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아(茹雅)
【정견망】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직한 선비들이 소인(小人)을 깊이 증오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증오심 때문에 종종 언행 중에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치게 되고, 이로 인해 교란이나 심지어 박해를 초래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어른들은 늘 “차라리 군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결코 소인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과연 틀린 말이 아니다.
청대(淸代) 왕영빈(王永彬)이 지은 수신서 《위로야화(圍爐夜話)》에 이런 말이 나온다.
“군자가 소인을 대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대해야 하며, 조금도 격하거나 급한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대략적인 뜻은 이러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비록 자신에게 아무런 과오가 없을지라도, 소인은 그를 용납하지 못할 수 있다. 이로 보아 군자가 소인을 대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대해야 하며, 감정이 격해지거나 급하게 꾸짖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일을 할 때는 마땅히 이성에 입각해야지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개에게 한 번 물리고서 똑같이 개를 물어뜯을 것인가?” 만약 정말 그렇게 한다면 자신 또한 개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두 마리의 개’가 될 뿐이다.
만약 소인의 악행 때문에 자신 또한 원한과 쟁투, 자제력을 잃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군자는 소인에게 동화되어 본연의 덕행을 잃어버리게 된다.
고인(古人)이 군자더러 소인을 선대(善待)하라고 일깨운 것은, 사실 군자 자신을 보호하여 소인의 행위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소인과 지낼 때는 평온함과 절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군자가 소인을 선대하는 것은 굴복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나약한 것도 아니다. 상대방에게 이끌리지 않고, 상대방의 저열함 때문에 자신까지 저열해지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자의 풍모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9강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말하는데 그것은 나약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속인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 문화 층차(層次)가 높은 사람들도 함양(涵養)을 말하며 남과 견식을 같이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연공인(煉功人)임에랴? 그것이 어찌 나약한 것이겠는가? 그것은 대인지심(大忍之心)의 체현이고, 그것은 견강한 의지의 체현으로서, 오로지 연공인만이 이런 대인지심이 있을 수 있다고 나는 말한다.”
사실 진정한 양보와 인내는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일종의 경계(境界)이며, 스스로를 단속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강력한 힘이다.
만약 왕년의 한신(韓信)이 《수호전》의 양지(楊志)처럼 충동적이어서 한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무뢰한을 죽였다면, 어찌 훗날 대한성세(大漢盛世)의 치적이 있었겠는가?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면 ‘소인을 선대하는 것’의 중요한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소인을 선대한다는 것이 그들의 악행을 못 본 척 방치하라는 뜻은 아니다. 진정으로 법률을 위반한 사람은 자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소인을 선대하는 것은 소인을 방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군자 자신이 오염되지 않기 위함이며, 악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선(善)을 지키기 위함이다.
대법제자라면 마당히 법(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자비와 선량을 유지해야 하고 소인에게도 역시 그래야 한다. 이는 방종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니며, 진정으로 자비와 선념(善念)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지난 수년간 대법제자들이 진상을 알릴 때 바로 이렇게 해왔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이러한 방식이라야 진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그 효과 또한 매우 훌륭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7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