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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각박하면 친구가 없다[水至清則無魚,人至察則無徒].”
이 말은 사람들이 완벽함을 너무 강요하지 말라고 설득할 때 자주 사용된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를 키울 수 없고, 매사에 너무 진지하고 사람을 너무 까다롭게 굴면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 이는 세상의 이치를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생명과 환경에 대한 심층의 이치를 드러낸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수생 식물 몇 개를 사서 깨끗한 물이 담긴 대야에 심어 키웠다. 처음에는 푸르고 싱싱했지만, 곧 썩고 시들기 시작하더니 결국 전부 죽었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에도 시도해 보았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당황해서 정보를 검색해보니 수생 식물은 “깨끗한 물”에서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의 생태계로 즉 물고기가 있고 미생물이 있고 자연이 순환하는 환경이다. 물이 깨끗하면, 생명 간의 상호 연결을 차단한다. 미생물의 분해와 물고기의 신진대사가 없다면 수생 식물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잃는다.
이는 내게 아주 소박한 이치를 상기시켜 주었다. 자연 속의 매 한 생명은 모두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든 수생 식물이든 모두 “서로 주고 받는”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를 “먹이 사슬”이나 “생태계 평형”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는 우주 만물의 질서 있는 운행을 체현하는 것이다. 이 환경을 떠나면 생명은 지속할 수 없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는 말은 물고기가 청결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약간 혼돈스런” 자연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이다. 생명의 생존은 고립적으로 순수한 것이 아니라, 서로 낳고 기르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각박하면 친구가 없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인성(人性)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조차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아무리 평범한 사람조차도 선념을 품을 수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면 대인 관계에서 점점 더 고립될 것이다.
진정한 관용은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현(聖賢)이 아닌데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라는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사기·관중안자열전》에 따르면 춘추시대 관중(管仲)은 어렸을 때 집이 너무 가난해서 늘 친구인 포숙아(鮑叔牙)에게 돈을 빌리곤 했다. 그러나 포숙아는 이를 따지지 않았고 항상 그의 재능을 칭찬하며 장래에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라며 격려해주었다. 훗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고 관중은 실패하여 투옥되었다. 포숙아는 새로 즉위한 제 환공(桓公)에게 관중을 재상으로 강력히 천거하며 “관중의 재능은 저보다 열 배나 뛰어납니다”라고 말했다. 포숙아의 천거 덕분에 관중은 마침내 중용되었고 환공을 도와 제후들을 9번에 걸쳐 회합해 천하를 바로 잡았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의 하나가 되었다.
만약 포숙아가 인재를 알아보는 통찰력과 넓은 흉금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다시 씌어졌을 것이고 “관중의 통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상 만물은 저마다의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완벽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는” 선의(善意)가 필요하다. 이는 마치 생태계가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혼탁”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 역시 우정과 신뢰를 키우기 위해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각박하면 친구가 없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적당히 만족하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 사이의 관계는 본래 서로 위하는 환경과 피차간의 성취에 기반함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집념(執念)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관대할 때, 우리 자신에게도 따뜻한 생기(生機)를 남길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8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