(豎)는 굳건히 선다(豎立也)는 뜻이다. 간(臤)을 따르고 두(豆)는 소리를 나타낸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린 목동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분담해 부모님을 돕는데 이것이야말로 목동이 자부하는 바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단지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모두 책임이 있다. 모두 천상(天上) 각기 다른 체계 신(神)의 대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고 세파에 휩쓸려 살아가니 정말 애석하지 않은가?
목동의 자부심은 자신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을 발휘해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생명을 위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법이 전해졌고 생명이 법을 얻음으 단지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건 배후의 그런 중생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이 잘 해야 할 일을 잘하지 못하는가?
일단 기연을 놓치고 나면 만회할 기회는 없다.
그날이 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나이 어린 목동조차 책임을 다하겠다는 결심이 있는데 우리는 왜 해내지 못하는가? 세인들은 이 시를 해석할 때 왜 이 가장 중요한 단어를 생략하는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