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동방 고국(古國)을 향한 항해
베르사유 궁전에 나타난 최초의 중국인 심복종(沈福宗)이 묘사한 중국 문명은 루이 14세를 깊이 매료시켰다. 동시에 동행했던 벨기에 예수회 선교사 필리프 쿠플레도 루이 14세에게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중국 이름 남회인南懷仁)의 요청을 전달했다. 그것은 중화제국에 조속히 사절을 파견해 달라는 것이었다. 무역, 과학, 혹은 선교의 관점에서 볼 때, 태양왕은 프랑스가 반드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따라잡아 신대륙과 오랜 역사를 지닌 동방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즉, 프랑스에 있어 중국으로 사절을 보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일이었다.
얼마 후, 베르사유 궁전은 박학다식한 예수회 선교사 6명을 선발했다. 그들의 특수한 사명 때문에 태양왕은 이 6명의 선교사를 ‘국왕의 수학자(Les Mathématiciens du Roi)’라고 명명했다. 1685년, 이들 6명의 선교사는 묵직한 관측 장비와 30상자의 계기들을 가지고 원양 항해선인 ‘랑피트리트(L’Amphitrite)호’에 몸을 싣고 브레스트 항을 출발해 머나먼 동방으로 항해했다.

17세기 일본 나가사키 해역을 항행하는 포르투갈 크라크 범선 (퍼블릭 도메인)
3년간의 험난한 해상 및 육상 여정을 겪은 후, 이들 선교사는 마침내 영파(寧波 닝보)에 도착했다. 이때 6명 중 한 명은 샤암(지금의 태국) 국왕에 의해 그곳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 다섯 명인 조아생 부베(중국 이름 백진白晉),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중국 이름 장성張誠), 장 드 퐁타네(중국 이름 홍약한洪若翰), 클로드 드 비스들루(중국 이름 유응劉應), 루이 르 콩트(중국 이름 이명李明)가 여정을 이어갔다. 절강 순무의 힐난을 해결한 후, 그들 일행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대한 동방의 오랜 국가를 가로질러 마침내 1688년 경성(京城 지금의 북경)에 도착했다. 당시 사상자가 속출했던 해로에 비하면 이러한 결과는 천만다행이라 할 만했다. 필리프 쿠플레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약 600명의 선교사가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전교하러 왔으나 최종적으로 도착할 수 있었던 인원은 100명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바다에서 목숨을 잃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위험천만했던 해로와 육로를 겪고, 다시 중국 경내에서 긴 여정을 거친 후, 태양왕의 사절들은 마침내 당시 동아시아 제1의 제국인 만청(滿淸) 제국의 수도인 경성에 당도했다. 그들이 지참한 태양왕의 선물들 역시 지구 반대편인 중국에 함께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천년에 만나기 힘든 동서방의 두 제왕, 즉 동서방 두 문명의 역사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중국 황제의 조정에서
부베와 제르비용 등은 거대한 자금성에 들어서서 층층이 이어진 돌계단을 지나갔다. 그들 앞에 나타난 이는 영무(英武)하고 자신감 넘치는 강희대제였다. 당시 강희제는 30대였다. 그는 용이 수놓아진 커다란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눈빛은 온화하면서도 정기가 서려 있었다. 곧 프랑스에서 온 이 예수회 선교사들은 황제 폐하가 에너지가 넘치고 부지런하며, 역사상 그 어느 제왕보다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이 넘치며 자신감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러 방면에서 강희대제와 태양왕은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 같았다. 지구의 이편에서 강희대제는 8세에 등극하고 14세에 친정을 시작해 61년 동안 청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몸속에는 여진족, 몽골족 그리고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신궁(神弓)이자 일류 기마수였으며, 평생 수많은 맹수를 사냥했고 장거리 승마 시 며칠 동안 준마 몇 마리를 갈아타면서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정해진 업무 시간을 초과해 일하며 어진 정치를 베풀고 백성을 사랑하여 청조(淸朝)의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열었다.
강희제는 한문과 만주어에 정통했다. 소년 시절에는 종종 서재에서 심야까지 고군분투하며 글을 읽어, 전혀 황제 같지 않고 오히려 경성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려는 선비 같았다. 젊은 시절의 루이 14세처럼 강희제의 감정 역시 풍부하고 섬세했다. 그는 진정 어린 시를 많이 썼으며, 심지어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예수를 찬미하는 시를 몇 수 쓰기도 했다. 이 시들에는 제왕의 말투가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강희제 시대에는 『고금도서집성』, 『전당시(全唐詩)』 등 방대한 유서(類書)를 편찬하며 만주족의 한화(漢化)에 많은 심혈을 들였다.
또한, 강희제의 예술과 연극에 대한 기호 역시 루이 14세에 못지않았다. 남순(南巡) 중 소주(蘇州)에 이르렀을 때는 매일 밤 곤곡(崑曲 중국 전통극)을 감상했다. 진강(鎭江)에 도착했을 때는 부베가 프랑스에서 데려온 9명의 예수회원들을 불러 배 위에서 건반 악기, 바이올린, 피리를 연주하게 했다. 궁중에서도 수시로 경극을 공연했으며 한번 시작하면 며칠씩 이어지기도 했다.
강희제는 태양왕의 사절들을 친절하게 접견했다. 그는 장 드 퐁타네, 클로드 드 비스들루, 루이 르 콩트를 상해와 섬서(陝西)로 파견해 이 땅의 백성들에게 전교하려는 그들의 염원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부베와 제르비용을 경성에 남겨 만주어를 배우게 하는 한편, 자신에게 수학, 기하학, 천문물리학, 악리(樂理 음악 이론) 등 서양 학문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하여 부베와 제르비용은 만주어를 열심히 배웠고, ‘타타르인(역주: 당시 서양에서는 중국을 타타르라 불렀다)’들이 경외할 만한 긴 수염을 길렀다. 매일 새벽 말로 한두 시간을 달려 양심전(養心殿)에 도착해 강희제에게 기하학, 음악, 물리학을 가르쳤으며 유럽의 문화와 풍습도 들려주었다. 그들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져온 선물인 천문 탐측기는 어화원(禦花園)에 놓였고, 강희제의 침궁에는 구리로 만든 커다란 자와 컴퍼스가 놓였다.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황제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천체를 관측하는 쌍안 망원경, 두 개의 괘종시계, 그리고 수평기입니다. 이 기기들은 정밀도가 매우 높으며, 황제께서는 이를 자신의 방에 배치해 두시고 자와 컴퍼스를 손에서 놓지 않으실 정도로 아끼십니다.”

강희제 남순도권, 황하 치수 (퍼블릭 도메인)
황제가 행차할 때 수행원들은 이 기계들을 메고 따랐다. 밤하늘이 맑을 때면 강희대제는 쌍안 망원경을 동방의 별을 향해 맞추었다. 황하 유역에 이르러서는 수평기를 사용해 황하의 수위를 측정했다.
고전 과학에 대한 강희제의 애호는 취미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남순 때 황하의 역류 현상을 측정해 냈을 뿐만 아니라, 궁전에 자연과학 강연장을 마련해 구경(九卿)과 대학사(大學士)들에게 천문 역법, 산학(算學 산수), 악률(樂律)을 강의하고 학생을 선발해 흠천감(欽天監)에서 배우게 했다. 그는 황자(皇子)들에게 직접 서양 학문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도 그들을 가르치게 했다. 또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유클리드의 『기하원본』과 일부 의학 서적을 만주로 번역하라고 명했다. 이후 그는 부베 등의 건의에 따라 만주족 왕실 과학원인 ‘몽양재산학관(蒙養齋算學館)’을 설립해 과학 인재를 양성했으며, 셋째 황자 윤지(胤祉)에게 명하여 천문 지리에 관한 방대한 총서들을 편찬하게 했다.
서양 학문에 대한 강희제의 관심은 노년까지 지속되었다. 아래의 편지는 1717년 체코 예수회원 얀 카렐(중국 이름 엄가락嚴嘉樂)이 쓴 것이다.
“우리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린 후, 황제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명하시어 옥좌가 놓인 단 앞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단 앞에 이르러 막 무릎을 꿇자, 그는 다시 우리에게 직접 단 위로 올라와 보좌 앞 작은 탁자 곁에 꿇어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탁자 위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글자를 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산술과 기하학에 관한 각종 문제에 대해 대화했습니다. 이어서 황제께서 c-d-e-f 음계 하나를 부르시며 나더러 따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나의 하프시코드를 직접 퉁기시며 각종 음조에 관한 문제를 물으셨습니다. 마지막에 황제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저에게 은총을 베푸셨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의 방문이 나를 매우 즐겁게 하노라. 나는 전부터 좋은 음악가이자 동시에 훌륭한 수학자가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체코 예수회 선교사 얀 카렐이 옛 친구 츠비커에게 보낸 편지, 1717년)
중국인이 본 최초의 지구본
유럽의 예수회원들은 방대한 양의 서신을 남겼다. 이 편지들에는 그들이 신비한 오랜 국가에서 본 견문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이 서신들은 우리가 당시 동서양 문화 교류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1차 자료이다. 이 편지들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때로는 지극히 흥미롭고 때로는 비감에 젖게 하는 이야기들을 기록하며 당시 중화제국의 풍경을 충실히 묘사했다.
“그들은 자주 우리에게 유럽에도 도시가 있는지, 마을이 있는지, 집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지구본을 볼 때의 그 놀랍고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목격했는데, 정말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9명에서 10명 정도의 문인들이 나에게 지구본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위에서 중국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하는 그 반구가 자신들의 나라이며,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아메리카로 돌리는 것은 오히려 좀 크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일부러 그들을 교정해 주지 않다가, 그들 중 한 명이 지도에 표시된 문자와 지명을 설명해 달라고 했을 때 비로소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것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이곳이 페르시아, 이곳이 인도, 이곳이 타타르 지역입니다.'”
“‘그럼 중국은 어디 있소?’ 그들이 모두 외쳤습니다. 내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육지 안쪽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 경계입니다.’ 당시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국말을 내뱉었습니다. ‘너무 작군(小得很).'” (예수회 선교사 프랑수아 노엘 신부가 가스파르 카스테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708년, 강희제는 상유(上諭)를 내렸다.
“서토(西土 서양) 선교사들을 내몽골 각 부족과 중국 각 성으로 나누어 보내 산수와 성곽을 두루 살피게 하고, 서양 학문의 측량법을 사용하여 지도를 그리게 하라. 또한 부(部)의 신하들에게 명해 유능한 관원을 선발하여 수행하며 보살피게 하고… 각 성의 독부(督府) 장군들에게 통지하여 각 지방관이 모든 필요를 공급하게 하라.”
프랑스 예수회원 장바티스트 레지, 조아생 부베 등의 주도로 10여 명의 선교사와 만한(滿漢 만주족과 한족) 학자들이 전국 각 성으로 나뉘어 측량에 나섰다. 그들은 선진적인 삼각 측량 및 천문 측량법을 사용하여 10년의 공력을 들여 최초의 실지 조사 및 경위선이 그려진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皇嶼全覽圖)』를 그려냈다. 이 지도는 중국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 세계를 관찰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창춘원(暢春園) 밤의 소나타
세계 구석구석에서 전도하기 위해 예수회원들이 받은 교육은 엄격하면서도 다채로웠다. 강희제의 조정에 온 유럽 예수회원들은 천문물리학뿐만 아니라 그들 중 다수가 일류 음악가, 화가, 건축가이기도 했다. 강희제가 거주하는 창춘원(暢春園)에는 유럽 각국에서 선물한 피아노, 바이올린, 하프 등 각종 서양 악기가 놓여 있었다. 강희제는 이 악기들에 큰 관심을 보였고, 예수회원들에게 이 악기들의 연주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곧 멀리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는 중국 황제가 단순히 중국의 전통 악기인 사죽(絲竹 현악기와 목관악기)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서양 음악 연주에도 매우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학을 대할 때의 진지함과 전문성처럼, 강희제의 음악과 연극에 대한 관심에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면이 있었다.
음악을 사랑한 강희제는 토마스 페레이라를 궁중 수석 악사로 임명하고, 자주 그에게 어전에서 오르간과 클라비코드를 연주하게 했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 도미니크 파르냉은 플루트, 리코더, 해군 나팔을 연주하기도 했다. 토마스 페레이라, 테오도리코 페드리니 등은 궁중에서 황실 자제들과 후비(后妃)들에게 서양 악곡, 악리 및 서양 악기 연주법을 가르쳐 서양 음악이 청나라 궁중 생활의 일부가 되게 했다.
이들 예수회원은 직접 악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선교사 테오도리코 페드리니는 직접 바순을 만들었고, 프랑스 교사 장 프랑수아 푸케는 강희제를 위해 하프시코드와 팀파니를 제작했다. 포르투갈 선교사 토마스 페레이라는 거대한 오르간을 제작해 선무문(宣武門) 천주교당에 안치했는데, 이는 조정과 민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이 거대한 오르간은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놀라운 소리를 내며 온 성당을 뒤흔들었다.
페레이라는 또한 성당 종루에 자명종을 제작했는데, 종 위에 징을 장착하고 톱니바퀴로 작은 종과 연결해 중국 악곡(樂曲)을 연주하게 했다. 이 종은 경성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온 성의 백성과 선비, 관리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성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한 선교사는 거대 오르간과 이 자명종만 있으면 이 고대 국가의 백성들이 천주(天主)를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페르비스트(南懷仁)는 당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기발하고 정교한 설계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얼마나 광분하게 했는지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성당 앞 광장을 넘어선 넓은 거리에서도 이 혼란스럽고 밀려드는 인파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성당과 성당 앞 광장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특히 정해진 공휴일에는 매 시간마다 새로운 구경꾼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려왔습니다. 그들 중 절대다수가 이교도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으로 구세주(救世主)의 조각상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강희제 어전에서 연주하기 위해 음악에 정통한 예수회원들은 실내악단을 구성했다. 밤이 되면 꽃과 나무가 우거진 창춘원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정원에는 페드리니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나 아득한 실내악이 흘러나왔다. 선교사들이 유럽으로 보낸 편지에는 그들이 하프시코드, 플루트, 첼로, 바이올린, 바순으로 중국 황제를 위해 바로크 실내악 연주회를 열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때로는 강희제 역시 피아노 앞에 앉아 우아하게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강희제는 악기와 악리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예수회원들에게 황자들에게 악리를 가르치라고 명했다. 1714년 강희제의 직접 주도하에 페레이라, 페드리니 등이 『율려정의(律呂正義)』를 편찬 완료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전통 악률과 서양 악리 및 오선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방의 환상적인 정원: 원명원(圓明園)
1715년 강희제의 조정에 탁월한 예수회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이름 낭세녕郎世寧)가 나타났다. 그는 르네상스의 발원지인 이탈리아에서 왔다. 그의 붓 아래 중국 전통의 화조화(花鳥畫)와 준마도(駿馬圖)는 투시법의 정밀함과 풍부한 색채를 얻게 되었다. 젊은 화사(畫師)들은 서양의 투시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또 다른 눈으로 이 세상을 관찰했다.
건륭제 시대에 카스틸리오네는 천부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청 황실을 위해 『건륭대열도(乾隆大閱圖)』와 같은 기세 넘치는 역사 기록화와 여러 초상화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건륭제의 후비인 향비(香妃)의 초상화도 남겼다. 또한 후세에 전해지는 『백준도(百駿圖)』와 동서양 예술 양식을 결합하여 마치 투명한 깊이감이 느껴지는 화조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재능은 회화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 미셸 브누아(중국 이름 장우인蔣友仁), 장 드니 아티레(중국 이름 왕치성王致誠) 등과 함께 원명원 장춘원(長春園) 북부의 서양루(西洋樓) 건축군 건립에 참여했다. 이는 바로크 양식의 궁원 건축군으로, 완공까지 12년이 걸렸다. 하늘이 내린 동방의 신운(神韻) 덕분인지 이 건축군들은 하나하나가 고도의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브누아가 건립한 대수법(大水法 대형 분수시설)에서 뿜어 나오는 보석 같은 물줄기는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인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분수에 비견될 만했다. 두 개의 원형 계단이 둘러싸고 있는 안해당(宴海堂), 양 날개가 호형을 그리며 보랏빛 원광 유리 기와 지붕을 얹은 해기취(諧奇趣)는 상상력이 가득하여 마치 하늘 밖에서 날아온 듯했다.
해기취는 음악당으로, 만주족과 소수 민족의 음악 및 서양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었다. 조부인 강희제처럼 건륭제 역시 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소규모 서양 관현악단을 창설해 궁중 악사들에게 서양 악기를 배우게 하고 부정기적으로 연주하게 했다. 악기로는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 클라리넷, 현자(弦子 기타, 만돌린), 하프시코드 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동서양의 조화가 어우러진 이 환상적인 정원에는 화성적 대위가 돋보이는 천상의 소리 같은 서양 음악이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음악 속에 해기취 앞의 대수법에서는 하얀 보석 같은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사람을 취하게 했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 꽃신을 신은 궁녀들이 허리를 굽혀 구리로 만든 양과 기러기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물꽃을 손으로 떠 얼굴에 두드리곤 했다. 호금(胡琴)이나 태평소 소리에 익숙했던 그들의 귀에 이 서양 음악은 다소 기이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밤이 되어 원명원의 수천 개 등불이 꺼지고 분수도 조용해지면, 오직 유럽에서 온 자명종만이 제시간에 작은 문을 열고 둥글게 회전하는 작은 인형들을 내보냈다. 인형들이 두드리는 둥둥거리는 금속음만이 정원의 정적을 깨뜨렸다.
문명 고국의 기독교인들

《예수회 규칙을 통과하는 벽화》 (퍼블릭 도메인)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사절들은 중국에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 예수회원이 중화제국에 새긴 가장 깊은 각인은 과학도 예술도 아닌 바로 기독교였다.
1692년, 강희제는 천주교 칙령을 공포해 백성들이 입교하는 것을 허락했다. 강희대제의 지지 아래 각지에 성당이 세워졌고 예수회원들은 각 성으로 멀리 전교하러 나갔다. 점차 이 고대 국가에서 사람들은 이 서양인의 교파에 귀의해 푸른 눈과 노란 수염을 가진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만주어와 한문으로 번역된 두꺼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청 황족 중에서도 일부 친왕들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강희제 중기에 이르러 청 제국에는 약 3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나폴리 항을 떠나던 날부터 이 독실한 예수회원들은 인생에서 가장 신비로운 장을 시작했다. 그 신비한 고대 대륙에서 그들이 이룬 성취는 아마도 당초 자신들이 바라고 생각했던 바를 뛰어넘었을 것이다. 만약 이 선교사들이 남긴 사적이 우리가 위에서 진술한 내용에만 그쳤다 하더라도 충분히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창조한 역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곧 우리는 태양왕의 사절들이 한 일이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성취한 것은 훨씬 더 기묘한 사업이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5/12/8/n4591334.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