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의 길에서 친정관을 넘긴 체오
작가 : 왕경화 (王瓊花)
【정견망 2007년 12월 9일】
자비로운 사부님, 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2002년 정월에 법을 얻었다. 수련하기 전에는 인생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신(神)에게 점을 보기를 좋아했고 명(命)을 보는데 열중했다. 2002년 정월 어느날 밤에 나는 무심코 텔레비전에서 한 사람이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명을 보는 것은 백분의 구십팔은 정확한데 <<전법륜>>을 본 이후로부터 나는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에 비추어 하는 이외에 나는 다시는 사람의 명(命)을 봐주지 않는다……” 그 후에 화면에 한 권의 황색의 <<전법륜>> 책이 나타났다. 나는 인터뷰를 한 사람의 변화된 태도에 호기심이 생겨 다음날 학교에 가서 인터넷을 통해 대법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을 찾아보았다. 퇴근 후에 바로 뛰어가서 책을 사서 보았는데, 대략 3분의 1 정도 읽었을 때 마음속으로 돌연 큰소리를 쳤다. 알고 보니 이것이 내가 찾고 있던 것이구나! 이렇게 나는 운좋게 대법으로 걸어 들어왔다. 걸어가는 길은 평탄하지 못했는데, 금년 6월이 되어 나는 수련 이래 최대의 고험을 만났다. 그것은 바로 친정(親情)에 집착하여 따라온 마난이었다.
이렇게 한번 넘어지자 심하게 넘어지게 되어 나는 사존과 자신에게 매우 부끄러웠다. 이치대로라면 나는 오늘 이런 신성한 법회에서 보고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동수의 격려는 나로 하여금 굽은 길에서 걸어 나오도록 하였고 공동으로 제고하여 동수들이 같은 길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이런 점에 가치를 두면서 나는 낯두껍게 이 단에 올라섰다.
기쁘게 대법을 얻은 후 나는 적극적으로 친구들에게 추천했는데, 그중에는 불법(佛法)에 대해 약간의 이해가 있는 동생이 곧 수련의 행렬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나 외부와의 접촉에 습관이 되지 않아 그는 평소에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이후에 사부님의 신경문이 나오면 나는 그에게 한 권을 주었다. 우연히 그 역시 법실증에 약간 참여하긴 했으나 내내 걸어 나오지 않았다.
금년 6월 초에 나는 타이뻬이에서 돌연 그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의 목의 양쪽이 많이 부어 의사는 비후암이 아닌가 검사하기 위해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의 반응은 그럴 수 없다! 아무 일 없다! 는 것이었다. 가우슝에 돌아온 후 나는 그를 데리고 법공부, 연공, 발정념하며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병원에 가기를 원치 않고 수련을 견지했다. 마침내 나는 아예 그를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이와 동시에 병원의 검사보고도 나왔는데 다행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의사는 진일보로 검사해야 한다고 여겼고, 우리는 “병을 얻음”을 구하지 않으므로 의연히 의사의 건의를 거절하고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했다.
그러나 동생의 신체는 개선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갈수록 견디기 어려웠다. 나중에 중의 치료로 보충하였고 많은 동수들이 와서 관심을 가지고 교류를 하였다. 그들은 동생에게 말했다. 수련인은 병이 없으니 이것은 가상이며 소업이다. 그것을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해야 한다. 본래 말을 잘 듣는 동생은 과연 법공부와 연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체 상황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마지막에는 제1장 공법도 연마하지 못했다. 의사는 그의 통증지수가 여자가 아이를 낳는 고통보다도 더하다고 하며 오로지 모르핀 주사만이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소업을 하기 위해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매일 <<전법륜>>을 들고 보며 사부님의 법상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파룬따파 하오를 묵념하였고 사부님의 경문도 보았고 녹음도 들었는데 왜 나의 고통은 여전히 완화되지 않는 거지?” 나는 눈물만 글썽이며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동생은 내가 키웠으며 나는 그를 아들처럼 사랑했다. 그가 날마다 고통이 심해지는 것을 보고 형제의 정에 휘감겨 나는 신사신법의 정념이 동요되기 시작하였으며, 당시 나의 심정은 <<전법륜>>에서 말한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당신에게 또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게 만들어 놓아 당신으로 하여금 이 공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치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우리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여 사부님이 우리를 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법에서 법을 잘 인식하지 못해 법이 우리 몸에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매시간 거대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나는 참기만 할 뿐, 한 마디 원망의 말이 없었는데, 내 마음은 고통 뿐이 아니라 거의 수련해갈 수 없을 정도였다.
고통과 번뇌로 나의 체중은 단번에 7~8 킬로그램이나 빠졌으며 세 가지 일은 그저 표면적으로 형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동수는 나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것은 구세력이 동생을 대하는 나의 친정관을 고험하는 것이라고 하며 만약 내가 빨리 귀정하지 않으면 동생의 마난을 더 크게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당시 정념이 없는 나는 듣자마자 즉시 반발심이 나왔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인가? 자기의 제고를 위해 동생으로 하여금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하게 하는가? 그럼 나는 수련하지 않겠다. 내가 수련하지 않으면 구세력은 내 동생을 마난에 빠뜨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동수는 또 말했다. 네가 수련하지 않으면 네 동생은 너무나 큰 업을 짓게 된다! 왜냐하면 네가 동생을 위해 수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수련하자니 친정관을 넘기지 못해 동생의 난을 크게 하였고 수련을 안 하자니 동생이 오히려 더 큰 업력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럼 내가 사는 것은 분명히 동생에게 고통을 만들어주기 위한 것인가? 그럼 내가 사는 것은 무슨 뜻이 있는가? 당시 정말 죽음도 생각했다. 그러나 명백한 일면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죽음은 이 일체를 해결해줄 수 없고 심지어 더 큰 고통이 온다! 맙소사, 무엇이 생사관인가? 이런 생사의 난의 고통의 선택이 바로 생사관이 아닌가? 나는 정말로 수련상의 집착은 서로 엉켜서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난임을 진정하게 느꼈다.
내 동생은 육체적인 고통을 받고, 나는 심적인 고통을 받아 우리 두 사람은 구세력에 의해 얽혀 함께 구세력이 안배한 길을 걸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구세력의 엄중한 박해를 받았다. 무려 5개월 이후 동생은 관을 넘기지 못했고, 식구들은 강제로 병원에 보내 치료하였는데, 나는 비할 수 없는 자책감과 고통의 심연에 빠져들었다! 이 때 동수가 권했다. 법공부와 연공을 더 하는 수밖에 없다! 고통스런 나는 그저 법을 공부하고 아울러 연공장에 가서 연공하도록 강박하며 버틸 수 없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사부님께 가지를 청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생명은 천천히 깨어난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하마터면 돌아올 수 없는 험한 길을 걸었던 것이었고, 만약 사부님께서 나로 하여금 떨어지지 않도록 하지 않았더라면, 무수한 차례의 동수의 점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오늘 이렇게 있을 수 없으리라.
관심을 가져 주었던 어느 동수가 말했다. 동수들은 모두 사부님의 말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부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쳤는가? 너는 사부님의 말을 들었는가? 사부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사명은 생명을 구도하는 것이다. 시간이 이렇게 긴박한데 너의 천체의 무수한 중생들은 네가 구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아직도 네 하늘의 식구들은 네가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당신은 아는가? 나는 듣자마자 즉시 멍해졌다. 나는 확실히 말을 잘 듣지 못한 제자였다. 이 단락 시기 동안 걸은 길은, 나는 사부님의 말대로 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매일 “사부님의 가지”만 기다렸다. 이하의 과정을 지나며 나는 점점 법리상에서 자신의 집착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이미 수련인이 응당 있어야 할 바른 깨달음을 잃어버렸고, 나는 친정(親情)에 의해 틈을 타게 되었어도 스스로 알지 못했고, 난관이 왔을 때 법리에서 똑똑히 인식하지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에 집착하고 내려놓지 못해 무형 중에 마난을 더 크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하의 몇 가지 점을 제기하여 동수와 교류하려 한다.
우선 전체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를 말해보자.
1. 나의 체오를 동생에게 강제로 주었다. – 동생의 신체에 이상이 나타났을 때 나는 그의 수련상황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체험만 그에게 강제로 주었으며 그는 병을 고치는데 급급하여 간단하게만 보고 다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그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초과하여 너무나 큰 부담을 감당하게 하였다. 기억하기에 동생이 병원에 가기 전에 나는 물은 적이 있다. 너는 왜 병원에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는 말했다. 왜냐 하면 사람들은 모두 나더러 수련인이라고 하잖아요! 많은 동수들이 그를 격려하기 위해 그는 고층에서 온 것이라고 하며 큰 과위를 성취할 것이니 아마 더욱 큰 고난을 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 사람의 어떠한 것을 섞든지 모두 극히 위험하다.” (<<정진요지>> <뿌리를 캐다>) 당시 동생은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사람들이 말하는데로 따라 하였는데, 그러나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었고 그의 내심은 진정한 법리상에서 인식하여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2. 구하는 마음이 너무 컸다. – 동생은 구하는 마음을 품고 법공부 연공을 했으며 나도 같은 잘못을 범했다. 비록 매일 매우 진지하게 법공부와 연공을 했지만 수련하여 건강을 얻을 수 있다는 강렬한 희망을 가진 그 집착심은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매일 동생의 증상이 좋아지지 않는데 집착하였고, 왜 법공부와 연공을 하여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다. 9일학습반에 참가하고 기타 진상활동에 참가하여 전기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집착심이 중했기 때문에 기대 역시 매번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법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늘 천목이 열린 동수에게 물었으며 사람들은 나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서 내게 말했다. : 당신은 이후에 전화하면 동생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마세요.
3. 한 손으로는 부처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사람을 잡았다. – 나는 한편으로는 동생에게 법공부와 연공을 강화하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생을 데리고 중의에게 보이며 스스로 위안하며 동생에게 말했다. 신농씨는 백 가지 약초를 맛보았으며 중의 역시 신이 사람에게 준 문화인데 무형 중에 한약을 먹는 것은 상관이 없고 서양 의사가 보아야 비로소 의사를 보는 것이라고 구별하였다. 심지어 반대의 소능소술, 기공치료, 민간요법 등에 대해 열중하기 시작했다. 비록 제 때에 깨어났지만 이미 헛돈을 많이 써버렸다.
4. 법을 원용하지 못했다. – 동생의 신체가 장기간 개선되지 않자 나는 그와 법리상에서 수련과 병업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정확하게 대해야 하는지 교류하지 않았고 그저 우매하게 그보고 참으라고 하며 그가 고통당하는 것만 보았다. 만약 그의 심태가 정말 불안했으면 진작 병원에 가서 치료했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친척의 책망이나 대법에 대한 몰이해를 조성하지 않게 했어야 했다.
5. 유위적인 법은 거품과 같다. – 본래 대법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신성하고 위덕을 갖춘 일인데 나의 심태가 바르지 못해 그동안 나는 내 동생의 신체가 빨리 낫게 하기 위해 속인이 복을 구하고 덕을 쌓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어서 이 문제를 통해 동수와 교류 중에 내가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나는 친정에 대한 집착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 만약 동생이 속인이었다면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 우주 중에는 이런 하나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속인 중의 일은, 불가(佛家)의 말에 의하면, 모두 인연(因緣)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속인들에게 바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없다. 아내와 자식, 부모형제를 포함한 그들의 운명, 그것이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전법륜>>)
만약 동생이 대법제자였다면 사부님은 그의 수련의 길을 안배하였을 것이며 나는 사람의 마음으로 그를 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부님은 <<로스엔젤레스시 설법>>에서 “어떠한 일도 우연한 것이 아니며, 또 우연한 일이 나타나지 않는데 인생 길에서의 일체는 모두 당신의 제고와 수련에 직접적 관계가 있다”라고 하셨다.
이외에 또 사부님은 “수련은 곧 이 마난(魔難) 중에서 수련해야 하며, 당신이 칠정육욕(七情六慾)을 끊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 담담히 여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이 그런 것들에 집착한다면 당신은 수련해 내지 못한다…… 전반 인류사회의 일체는 전부 이 정(情)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정을 끊어버리지 못한다면 당신은 수련하지 못한다.”(<<전법륜>>)
그러나 나는 이지가 뚜렷해야 한다. 친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은 동생에게 마난을 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나 혹은 동생의 신체가 좋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합격한 수련인이 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감추어진 친정의 집착에서 맴돌고 있을 것이다.
2. 후회하는 마음이 또 다른 집착을 만들도록 하지 말라. – 사부님은 <<2003년 정월대보름날 설법>>에서 “당신들은 수련 중에서 하나의 뚜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어떤 일을 잘 하지 못하고 일을 끝낸 후, 그곳에서 후회하기만 하고 새롭게 다시 할 줄을 모르고 있다. 당신이 후회를 많이 해도 또 집착이다. 잘못 하였으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보아서 알았으면 다음에 그것을 잘하고 새롭게 하라. 곤두박질쳐 넘어져서 한사코 그곳에 엎드려 있는데, (모두들 웃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셨다.
나는 반드시 자기의 부족을 찾아내어 더욱 정진하여야 하며 다시는 소극적 정서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장래에 마(魔)에게 빈틈을 타게 하는 기회를 주게될 것이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물론 단번에 이런 것들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수련이란 기나긴 과정으로서, 서서히 자신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해야 한다.” (<<전법륜>>)
깨달았다고 해서 즉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 이후 나는 반드시 착실히 세 가지 일을 잘할 것이며 더욱 엄격히 자신을 요구하여 다시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를 저버리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홍음2>> 중의 시 한수로 함께 용기를 북돋우고자 한다.
<끊어라>
수련은 어렵지 아니하나
마음 버리기 어렵노라
많은 집착 언제 가서 끊을소냐
고해(苦海)는 어디까지나 대안(岸)
없음을 다 알거늘
의지가 확고하지 못하면
고비는 산과 같으려니
어떻게 속세를 벗어나랴
위대하신 사존님 감사합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7년 대만 법륜대법 수련심득교류회 원고문장)
발표시간 : 2007년 12월 9일
원문위치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12/9/497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