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
[정견망] 11. 압송되는 도중에 북경으로 도망치다.
우리 시에 소속된 사람은 우리 시가 있는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4사람이었는데 여자 3명, 남자 1명이었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나이가 30쯤되었다. 우리 4명은 수용소 1층에 있는 방에 구속되었고 밖에서 경찰이 지켰다. 남자는 지방에서 왔고 우리 여자들은 모두 시내에서 왔다. 이때 한 동수가 자신은 도망가겠다고 하여 모두 동감하였으나 그 남자만은 도망치려하지 않았다. 이때 다른 지방의 책임자 두 사람(한사람은 30대이고 다른 사람은 60대였다)이 남자 수련생을 찾으러 왔다. 마침 우리들을 지키고 있던 경찰이 누가 청한다는 전화를 받고 40대의 경찰 둘은 밥 먹으로 가고 20대의 젊은 경찰만 남아 우리를 계속 지켰다. 우리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젊은이는 우리에게 “당신들 사부님은 당신들 같은 제자들이 있어 정말 자랑스럽고 훌륭한 분이야!”라고 하면서 그는 방에 들어와 의자를 문 앞에 놓았다. 이렇게 하면 그는 우리의 도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우리는 그에게 홍법을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갑자기 전화가 왔다고 받으라고 그를 불렀다. 그가 가자마자 이것을 본 그 여자 동수는 창문을 열고 재빠르게 창문에서 뛰어나갔다.
그 경찰은 전화를 받고 돌아와 방안에 한 사람 없는 것을 알고 창문이 열린 상황을 보자마자 뛰어나갔다. 나는 다른 동수와 화장실 가는 틈을 타서 같이 도망가는 것을 합의하였다. 나는 “그럼 빨리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기회를 잃어요”라고 말하면서 재빠르게 화장실을 떠났고 그녀도 창문으로 도망쳤다. 나는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는데 이 때 남자 동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남자 동수를 남겨두고 따라오지 못하였다. 나는 줄곧 복도로 향하여 뛰어서 창문이 열린 것을 보고는 창문으로 뛰어나가서 창문을 닫았다. 나는 앞으로 얼마 달리지 않아 한 시공현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현장 담 밑은 세면자루로 싸여있었다. 나는 여기서 처음에 도망쳐 나온 동수를 보고서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뛰어 내렸다.
나는 좀 기다렸으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마침 이때 삼륜차가 지나가 그 차를 타고 그 곳을 먼저 벗어난 후에 택시를 갈아타고 기차역으로 이동하였다.
나는 경찰이 기차역에 와서 수색할 염려가 있어 몸에 돈도 200원(택시 비용이 150원이고 50원으로 북경 가는 기차표를 사지 못함) 밖에 없는 상황이라 목적지가 도착하지 전에 택시에서(기사는 130원 밖에 가지지 않았음) 내렸다. 나는 차멀미가 점점 심하여 차에서 내리고는 옥수수 밭으로 들어갔다. 밭에서 한참 걸었으나 갑갑하고 덥고 차멀미까지 하여 옥수수 밭을 벗어나 길에 들어섰다.
길에서 경찰 차 한대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난 한 음식점에 들어서 빵과 물을 사서 음식점 계단에 앉아서 먹기 시작하였다. 자전거가 한 대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길 옆에 자전거 수리하는 노인에게 중고 자전거 한 대를 주문하였다. “얼마짜리를 원하지요?”라고 그는 물었다. “50원이 넘으면 않되요”라고 나는 답하였다. “저 여기에 중고 3대 있는데 좋은 것으로 골라 드리지요”라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이렇게 돈 50원을 써서 자전거 한 대를 사 길을 계속가게 되었다. 남은 돈으로(1원) 밥과 물을 사서 자전거 뒤에 걸고 북경 가는 길에 나섰다.
나는 고속도로에 적혀있는 표지판대로 자전거를 계속 몰았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지났고 고속도로에 차가 적어지도록 심야까지 계속 자전거를 몰았다. 나는 그저 자전거를 무의식적으로 몰고 있었고 밤은 점점 깊어가 고속도로에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들었다. 만약 옆에 동수가 동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얼마 간지도 모르고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하여 때때로 표지판을 보면서 가는 길을 계속하였다. 나는 땅바닥에 있는 비닐자루를 보면서 한 숨 잤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자전거를 계속 몰았다. 앞으로 한동안 갔지만 너무 고단하고 힘들며 배가 고파 갈 길을 멈추고 길옆에서 쉬었다. 비닐자루는 난대간대 없어지고 물도 어디서 떨어졌는지 없어져 잘 수밖에 없었다. 동북의 가을철 날씨는 춥고 바람까지 불어 땅바닥에 누워 있던 나는 온 몸이 추위에 못 이겨 전에 있던 비닐자루가 생각나 다시 찾아와 위에 있는 흙을 털고 몸에 덥고 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위 때문에 잠에서 깨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을 계속하였다. 날을 아직 새지 않아 깜깜하였고 길에는 나밖에 있어 외로움과 추위가 나로 하여금 좀 무섭다는 감이 들게 하였다. 나는 다시 길옆에 있는 도랑에 몸을 피하여 잠을 잤고 얼마 지난 후에 날이 센 것을 보고 가는 길을 계속하였다.
길에서 가는 사람들은 두터운 옷을 입고 있었으나 반팔과 치마를 입은 나는 초가을의 아침에 춥다는 감을 느꼈다. 길을 걷는 사람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길을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앞에 길을 다시 깔고 있는 사람을 물으니 더 이상 앞으로 가면 벌금을 내여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길옆에 과수원에 주인이 물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 북경은 어떻게 가는가 길을 물었더니 답하기를 202호 국도를 가여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럼 202호 국도는 어떻게 가야 하는가 물으려고 하자 그 사람은 가버렸다. 나는 어제 저녁에 다리에 묻은 흙을 물에 씻고 주운 페트병에 물을 채우고 길을 나섰다. 내가 어디로 갈까 갈피를 잡지 못하였을 때 나를 돕는 사람이 왔다. 나는 길가는 노인을 잡고 “할아버지, 202호 국도는 어떻게 가지요?”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따라오려무나. 나는 거기서 장사하지”라고 하며 늠름하게 말하였다. 과수원을 지나면 바로 202호 국도였다. 나는 서쪽을 향하여 한참 지나서 너무 춥고 배고파서 상점에 들어가 8원 하는 바지와 12원하는 쪼기를 사자 남은 돈이 10원 밖에 되지 않았고 북경과의 거리는 1000km나 남았다.
진황도 시에 도착할 때는 이미 오후였다. 길에서 나는 큰 비닐을 주워 너무 피곤하여 길옆에 있는 큰 도랑에서 그 비닐을 깔고 잠이 들었다. 깨어서 자전거를 타자 손목이 아파서 무엇이든지 만지지 못할 것처럼 느꼈다. 나는 억지로 고통을 참으면서 북경으로 가는 길을 계속하면서 속으로 “앞으로 모든 고통과 아픔을 참으면서 앞으로 가야한다. 꼭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어떠한 아픔도 참아야한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격려하였다. 길에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오직 각종 차량이 통과하는 것을 보였으며 가끔 경찰차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도대체 얼마 더가야 북경에 도착할 수 있는가? 차를 잡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였다. 북대하 시에 접근하였을 때 이미 300km를 자전거를 타고 왔다. 길에서 가는 나는 길옆에서 차가 고장나 수리하는 것을 보고 곁에 가 기사보고 북경에 가려는데 나를 좀 실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북경에 가서 애를 찾는데 자전거 타기가 너무 힘들어요”라고 되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냈다. 기사와 같이 있는 사람과 서로 미루면서 날 태우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날 태워서 만약 불편하다면 언제든지 내가 내릴 수 있다고 말하자 그들은 마지못해 날 태웠다. 차를 탄 후에 나는 진짜 말을 하지 않아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만약 그들이 진짜 말을 하면 거절할 수 있다는 걱정에 말을 하지 않았다. 우선 나는 그들에게 사과하고는 난 법륜공 수련생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말하면서 경찰이 뒤에서 쫒고 있다고 말하였다. 생각밖에 그 두 사람은 “왜 일찍 말하지 않았어요? 만약 당신이 법륜공 수련생이라고 말하면 둘이 더 와도 괜찮아요. 당신과 같은 선한 사람을 만나 참 기쁩니다.”라고 말하였다. 차에서 나는 그들에게 홍법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법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들은 북경에 도착하였다.
12. 정(情)에 대한 집착을 버리다
북경에 도착하자 나는 소정의 집에 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저는 “사녕”은 어디로 있는가고 물었다. 그는 20일부터 연결이 끝어 졌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속상하여 울었다.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어려서부터 고생을 한 적이 없어 이겨 나갈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소정은 내가 이러는 것을 보고 나더러 “양향”이라는 곳에가 며칠 보내게 하였다. 나와 같이 온 사람에는 두 대학생이 있었다. 우리는 “양향”에서 방 두 개를 빌려 남녀가 각기 한 방을 썼다. 사람은 40여명 되었는데 모두 전국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모여서 30분간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듣고 반드시 온 곳으로 되돌아가 아직도 집에서 법을 실증하러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집에서 나와 법을 실증하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춘에서 온 힌 동수는 돌아가 많은 동수들과 교류하여 그들로 하여금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걷게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돈을 아끼려고 스스로 밥을 해서 먹었다. 장춘에서 온 동수 한 분이 있었는데 30몇 세 나이에 자신의 격려한 일을 말하면서 “한 번을 잡혀 방에 구속되었는데 방의 지붕에 구멍이 있어 그 구멍에서 도망하여 나오기가 어려웠다.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 수련생 두 사람은 키도 크고 몸도 뚱뚱한데도 그 구멍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대법의 신기함을 말하여 주었다. 나는 그 곳에서 들으면서 속으로는 “사녕”을 생각하여 법공부도 잘 되지 않아 “전문(前門)”에 갔다. “전문”에서 나는 나와 같이 잡혔던 여자 동수 한 분을 만나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부부가 수련생 이어서 서단 백화상점 앞에서 우리들과 자주 만났다. 잡히기 전날에 그들은 부흥문 대교 밑에서 우리와 밤늦게 애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녀는 잡혀 지방으로 가는 중에 우리와 헤어졌다. 나는 그녀를 보고 바싹 앞으로 가 불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자 울었다. 나는 “사녕”이 생각나고 그녀는 자기 남편을 생각하였다. 나는 “어떻게 도망하여 왔어?”라고 사연을 물었다. 그녀는 “그 날 해어진 뒤 우리 단동에서 온 여섯 사람은 시 감옥에 압류되었고 저녁에 경찰 차에 실려 단동으로 실려갔지.”라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녀의 손은 남편의 손과 수갑에 같이 채워 있다가 길가는 중에 남편은 수갑을 풀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차가 한 마을을 지나서야 경찰차에서 뛰어내렸다. 이와 동시에 네명의 동수가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경찰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게 하였다. 이때 시간은 새벽 3시쯤이었다. 나는 그녀의 무릎과 팔에 큰 상처를 보았고 입은 청바지에도 구멍이 두개나 나 있었다.
우리는 같이 “견송”이라는 곳에 가서 동수를 만났다. 그들은 모두다 7.22이후에 집에 돌아 가 본적이 없었던 동수들이었다. 우리는 앉아서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 한 동수가 이런 얘기를 하였다. 중국 당산이라는 지방에서 지진이 일어나 한 할머니가 혼미 상태로 되었을 때 “원신(元神)”이 다른 공간에 가 그와 아들의 인연관계를 알았다고 한다. 원신이 돌아오자 그 할머니는 깨어나 아들이 죽은 소식을 들었다. 아들의 추모하는 의식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왜 울지 않는가?”고 물었다. 할머니는 답하기를 “전생에 그 놈에게 두부 두판 빚을 지어 금생에 내가 이십년 동안 길렀는데 지금 생각하여도 억울한데!” 나와 사녕”간에는 어떤 연분이지? 왜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지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하면 마음이 아픈지.. 오늘 동수과의 마음을 나눈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내가 정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같이 좀더 말을 하다가 떠났다. 길에서 우리는 20여세 되는 장춘의 동수를 알게 되었다. 그는 법을 얻은지 몇 달 밖에 안되어 <전법륜>도 한번 읽지 못한 채로 법을 실증하러 나왔다. 그의 집에서는 몇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들과 같이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저는 그가 입은 옷이 적은 것을 보고 내가 북경으로 오는 길에서 산 쪼기를 주었다. 어느 하루 우리는 “전문”에 가게 되어 그 곳에서 내 동생의 연공장에서 연공하는 동수를 반갑게 만나 그 동수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 동수들은 집을 빌려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그녀의 언니가 불법적으로 체포된 사건을 들었다. 그녀는 자기 언니와 같이 있는 4사람 중에 한 여자애가 있었는데 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도망가고 그 여자애는 도망가지 않아 얻어맞았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그 여자애가 바로 “사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은 그쪽으로 끌려 “사녕”을 걱정하였다. “사녕”은 차멀미가 심하였고 먼길을 경찰차를 타고 보내야 하였으니 그 먼길을 어떻게 보내겠는가 나는 걱정하였다. 그들 중에 내가 “서단”에서 안 황색쪼기 입은 아저씨는 내가 “사녕”에 대한 정을 끊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하여 어쩔 줄 몰랐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걱정되어 그 마음을 놓지 못하여 그 곳에서 2일을 보내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갈 생각을 하였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는 “전문”에 갔다. “전문”앞에는 긴 벤치가 놓여있어 매일 우리 수련생들이 그곳에 있었다. 경찰은 도처에서 우리 대법제자를 잡았고 방금 사람들을 잡아가자 얼마 되지 않아 뒤에 온 동수들은 모르고 또 그곳에 모여 있게 되어 또 잡혀갔다. 황색 쪼기를 입은 아저씨는 몹시 자책감을 느꼈다. 그는 자기 도망해 나 올 때 “사녕”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 것이다. 그 날 오후에 우리의 둘은 “저의로”의 벤치에서 잠깐 쉬었다. 그분은 벤치에서 책을 보고 나는 먹을 것을 사러갔다. 내가 돌아올 쯤에 경찰 두 명이 그의 맞은 편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을 본 나는 곧바로 가서 경찰이 쳐다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괜찮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의 옆에서 내가 사준 떡을 먹으면서 그가 오랫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에게 물을 주고는 남은 떡을 다 먹고는 각자 다른 벤치에서 책을 보기 시작하였다. 내가 보는 것은 손으로 쓴 책이어서 보다가 그분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방금 전에 그의 책을 보던 것을 감시하고 있다가 갔던 경찰이 돌아와 그의 몸을 수색하고 있었다. 나는 멍청히 보고만 있다가 한 참 지나서야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일어서 가다가 뒤를 쳐다보니 경찰을 아직도 그곳에서 몸수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 책과 경문이 있었는데 그의 옆에 놔두고 가져오지 못하여 경찰이 수색하여 가져갔다. 나는 만약 내가 그곳을 떠나지 않아 경찰에게 발각되면 일이 켜질 염려 때문에 그곳을 떠났다.
나는 “저의로” 떠난 후에 정씨 동수에게 전화를 걸러 만나는 지점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내가 약속한 지점에서 오랫동안 기다려도 사람이 오지 않아 날도 저물고 하여 나 혼자서 잘 자리를 찾았다. 난 먼 길을 걸어 잠잘 곳을 찾으려고 헤매였으나 찾지 못하고 결국 북경역 앞의 광장에서 신문지 몇 장을 깔고 잠이 들었다. 이번은 내가 처음으로 밖에서 혼자 자게된 상황이어서 좀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였다. 다음날 나는 옥원담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7.22이후에 각 곳의 공원, 서객역, 부흥문, 그리고 천안문 등지는 우리 대법제자가 마음을 나누고 자는 곳으로 되어버렸다. 그곳에는 도처에 대법제자로 모여 아침저녁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때 서단 동단 등 곳에는 이미 사람이 적어지고 대부분 천안문이나 전문에서 만났다.
그 동안 나는 신방사무실에 가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날 나는 부흥문의 벤치에서 60여세 되는 언니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언니는 내게 말하기를 우리들 5명이 신방사무실에 갔지만 모두다 잡혀 자기만 홀로 도망쳐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비록 가면 잡히지만 우리들도 계속 북경에서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신방사무실에 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우리는 여기에 무엇을 하러 왔는가? 바로 실제 정황을 말하러 왔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 신방사무실에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나는 평상시에 같이 있던 두 동수(말도 잘 통하여)가 내가 가는 것을 반대하면서 왜 가면 되지 않는가 라는 이치를 오후 동안 계속 말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교란을 받았고 갈 기회를 잃었다. 이후에 나는 구치소에 잡혀 들어간 후에야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을 깨달으면 다른 사람의 간섭이나 교란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을 스승으로 삼고(以法爲師)하고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발표시간: 2003년 6월 29일 일요일
발표문헌: 정법수련>정념정행
발표위치: http://search.zhengjian.org/zj/articles/2003/6/29/222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