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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따파 인류도덕의 회복과 승화 이끌어

작자:천인(川人)

【정견망 2006년 12월 17일】 곧 다가올 성탄절과 새해를 눈앞에 두고 인류가 지난 2천여 년 동안 지나온 온갖 풍상을 회상해보면 한편으로는 비통하면서도 수많은 어려움에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수 없다. 무수히 마음을 졸이고 시달림을 받는 중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신앙을 지켜왔다. 수많은 춥고 배고픈 압박 하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여명이 도래하길 기대해왔으며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우리 인류는 생명의 고귀함에 대해 보다 명백해졌다. 지금의 번잡하고 복잡하며 물욕(物慾)이 횡행하는 현대물질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각종 수단과 방식을 통해 재산을 갈망하며 추구하고 보다 많은 재산이 자신의 미래에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어떤 사람은 마침 추구하지 않는 중에서 즐거운 시간과 즐거운 생활을 보내면서 일체를 모두 잊어버렸다. 보다 많은 사람들은 도리어 하루 세끼 밥을 먹기 위해 분주하며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몹시 바쁜 대천(大千) 세계 속에서 또 일부 사람들은 도리어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인 기초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이상과 신앙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이 단체의 부상은 마침 인류 도덕의 회복과 문명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 일체는 바로 그들의 비범하고 탈속한 정신역량에 근원하는 것으로 그들의 이념은 장차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1.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탐색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고통과 무료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 우리는 고통스럽다고 느끼며, 욕망을 만족할 때도 우리는 무료함을 느낀다. 사람은 바로 고통과 무료함 속에서 배회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이 명언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탐색과 추구가 아무리 해도 실현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찾을 수 없는 인생답안의 어쩔 수 없음에서 출발하여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곤혹과 길을 잃은 느낌을 말한 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여전히 영원한 미혹이며 우리 일반적인 속인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생에 대해 곧 이렇다고 여긴다. 우리는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 모르고 또 장차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더욱이 우리의 운명이 어떤지 모르지 않는가? 우리 인류는 마치 지구에 수감된 생명처럼 우주의 다른 생명들과의 모든 연계를 상실 당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서로 미칠 듯이 기뻐하거나 서로 위로하며 서로 싸우고 있다. 투쟁과 분망함, 기쁨 속에서 우리의 경박함, 우리 서로간의 시끄러움은 우리 인류 자신의 고독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이런 고독은 자못 일종 “매미가 우니 숲은 더욱 고요하고 새가 우니 산은 더욱 그윽함”을 느끼게 한다.

고독과 적막 속에서 나는 역사적인 자료를 두루 살펴보고 자못 위안을 얻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역사는 늘 반복적으로 흥망성쇠,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인연에 따라 사라지는 한 막 한 막을 연출해 왔으며 역사의 법칙은 마치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 같지 않은가? 노자가 함곡관에서 총총히 《5천자》를 남기고 떠난 것을 보고 중국 고대의 무수한 사람들이 인생의 최고 경지를 추구했으며 진리를 추구하여 일생의 정력 및 심지어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하늘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왜 태어났는가?” 망망한 우주를 보면 인류가 거주하는 지구는 마치 한 알의 먼지와도 같아 갑자기 인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느끼게 된다. 이 호한(浩澣)한 우주 중에서 인류는 여전히 인류생명과 유사한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바 이는 인류의 고독과 적막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아울러 답안을 얻을 수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더욱 자극한다.

바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추구에서 출발하여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각기 다른 방식을 채용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바퀴 우회한 후에 비록 길은 다르지만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생의 목적을 탐구하는 이 과제에 있어서 많은 철학자, 성인(聖人), 심지어 대과학자들은 자신의 사고력과 통찰력에 근거해 이 문제의 답안을 신학(神學)으로 귀결시키지 않은 이가 없다. 즉, 일종 초자연적인 힘이 이 우주의 일체를 주재하고 있는바 인류는 그를 “신(神)”이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비로소 뉴턴, 아인슈타인 등 대과학자들도 결국에는 기독교를 신앙하는 일이 나타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고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는 것은 그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신의 역량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력(神力)은 현존의 과학으로는 탐구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해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류 문명은 역대로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왔지만 지금 사람의 사유는 아주 성숙되어 타당한 이유나 설득력이 없다면 단연코 신앙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객관적인 각도에서 본다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거나 신앙하는가 여부에 따라, 혹은 우리가 탐측하고 감지할 수 있는가 여부에 따라, 또한 우리의 사유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소실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신(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는 우리가 탐측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가 여부에 따라 개변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많은 의문과 의혹에 대해 파룬따파의 《전법륜》 책에서는 원만한 해석을 해주고 있다. 그는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믿게 하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신력(神力)의 진실한 존재를 감수할 수 있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전법륜》 책을 읽을 때 곧 일종 강렬한 감각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감각은 알 수 없는 격동,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고자 했던 책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왜 지금 매우 많은 지식인들이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있는가 하는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파룬따파 속에서 자신의 추구하던 목표를 찾을 수 있었고 인생의 일련의 답안을 찾을 수 있었으며 실제 수련을 통해 신력의 거대함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파룬따파의 법리와 펼쳐 나온 신력이 그들을 설복시킨 것으로 그들이야 말로 신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2. 파룬따파 생명의 각성을 환기

파룬따파의 법리는 투철하고 명석하며 펼쳐져 나온 신력은 사람을 놀라게 하며 미혹의 인생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비로소 무수한 유식한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차라리 수많은 저급한 관념, 사상, 나쁜 습관을 버리고 심지어 목숨을 걸고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진리와 최고의 경지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련을 통해 금연, 금주를 했으며 어떤 사람은 오래된 나쁜 습관을 고쳐버릴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수련을 통해 개인 이익의 충돌이 있을 때 의연하게 이익 다툼을 포기할 수 있었으며, 모순이 닥쳐왔을 때 우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찾는 것으로 밖을 향해 미루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왜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은 사상과 행동에서 이렇게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는 모두 그들이 각성한 생명으로 인생의 목표와 인생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때문에 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동시에 신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는 동시에 그들이 신의 존재를 깊이 감지하고 신력의 존재를 깊이 감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룬따파 수련생 중에 일부 사람들은 일찍이 심한 병을 앓거나 심지어 난치병을 앓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파룬따파 수련을 한 후 건강상태가 뚜렷하게 좋아졌으며 정신상태도 분명히 개선되었다. 사유도 이전에 비해 보다 넓어지고 민첩해졌다. 신체적인 개선에 대해 말하자면 직접 경험한 수련생들은 깊은 체험이 있다. 필자의 어머님도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에 원래 있던 여러 가지 고질병이 좋아졌고 몸 상태도 줄곧 아주 양호하다. 어머니는 수련을 하고 한 후 8년 동안 병이 생긴 적이 없으며 사상과 도덕수준도 분명히 좋아졌으며 사유도 이전보다 민첩하고 넓어져 나로서는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파룬따파는 어머니를 개변시켰다. 어머니는 건강한 신체와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셨으며 바로 이런 자애(慈愛)는 줄곧 나로 하여금 깊은 영향을 받게 했다.

어떤 때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본다. “왜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렇게 큰 변화가 나타났어요? 왜 다투거나 고집을 피우거나 그 흔한 말다툼마저 사라지셨어요? 왜 일을 할 때면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나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바로 내가 수련인으로 각성한 생명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이렇게 무의식중에 파룬따파의 《전법륜》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3. 파룬따파, 인류도덕의 회복과 승화 촉진

파룬따파는 인생의 일련의 문제들 즉, 어디에서 왔으며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인생의 목적과 의미), 장래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모두 답하고 있다. 아울러 이런 문제들이 수련자의 실제 수련 중에서 점차적으로 실증될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1억 명의 수련인들이 파룬따파를 수련하게 된 것이다.

마치 “사람은 통상 무지 하에서 잘못을 저지른다.”고 한 철학자의 말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란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깊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면서 잘못을 범하는 사람은 아주 적으며 이는 우리 인류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관점이 협애함으로 말미암아 이익의 충돌 앞에서 이지(理智)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비로소 인류는 두 차례 세계 대전이 폭발하게 되었다. 우리가 냉정하게 이 시기 인류의 역사를 반성해볼 때 우리는 인종과 국가 간의 모순이 세계대전을 통해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과 무력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며 전쟁의 가장 큰 작용은 바로 인종이나 국가 간의 원한을 발산하는데 있는바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유일한 작용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순과 이익의 충돌 중에서 우리는 늘 반복적으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보다 나은 관점과 사유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순에 직면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의 절실한 이익을 침범할 때 일종 “이에는 이”로 대응하려는 심태를 품고 대하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하게 이렇게 하는 것의 결과와 효과를 고려해보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 세계는 이익과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복잡하게 변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많은 이익집단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인류의 공통적인 도덕표준과 규범을 버렸고 사람됨의 기본원칙을 저버렸다. 더욱 심한 자는 자신의 이익을 장기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우민(愚民)교육”을 실행한다. 백성들에게 통치자의 의지대로 “세뇌”를 진행하며 우민(愚民)의 방식으로 이익단체와 폭정의 존재를 유지한다. 일부 이익단체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이 도덕과 정의를 선양할 때 자신들의 이익을 침범한다고 여기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허용하지 않을 때는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자행하거나 심지어 해당 단체에 대해 집단학살과 생체장기 적출이라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중공 폭력정권은 바로 이런 이익단체의 전형이다.) 이런 사악한 세력과 이익단체의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면 인류의 도덕과 양심에 대한 공격이며 인성(人性)을 말살하는 것으로 인류 사회의 안정에 극히 나쁜 영향을 끼친다.

바로 이런 세력과 이익단체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의 기득이익을 지키기 위해 인류의 공동적인 도덕관념과 준칙을 포기하고 때문에 지금 인류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문제 속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영원히 헛수고에 불과하다. 인류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도덕의 회복과 승화를 제창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파룬따파가 세계에 널리 전해진 것은 인류도덕의 회복과 승화에 지름길을 제공한 것이다. 파룬따파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들은 파룬따파는 단결이 잘되고 아주 박애한 단체임을 알고 있다. 이 단체 속에서 당신은 따스함, 화목하고 상화(祥和)로운 분위기로 충만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일체 표상은 모두 끊임없이 자신의 도덕수준을 제고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파룬따파의 “진선인(眞善忍)” 원칙은 인류 사회의 화목에 아주 좋은 준칙과 전형적인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파룬따파 수련인은 “진선인”을 준칙으로 끊임없이 도덕수준의 제고를 요구하며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사상은 인류사회의 화목과 번영에 아주 좋은 모범을 제공한다.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신앙하는 사람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파룬따파는 인류 도덕수준의 회복과 승화에 거대한 작용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4. 도덕 회복과 승화의 의미
파룬따파 수련생은 끊임없이 자신의 도덕수준을 제고하는 동시에 사회의 다른 곳과는 완전히 다른 한 가지 측면이 있다. 바로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오면서 도덕수준은 급속히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바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각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테러리즘, 핵 위기, 마약, 폭력 숭배, 사회 치안 악화, 종교 간의 충돌 등. 우리가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면 이 문제들의 내원은 주로 3가지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익, 욕망과 일종 착오적인 지도사상(증오를 유발하는 사상)이다. 바로 이 3가지 요소에 의해 인류사회에는 속수무책의 문제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발칸반도와 중동 지역은 줄곧 세계의 화약고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도 발칸문제였고 지금 종교적인 극단주의, 테러리즘은 여전히 중동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두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대로 전란(戰亂)이 끊이지 않고 발생해왔다. 더욱이 중동 지역의 충돌은 마치 종교 간의 충돌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익과 원한 및 일종 착오적인 사상이 겹친 것이다. 지금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폭력과 테러 증오의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으며 민중들은 안전감이라곤 조금도 없다. 오늘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당장 무슨 일이 발생할 지 예측할 수 없다. 인종, 종교, 이익의 충돌 속에서 각자 추호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여전히 서로 상대방의 잘못만을 비난하고 자신의 부족을 반성하지 않는다. 가령 중동 지역 민중들이 파룬따파의 포용하고 이해하면서 안으로 자신의 잘못을 찾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이 지역의 일체 모순도 해결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투쟁, 살인, 서로 해치고 공격하고 복수하며 심지어 전쟁하는 것을 보아왔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감정을 발산시킨 후에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도리어 더욱 복잡하게 악화된 것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류도덕이 보편적으로 승화할 객관적인 요구이다. 만약 우리 매 사람이 모두 큰 흉금을 갖고 모두 포용하는 마음이 있으며 모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습관을 지니며 모두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상을 지닌다면 그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파룬따파를 수련함에 따라 파룬따파의 “진선인”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인류 도덕수준도 점차적으로 되돌아 승화되어 인류 사회의 많은 사회 문제들이 인류 도덕수준의 승화에 따라 총체적으로 근본적인 해결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파룬따파는 바로 인류 도덕수준을 회복하고 승화시키는 동시에 “진선인”이념은 인류에게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며 협력하는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는 또한 인류에게 광명(光明)하고 상화(祥和)로운 길을 개척해주는 것이다.

발표시간 : 2006년 12월 17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6/12/17/414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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