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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수련하는가

무엇 때문에 수련하는가

작가:프랑스 대법제자 아르노(Arnaud)

【정견망 2010년 3월 1일】

사람들이 대법제자에게 무엇 때문에 파룬따파를 수련하는가 라고 물을 때면 여러분들은 모두 진상을 알리는 각도에서 대법은 사람들의 신체를 건강히 하고 병을 없애주고 착하게 살아서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는 등의 가장 얕고 속인이 쉽게 접수할 수 있는 도리를 말한다. 이는 속인에게 진상을 알리면서 반드시 해야 할 부분이며 높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대법제자 내부에서 이 문제를 토론하거나 혹은 대법제자가 자신에게 왜 파룬따파를 수련하는가 라고 물을 때 법리상에서 교류하고 사고할 때면 적지 않은 동수들에게 적지 않은 답안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동수는 말한다. “나는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일부 사람들은 “나는 반본귀진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위덕을 건립하고자 한다” 등등. 이 문제는 매 대법제자들이 대법 자체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탐색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너무나 크다. 우주는 정법 속에 있고 만고이래 최초로 사부님께서는 우주의 특성 진선인 근본 대법을 우리에게 전수해주셨다. 이는 과거에 가장 높은 신마저도 모르던 천법(天法), 천리(天理)이다. 이렇게 큰 법이 전해 내려옴은 사람을 제도하여 돌아가게 하고 변이된 낡은 이치를 바로 잡는 것만 아니라 또 정법과 신우주 등 여러 가지 방면의 요소와 연결되어 있다. 하여 나는 우리가 마땅히 이 방면에서 우리의 수련을 대해야 한다고 본다.

일찍이 1997년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려주셨다.
“어떻게 조성된 것인가? 이 우주 중에는 법이 있다. 이 법은 바로 우리가 말하는 眞(쩐)•善(싼)•忍(런)이며, 이런 우주의 특성이 이 물을 가장 초기적이며 가장 미시적이고 가장 원시적인 물질의 단일입자로 조성하는데, 그것을 가장 원시입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일한 것이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즉 마치 하나의 수포(水泡)와도 같다. 그럼 다시 두 개의 원시적인 입자를 한데로 합쳐 다시 더 큰 원시입자를 조성하고 그 다음 또 두 세트의 양위일체(兩位一體)의 입자로 좀 더 큰 입자를 합성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조합하여 내려가는데 줄곧 부동한 층차의 입자가 각종 물질의 외형, 생명, 물질, 공기와 생존에 필요한 빛, 물, 시간 등등을 조합하며, 입자는 부동한 조합 방식이 있는 것으로 우리는 오늘날 배열순서라고 부른다.”(《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내가 이해하기에 사람의 몸, 심지어 사상은 일정 정도에서 모두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상, 신체 속의 거시적인 데서 미시적인 데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조합 과정이 있으며 시종일관 모두 진선인 특성이 우리의 입자를 층층 조합으로 구성했다. 그러므로 생명은 반드시 진선인 우주 특성에 부합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체 해체를 의미한다.

그리 적절하지 않은 비유를 한다면 일부 모래알 같은 작은 자석들이 자성을 지니고 있어 서로 끌어당겨서 한 개의 큰 물체를 형성했다. 이때 만약 물체가 자성을 잃으면 그것은 즉시 한 무더기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이 생각난다.
“어떤 물체든지 모두 살아있는 것으로 모두 불성(佛性)을 갖고 있지만, 다만 어떤 물체든지 모두 피로가 발생할 뿐이다. 眞善忍(쩐싼런) 이런 특성을 제외한 외에 파생물질이 피로가 발생할 때에는 아주 위험한 문제 ― 물체의 풍화와 부식, 즉 물체의 해체에 직면하게 된다. 물체 해체를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낮은 층의 우주의 부패이며 법(法)이 영험(靈)하지 않게 된 것이다.”(《전법륜(권2)》 〈대서산에서의 설법〉)

인체는 바로 작은 우주이고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은 더욱 큰 궁체(穹體) 범위를 성취해야 한다. 속에는 아마도 무량한 중생들을 포용해야 하고 대법제자가 수련 속에서 닦아낸 금강불파의 정념은 사실 대법을 배운 후 진선인 대법에 동화된 체현이다. 오로지 우주특성에 동화되어야만 비로소 미시적인 데서 거시적인 데에 이르기까지 각 층 입자가 안정적으로 조합하여 흩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궁의 견고성과 안정성, 다시 말해서 어떻게 성주괴멸 되는지는 그것이 진선인 파룬따파에 동화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법공부를 통하여 우리는 과거 구(舊)우주의 성주괴멸 법칙은 구우주 법리의 지혜에 한계가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낡은 법 속에서 태어난 부원신 수련의 그런 방식 역시 “반본귀진”을 말하거나 혹은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강조하지만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성주괴멸” 속의 산물로써 결국에는 훼멸로 나아간다.

사부님께서 2003년 애틀란타법회에서 설법하실 때 어떤 제자가 이렇게 여쭤보았다.

“문: 낡은 법리와 새 법리는 중첩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사부: 차이가 매우 큰데 근본적인 문제는 중첩되지 않는다. 과거의 기점은 이기적인 것이지만 대법이 육성한 일체는 자아를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일부 구체적인 문제는 같게 인식한다. 선과 악의 구체적인 표현은 기본상 같지만 많은 것은 모두 일부 변화가 발생하고 장래에 생명은 더욱 아름답게 된다.” 이는 나로 하여금 사부님께서 스위스법회에서 설법하실 때 우리를 가르치신 부분이 떠올랐다.” 예전의 수련하는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얻겠다” , “나는 수련하고 있다” , “나는 성불하겠다”, “나는 무엇에 도달해야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모두 그 사(私)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해내도록 해야 하는 것은 순정(純正)한 것, 무사(無私)한 것,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의 원만(圓滿)인데, 그래야 만이 비로소 영원한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사의 기점에 서서 “진선인”을 말하면 진정한 진선인이 아니다. 이는 구우주 중의 일부 아주 “온화하게” 대법을 파괴하는 낡은 신들과 같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변이된 “선(善)”이다. 똑같이 우리 수련 혹은 대법의 사업을 할 때 기점을 순정하게 가서 하면 좋은 효과를 일으킨다.

수련을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모두 이러한 한마디를 알고 있을 것이다. “사부가 도제를 찾지 도제가 사부를 찾지 않는다.” 대법제자로 되는 것도 똑같은 즉 사부님께서는 생생세세 우리와 연을 맺고 우리에게 수기를 주셨으며 금생 금세에 또 각종 방식을 통해 우리가 법을 얻고 수련하게 이끌어주셨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 대보름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주의 고층차에서는 바로 이런 하나의 이치이며, 보아서 누가 되면 바로 그를 선택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이치이다.” 이는 이른바 현실생활 속에서 표면에서 보면 마치 한 사람이 대법을 수련하겠다고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상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세간의 이치는 반대라고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법제자로 된 것은 고층차에서 보면 사실 사부님, 대법, 우주의 선택이다.

선택된 생명으로서 대법제자가 짊어진 책임 역시 비할 바 없이 중대하다. 사부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다만 개인의 원만을 최고의 일로 여긴다면 나는 그것은 정법시기(正法時期)의 대법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사부님께서는 또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셨다. “당신들이 수련하는 목적은 단지 개인의 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며, 당신들은 중생을 구도해야 하고, 당신들은 또한 미래의 중생을 도와 미래를 창립[開創]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제자가 왜 대법을 수련해야 하고 중생을 구도해야 하는지는 중생 구도와 미래 창립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 한 점에서 볼 때 왜 파룬궁을 수련해야 하는가? 그것은 대법제자의 책임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으면 수련하고 기분이 나쁘면 수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량한 중생이 신우주에 진입하여 미래 대궁의 원용불파에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왜 대법수련에 정진해야 하는가는 한 속인이 왜 대법 수련을 시작하는 것과 이 양자 사이에는 매우 큰 구별이 있다.

동시에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일체 구우주의 각종 불도신의 여러 법문은 모두 정법 속에서 미래에 진입할 수 있는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미래의 우주, 미래의 생명은 어떤 형식이고,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어떠한 법과 사람을 제도하는 방식을 미래에 남겨주는가 하는 이것은 과거의 생명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느 생명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아무리 높다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의 수요(需要)이기 때문이다.”(《2005년 샌프랜시스코법회 설법》)

우주 역사의 오늘에 대해 구우주 가장 높은 신이 그 한 문의 법을 전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미래의 수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부님께서 전하는 대법만이 비로소 생명을 이끌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구우주의 수련을 말씀하실 때 사부님께서는 또 일부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셨다.
“만약 극히 미시적인 데서 여러분이 본다면, 사상 중에서 집착하는 그런 것이 형성된 물질은 무엇인가? 산이고, 거대한 산인데, 마치 화강암같이 견고한 돌덩이로서, 일단 형성되면 사람은 그것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과거에 많은 수련인들은 모두 부원신을 수련하였는데, 그들의 사부는 이 일에 대하여 전혀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수련 중에서 그들은 이 신체를 아예 가질 수 없었다.”(《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구우주 중 기타 법문의 수련은 사람 주의식상의 집착심을 제거할 방법이 없어 오로지 부의식을 수련할 뿐이다. 표면에서 보면 그들의 사부들이 능력이 모자라서 그 큰 산들을 제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인데 그럼 이 속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바로 신통이 광대한 대각자들은 어찌하여 이 문제에서 능력이 없단 말인가?

나는 일체 사물은 모두 고립되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만약 한 세인이 그의 배후의 방대한 천체와 중생을 대표한다면 이 사람의 일체 경지, 사유습관은 모두 그가 대표하고 있는 거대한 천체범위와 일정한 연결이 있다. 그러므로 부동한 사람들의 특징이 다르고 사유방식이 다름은 사실 그들 배후의 각 자가 대표하는 부동한 우주 체계 범위에서 내원된 것이다. 하여 사람에서 그 부동한 사유방식과 문제 처리의 방법은 부동한 집착심이 나타남을 초래한다.

그러나 일단 한 사람이 수련하려면 그 집착심을 제거해야 한다. 이때 까다로운 문제를 건드리게 된다. 어떠한 일이든 모두 그것의 근원이 있고 사람이 속인 중에서 집착심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이 삼계 층차의 경지가 낮은 것이 한 방면이고 또 부동한 층차(고층우주를 포함)가 말법으로 진입한 후 층층의 변이 요소들로 인해 나타난 집착과 관념들이다. 더욱이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내력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높게 연결되었다. 한 갈래 길로 거슬러 올라갈 때 이는 사람 배후의 우주 체계가 구우주 중에 제한되고(체계 자체의 부족점) 변이되어 조성된 것이라고 이해한다. 표면에서 보면 매우 간단한 집착심이지만 오히려 거대한 천체의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 해결하려면 반드시 그 우주 천체를 다시 조합하여 고층 변이 요소를 뿌리째 제거해야 한다.

더욱 원용된 우주 구조와 매 궁체에 상응된 보다 높은 지혜를 부여하여 더 이상 변이되는 이런 유의 일이 발생하지 못하게 막고 각 대궁체들의 체계를 완벽히 했다. 이는 물론 일반 각자가 해낼 수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이는 정법이 필요로 하는 것이고 오로지 위대한 대법 사부님만이 비로소 해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2004년 뉴욕국제법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법제자가 한 일체는, 대법이 당신들을 육성할 때 대가를 치른 그 일체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

이 한마디는 나로 하여금 정법시기 대법제자 이 특수한 생명의 신성함과 짊어진 중대 책임에 대해 깊이 감수할 수 있었다. 이 일체는 모두 그렇게 쉽지 않았고 대법은 우리를 위해 거대하게 헌신하고 있으며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거의 일체를 소모하셨다….

왜 우리가 악을 제거할 때 내보낸 에너지는 그렇게 영험한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는가? 당신들이 얻은 그것에는 나의 얼마나 많은 것이 그 속에 용해되어 들어있는지를?”(《스위스법회설법》)

대법제자들이여, 우리는 우주의 기타 생명들과 다르다. 우리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고 부동한 멀고 먼 대궁에서 왔으며 가장 위대한 대법에 의해 육성되었으며 역사의 이 관건적인 시각에 신의 사명을 이행하고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대법제자이다.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것은 단지 책임뿐만 아니라 역시 생명의 가장 큰 영예이다.

사람의 언어가 무척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는 그렇게 큰 내포를 똑똑히 표현할 수 없다. 동시에 문자의 내용은 자비하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홍대한 천체 대궁을 정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어 사람의 언어로는 그러한 존경의 정도를 항상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모두 개인의 깨달음이고 존경스럽지 못한 곳은 사부님, 대법, 동수들께서 너그러이 포용해주고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발표시간:2010년 3월 1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3/1/646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