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어(夏語)
【정견망】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上不怨天,下不尤人)”는 말은 마치 민간의 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 유가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구하지 않으면 원망이 없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上不怨天,下不尤人).”
대략적인 뜻은 이러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언행을 바르게 하고 모든 일을 안으로 반성할 뿐 다른 사람이 자신의 뜻에 맞춰주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원망이 생기지 않는다. 어떤 처우를 만나든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 일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해내기는 매우 어렵다. 인생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곤경을 만나고 고립무원의 느낌이 들 때, 사람들은 흔히 고통의 원인을 운명이나 타인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는 마음을 싹틔우곤 한다.
예전에 어떤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한 농부가 천재(天災 하늘이 내리는 재앙)를 만나 곡식을 한 톨도 거두지 못한 데다가 채권자들에게 거듭 독촉을 받자,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여겨 감히 하늘을 향해 눈이 없다고 욕하며 하늘은 부자들만의 하늘이라고 소리쳤다.
비슷한 상황은 고대에도 물론 존재했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오늘의 영상 작품들은 어째서 이런 플롯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현대 사회가 무신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명(神明)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선악에 보응이 있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비록 고난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감히 함부로 하늘을 범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불행을 천의(天意)가 불공평한 탓으로 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은 정말로 하늘이 불공평해서 생기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민간에 전해지는 ‘백씨랑(白氏郞)’ 이야기가 바로 이 도리를 잘 설명해 준다. 백씨랑의 어머니는 오랜 세월 다른 이들에게 업신여김과 괴롭힘을 당했고, 마음속에는 강한 원망이 점차 쌓여갔다. 그녀는 일찍이 조왕신(灶神)을 향해 독한 마음을 품고 말했다.
“만약 언젠가 내 아들이 황제가 된다면 반드시 ‘일천 집안을 죽이고, 일만 집안을 죽이겠다’”결국 이 원한으로 가득 찬 말은 하늘에 알려지게 되었고, 원래 제왕이 될 백씨랑의 운명도 이로 인해 깎여버렸다.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도리에 따르면, 하늘이 본래 그녀에게 고난을 겪게 한 것은 평범한 백성들이 살아가는 어려움을 체감하게 하려 함이었다. 훗날 아들이 황제가 된다면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이를 불쌍히 여기며 어질고 덕이 있는 군주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난 속에서 선념(善念)을 싹틔우기는커녕 오히려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했으며, 심지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보복하겠다는 악념(惡念)까지 품었고, 결국 아들로 하여금 마땅히 가졌어야 할 복록을 잃게 만들었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스위스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속인은 부처가 그로 하여금 속인 중에서 복을 누리게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가 그에게 慈悲(츠뻬이)를 베풀고, 신이 그에게 慈悲(츠뻬이)를 베풀었다고 여긴다. 반대로 그가 고생을 하면 그는, ‘아이고,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돌보지 않는가? 나는 실의에 빠진 사람인데!’ 하고 하늘과 땅을 원망한다. 하느님은 오히려 당신을 돌보면서 당신에게 업을 갚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은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慈悲(츠뻬이)이다.”
사람들은 흔히 당장의 안일(安逸)을 하늘이 돌보시는 것이라 여기지만, 일시적인 고난은 운명이 불공평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더 높은 층차에서 바라보면 고난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며, 안일이 곧 진정한 복도 아니다. 어떤 시련은 아마도 하나의 생명이 업채(業債 업의 빚)를 갚고 심지(心志)를 단련하여, 진정으로 아름다운 경지로 돌아갈 기회를 얻도록 돕는 과정일 수 있다.
생명에 대한 하늘의 안배에는 저마다의 인연이 있는 것이지, 결코 무연코 어떤 특정한 사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고난 속에서 끊임없이 원망과 증오를 싹틔우고 심지어 무고한 사람을 해치려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본래 가지고 있던 복마저 잃게 만든다. 백씨랑의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가 일시적인 원한 때문에 아들을 연루시켜 제왕의 명을 잃게 만들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맹자가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이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빈궁하게 만들며, 그 행하는 바를 어지럽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중대한 사명을 맡기려 할 때면 흔히 먼저 그의 의지를 단련하여 노고와 기아, 빈곤과 좌절을 겪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고의로 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시험하고 성취시켜, 중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품격과 능력을 갖추게 하려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이 도리를 알았기에 역경에 처할 때면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자신을 돌아보고 원인을 찾음(反求諸己)을 자주 강조했다. 그들은 인생의 득실에는 저마다 인연이 있으며 고난 속에도 하늘의 선한 뜻이 담겨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비록 곤경에 처할지라도 내면의 평화와 선념을 굳게 지키려 애썼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신명(神明)을 믿지 않고 천리(天理)를 경외하지 않으며 선악의 보응을 믿지 않게 될 때,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일을 운명이나 사회, 혹은 타인의 탓으로 돌리기가 더욱 쉬워진다. 물론 고대에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사람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의연하게 시련을 마주하는 사람이 존재하므로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천지신명에 대한 경외심은 진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곤경 속에서 자신을 단속하고 원망이 한없이 커지지 않도록 일깨워줄 수 있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이 고난 앞에서 소극적으로 참기만 해야 한다거나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일깨워준다.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반성하며, 바꿀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바꿀 수 없는 일 앞에서는 선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 언제나 순풍에 돛을 단 듯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역경 속에서도 여전히 선악의 보응을 믿고, 일시적인 불공평 때문에 이지(理智)를 잃지 않으며, 눈앞의 고난 때문에 증오를 싹틔우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낼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수양이며, 한 사람이 운명 앞에서 마땅히 지녀야 할 청성과 지혜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