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淸源)
【정견망】
많은 유럽과 미국 영화, 드라마에서 외국인이 서툰 솜씨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이것은 물론 조롱이 아니며, 젓가락 사용은 확실히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다. 필자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아직도 가족들에게 젓가락질을 못 한다고 놀림을 받는다.
젓가락 사용이 어렵다는 것은 비단 현대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젓가락으로 달걀을 먹는 것에 대한 우스갯소리가 기록되어 있다. 동진(東晉) 시대 남전후(藍田侯) 왕술(王述)이 달걀을 먹던 중, 달걀이 너무 미끄러워 손에 든 젓가락이 말을 듣지 않는 듯 집히지도 않고 찔리지도 않자, 울화통이 터져 달걀을 땅에 던져 버렸다. 달걀이 멀쩡하게 땅 위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의 화는 더욱 치밀었고,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나무 나막신으로 밟으려 했다. 불행히도 몇 번을 밟아도 맞지 않았다. 그는 더욱 분노가 치밀어 달걀을 주워 입에 넣고 세게 몇 번 깨물고는 다시 뱉어 버렸다.
하지만 중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특별한 기술이 적어도 3000년 동안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젓가락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상(商)나라 주왕(紂王)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비자(韓非子)》에 따르면, 주왕이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좋아하자 숙부인 기자(箕子)가 거의 혼절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기자는 주왕이 사치스럽고 방탕해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기자는 일단 상아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면 반드시 코뿔소 뿔로 만든 잔으로 술을 마시고 싶어 할 것이며, 정교한 식기를 사용하게 되면 산해진미를 추구하게 되고, 희귀한 음식을 먹게 되면 의복(衣), 거주(住), 행동(行)의 규모도 따라갈 거라 생각했다. 과연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왕이 고기로 동산을 만들고, 포락(炮烙)을 설치하고, 술지게미로 만든 언덕에 오르고, 술 연못에서 놀았다”(《한비자》), 결국 상아 젓가락 한 쌍으로 나라가 망했다.
젓가락의 역사가 이렇게 길기에, 젓가락과 관련된 역사적인 장면도 적지 않다. 널리 알려진 《삼국연의》에는 청매를 삶아 마시며 영웅을 논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허구가 아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이런 기록이 있다.
조조가 유비에게 여유롭게 말했다.
“오늘날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뿐이다. 원소 무리는 족히 셀 것도 못 된다.”
유비가 마침 식사 중이었는데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그때 천둥이 크게 치자, 유비가 말했다. “성인께서 빠른 천둥과 세찬 바람에는 반드시 변화가 있다고 하셨으니, 진실로 맞습니다. 천둥의 위력이 능히 이 정도일 줄이야!” 조조 또한 실언한 것을 후회했다. 조조의 미묘한 떠보기와 유비의 내심은 당황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침착한 대응, 천둥이 치는 가운데 젓가락 한 쌍이 절묘하게 떨어지는 장면은 두 천고영웅(千古英雄)의 최고 지혜와 용기의 교차를 이끌어내니, 참으로 멋진 장면이다!
한편, 한초(漢初) 세 영웅 중 한 명인 장량은 젓가락을 국가 전략의 지휘봉처럼 휘둘렀다. 초한 쟁패(楚漢爭覇) 시기에 역이기(酈食其)가 유방에게 육국을 회복시켜 함께 초나라를 치자고 권했다. 유방은 이에 깊이 동의하고, 즉시 분봉(分封)을 시행하도록 명했다. 이때 장량이 밖에서 돌아오자 유방이 식사를 하면서 장량에게 육국을 분봉하려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장량은 먼저 깜짝 놀란 뒤, 유방에게 “대왕의 젓가락을 빌려 대왕을 위해 이익과 폐해를 분석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장량은 젓가락을 들고 이리저리 가리키며, 옛것을 빌려 지금을 논하고, 육국 회복의 폐해를 여덟 가지 방면에서 상세히 논술하여, 유방이 분봉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저지시켰고, 중원 대지가 다시 장기간의 분쟁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상은 역사의 큰 시각에서 말한 것이지만, 젓가락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큼, 결국 가장 기본적인 식탁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
중국인은 예의를 중시하며, 식탁에서의 문명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중화민국 시기에도 여전히 그러했다. “젓가락을 들 때는 반드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 때는 반드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어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젊은 사람이 비로소 자리를 뜬다. 식사를 할 때는 몸을 단정히 하고, 상에서 너무 떨어지지 않으며, 젓가락을 들 때는 여유롭고, 접시에 너무 급히 넣지 않는다. 밥과 반찬을 엎지르지 말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며, 음식을 절도 있게 먹어 몸을 기르고 예절을 익힌다.”(《양몽편독(養蒙便讀)•민국•주병청(周秉清)》)
즉, 밥을 먹을 때 젓가락과 숟가락을 함께 들어선 안되고, 반찬을 집을 때 너무 급하거나 빠르지 않으며, 거동은 점잖고 여유로워야 하고, 겸양하며 절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간단한 두 개의 가는 나무 막대기가 중국인 식탁 예절의 기초를 이루어, 중화 문화의 기능과 예절을 겸비한 은은한 운치를 표현해 냈다.
한편 고대에 젓가락을 표현한 한자 “箸(저)”가 왜 “筷子(콰이쯔)”로 바뀐 이유는, 중국 사람들이 상서로운 말을 듣기 좋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민간에서는 속된 금기(俗諱)가 곳곳에 있지만, 오(吳) 지방이 가장 심하다. 예를 들어 배를 탈 때 ‘머무르다(住)’를 꺼리고, ‘뒤집히다(翻)’를 꺼리기에, ‘저(箸)’를 ‘콰이얼(快兒)’이라고 한다.”(《숙원잡기(菽園雜記)•명•육용(陸容)》)
오나라 지방 사람들은 ‘저(箸)’라고 부르면 재수가 없어 행선(行船)이 멈추는 것 같다고 생각하여 ‘콰이얼(快兒)’로 바꾸어 불렀는데, 젓가락이 주로 대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오늘날 우리의 ‘筷子(콰이쯔)’로 변하게 된 것이다.
[역주: 중국어에서는 젓가락을 뜻하는 저(箸)와 배가 멈춰서 나가지 않는다는 주(住)의 발음이 같다. 때문에 뱃길을 많이 이용하는 강남지방 사람들이 이 단어의 사용을 꺼린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7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