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여요(汝窯) 청자연화식온완(青瓷蓮花式溫碗)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송대(宋代) 자기의 아름다움은 종종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요함이 깊은 곳에 이른 청초한 화려함이다. 여요(汝窯 역주: 송대 5개 가마 중 하나)는 비가 지나간 후의 하늘빛(雨過天青) 같아서 마치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진 후의 맑은 하늘 같고, 관요(官窯)는 함축적이고 단정하며 유약의 색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마치 우아한 군자의 옷소매 사이로 부는 맑은 바람 같다. 가요(哥窯 송대 5대 가마 중 하나)는 유약의 갈라진 금이 얼음이 깨진 듯하고 또 세월이 기물 위에 남긴 잔주름 같으며, 정요(定窯)는 눈처럼 깨끗하고 하얗고, 균요(鈞窯)는 노을빛이 유약에 들어간 듯하여 마치 하나의 화로 불 속에서 천지의 구름 기운을 구워낸 듯하다.
이러한 자기들은 그곳에 놓여 있어도 시끄럽지 않으며 저절로 풍골(風骨)이 있다. 그것들의 아름다움은 표면에 떠 있는 화려함이 아니라 흙, 유약의 색, 화후(火候 불 조절)과 세월 속에서서서히 생겨난 것이다. 송대 자기를 조용히 바라보노라면 마치 안개 비가 내려 자욱하고 달빛이 품에 들어오는 듯하며, 또한 송대 문인아사(文人雅士)들이 창가에서 차를 음미하고 향을 피우며 책을 펼친 채 청풍명월 속에서 천지의 맑은 기운을 체험하는 듯하다. 그리고 가마 불 깊은 곳에서는 그 한 움큼의 흙이 또한 하나의 소리 없는 탈바꿈을 겪고 있다.
한 움큼의 흙은 원래 대지 깊은 곳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은 눈에 띄지 않고 귀중하지 않으며 광택도 없었다. 바람이 불면 그것은 단지 먼지일 뿐이고, 비가 내리면 그것은 단지 진흙일 뿐이다. 만약 줄곧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단지 흙일 뿐이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훗날 옥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광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에 의해 흙 속에서 꺼내졌을 때, 변화가 시작되었다.
자기를 만들려면 먼저 흙을 골라야 한다. 모든 진흙이 자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흙이 불을 견뎌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그릇을 이룰 수 있는 진흙은 왕왕 일구어 씻고(淘洗), 침전시키고, 반죽하여, 잡질을 조금씩 제거하고 거친 것을 조금씩 녹여내야 한다. 겉보기에는 반복적이고 자질구레한 이런 공정들이 바로 훗날 그릇을 이루기 위한 근간을 다지는 것이다.
진흙이 만약 깨끗하지 않으면 불에 들어가 곧 터지고, 마음이 만약 안정되지 않으면 일을 겪을 때 곧 어지러워진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겉보기에 성공과 실패가 일순간에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일찍이 평소 연마 속에서 이미 근기(根基)를 묻어둔 것이다.
흙으로 만든 기물의 형태가 이루어진 후에도 또 다듬는 과정(修坯)을 거쳐야 한다. 불필요한 부분은 깎아내야 하고 고르지 않은 부분은 갈아내야 하며 두께가 균일하지 않은 곳은 조정해야 한다. 한 기물의 기운과 운치는 외형의 단정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균형에도 있다. 너무 얇으면 견뎌내지 못하고, 너무 두꺼우면 영롱한 빼어남(靈秀)을 잃어버린다. 사람도 이와 같다. 세월이 한 칼 한 칼 사람의 들뜸, 모난 모서리, 허영과 방종을 깎아내어,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픔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억울함을 느끼게 하지만, 바로 이러한 다듬음 속에서 생명은 비로소 점차 분수(分寸)가 생기고 기품이 생기게 된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역시 가마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瓷器)가 자기가 되는 까닭은 그것에 아름다운 유약의 색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것에 정교한 문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불을 거쳤기 때문이다. 맹렬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가마의 온도가 조금씩 높아지면 흙 배체(초벌구이 하기 전의 날그릇)는 고온 속에서 수축하고 단단해지며 변화한다. 그 순간 그것은 이미 뒤돌아설 수 없다. 불이 만약 미치지 못하면 진흙은 여전히 진흙이고, 불이 만약 너무 급하면 기물은 곧 갈라진다. 오직 알맞은 맹렬한 불 속에서라야 그것은 비로소 진흙에서 자기로의 탈바꿈을 완성할 수 있다.
인생의 많은 순간도 가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저 곤경, 압박, 오해, 고독, 시달림(煎熬)은 겉보기에 한 사람을 불태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또 한 사람을 성취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불의 시험이 없다면 사람은 자신이 견고한지 알기 어렵고, 어려움의 단련이 없다면 사람도 진정으로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오래 지속되는 광택을 내기 어렵다.
자기가 가마에서 나올 때 종종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한다. 과거에 한갓 어두웠던 흙이 뜻밖에도 영롱하고 윤택하며(瑩潤), 깨끗하고 단단하며 빛이 있게 변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느슨한 진흙이 아니어서 손가는 대로 쥘 수 없고 물을 만나도 곧 흩어지지 않으며, 도리어 자신만의 형태가 있고 자신만의 골격이 생겨 맑은 물, 꽃가지, 차 향기와 세월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의 도량(器量)이 있게 된다.
이것이 어쩌면 바로 자기가 가장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일 것이다. 그것의 아름다움은 풍상을 겪지 않은 요염하고 연약함이 아니라 맹렬한 불을 거친 후의 청초하고 화려함이며, 그것의 귀중함은 외표의 정치함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이미 하나의 깊은 전화(轉化)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약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쉽게 성취되는 것이 거의 없음을.
찻잎은 끓는 물 속에서 펼쳐져야 하고,
먹은 연기와 먼지 및 만 번의 두드림 속에서 색을 이루어야 하며,
자기 또한 맹렬한 불 속에서 환골탈태해야 한다.
생명의 제고는 흔히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릇 사람을 더욱 순정하고 더욱 강인하며 더욱 너그럽고 두텁게 변하게 만들 수 있는 경험은 모두 단지 고난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 다른 종류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생명 속의 맹렬한 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불은 진흙의 성질을 태워 없애고 있으며 또한 풍골을 구워내고 있고, 불은 날그릇을 시험하고 있으며 또한 광채를 성취하고 있다. 언젠가 날이 되어 돌이켜볼 때에야 어쩌면 비로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각들이 우리를 훼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워내어 한 점의 더 좋은 기물로 만들고 있었음을 말이다.
진흙이 가마에 들어가 맹렬한 불에 자기를 이루고, 인생은 단련을 거쳐야 바야흐로 본연의 참됨(本真)을 보게 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3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