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청람(清藍)
【정견망】
인간세상의 일체,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간의 각종 관계를 조용히 바라보면 왜 정법시기에 인간세상으로 전생한 신(神)이 정(情)이라는 요소를 닦아 버려야 하는가? 정이란 우주 생명이 사(私)를 산생한 제일 중요한 근원(源頭)이다.
우주 중에는 남녀의 형체를 지닌 것이 있고 또 기타 생명의 형체가 있다. 이처럼 배합된 반려자 혹은 동반관계가 있는데 이들 두 생명의 관계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구함이 없는 것이다. 마치 태극어(太極魚)처럼 상호 분리할 수 있고, 합할 수 있는 것으로 깨끗하고 순정하여 서로 물들지 않는다.
그러나 정이란 요소가 있게 되자, 양자 간의 사상에 자성(磁性)과 같은 상호 흡인력이 생기고 상대방을 주의하기 시작한다. 욕망의 요소가 생기자 양자는 물질과 정신에서 혼합작용이 있게 되고, 정의 요소를 가중하고 공고히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욕망과 정의 포로가 되어 좌우지되며 통제 당한다. 여자는 심리적인 의지를 얻고, 남자는 생리적인 만족을 얻어 상호 의존하게 되였다. 속인이 볼 때는 일종의 행복이지만, 신이 볼 때는 마약 중독자가 제 때에 두어 모금 마약을 피우는 것과 같을 뿐이다.
정과 욕망은 모두 생명의 요소이자 또 모종 경지(境界)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속세의 거리에는 온통 남녀 간의 상호 매혹이 존재하는데, 이는 정이 그것의 힘을 펼쳐보인 것이다. 우리 수련은 자체가 바로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역사상 석가모니 부처님은 “예쁜 여인이 해골로 변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해 예쁜 여자를 보면 백년 후 한 무더기 해골로 변한 형상을 상상하게 했다. 이 방법은 아주 뛰어나 나는 전에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밥도 먹기 싫어진다. 그러나 우리 대법은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더욱 빠르다. 때문에 나는 법리상에서 또 다른 뛰어난 방법임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진풍(眞瘋)”에 관한 법을 말씀하실 때 “그에게 더러운 것을 두려워하는 이 부분을 막아준다.”고 하셨다. 이는 나로 하여금 이런 의식형태의 “더러운” 개념을 사상 중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므로 내가 깨달은 것은 인간세상에서 알고 있는 모든 “욕망”의 개념을 잠가버리면 욕망에 관련된 모든 사상의식 성분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와 욕망은 아무런 연계가 없어지며 남녀를 말해도 관련된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온몸의 매 세포마다 이렇게 하기를 요구했다. 나에게는 욕망의 개념이 없으니 욕망의 행위도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다. 누구와 어떤 인연이나 모순이 있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성에게 호감을 줄 필요도 없다.
여자를 대할 때 어떤 경우에는 대답하기 조차 싫어졌다. 삼퇴를 말하는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런 과정을 견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의력(毅力)에 의해야 한다. 일반 기공 책을 청리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과 관계되는 일체는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묻지 않고, 말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의 흥취를 벗어나는 것이다.
정말로 할 수 있으면 점차적으로 자신이 사람과 아주 큰 거리가 있음을 감촉할 수 있다. 인간세상의 환희, 오락, 이별과 상봉도 모두 이것을 둘러싸고 돌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내가 사과를 먹지 않으면 그 사과를 누가 먹든 비를 맞아 썩든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사과가 어떤가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상이 깨끗하고 순결하면 남녀간의 접촉도 “당승(唐僧 서유기의 삼장법사)이 여자를 만나면 긴장해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내심이 홀가분하고 관계도 분명해진다. 정말로 사람의 각도에서 자신과 사람들 간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어떤 생명과도 관계가 깨끗해 물과 같이 평탄한 것이다. 욕망도 없고, 추구도 없고, 사심도 없어지며, 오직 살아서 수련만 하면 된다. 자신의 존재도 아주 간단해지고 물질에 대한 수요도 아주 적어졌다.
정이 없어지자 또 보다 큰 집착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영해(嬰孩)는 아주 선량한데 곧 놀기를 좋아한다.” 고 말씀하셨다. 파룬(法輪)을 오토바이 바퀴로 삼아 노는데 논다는 것은 생명의 흥취가 있는 것이고, 생명의 동태적인 표현이다. 나는 보다 많은 때 순진한 어린이의 심태가 되며 사상은 단일하고 지혜가 극히 커졌다.
그러나 내가 놀려는 마음까지 제거하고 나니, 자신의 생명이 존재하는 의미도 마치 단번에 없어져 텅비어버려(空無), 적응하기가 좀 어려웠다. 일체 집착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명이 존재하는 특징을 포기한 것이고, 내가 존재하는 의의가 없어진 것이니, 생각이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진아(真我)가 각성하기 시작했다. 선정(禪定) 중에서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사람의 사유구조와 기억이 없어진 것과 같다. 사상은 이 우주의 일체 개념과의 연계에서 벗어났다.
다시 법공부를 통해 발견한 것은, 각성한 내가 여전히 구 우주의 사적인 요소를 닦아버려야 했다. 구 우주의 사(私)는 우리의 언어표현에 관철되어 있다. 우리가 입만 열면 하는 말이람 모두 나는 어떠어떠하고, 나는 무엇을 하려 하고, 나는 어떻다는 등이다.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강조하는 것은 모두 바로 나였다. 이는 신 우주의 위타(爲他)한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해서 이 “나”를 제거해야만 생명이 공(空)과 무(無)를 벗어나 전력을 다해 남을 위하는 방면으로 변할 수 있다.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우선 생각하고 고려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대법의 내포는 무궁무진하다. 이에 또 자신이 일체 일을 행하는 것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해지기 시작했고 내 생명이 존재하는 세부적인 부문을 수련했다. 이 세절 부분이 수련되자 또 다시 공과 무의 경계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 공무(空無)의 심태와 지혜는 이전의 공무(空無)보다 더욱 원만하다. 중생의 의념을 건드리지 않는 정황 하에서 중생의 바르지 못한 사상을 바로잡지만, 나 자신의 사심(私心)의 목적은 참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 세상에 아직 존재하므로 정신과 사상이 모두 이 인류사회 형식에 적합한 자아(自我)를 사용한다. 이런 대자재(大自在)와 자유에는 신통이 필요하지 않다. 또 다시 정과 자비 중에서 보니 나는 자유롭게 왔다갈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마음 먹은 대로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잘 파악하지 못할 때는 나는 독립적으로 공무(空無) 중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복구할 수 있다.
대법은 홍대(洪大)하고 정심(精深)하다. 사존님께 감격한 마음은 보답할 길이 없다. 특별히 이 문장으로 동수들을 격려하고자 한다.
정순 (精純)
아무런 두려움 없는 용맹지심이라
구세력 썩은 귀신 난잡한 신을 먼지 쓸듯 휩쓸어
법도(法徒)들 왕(王)의 풍모를 더욱 드러내누나
決不退散精純之意
毫無畏懼勇猛之心
塵征舊勢爛鬼亂神
法徒進顯王者之風
문장발표 : 2010년12월26일
문장위치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12/26/705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