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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가장 행복하고 잊을 수 없었던 순간

내 생에 가장 행복하고 잊을 수 없었던 순간

작가: 신런(心靭)

【정견망 2007년 1월 13일】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제자는 비록 10여 년 동안이나 당신을 뵙지 못했지만 그 해에 법을 얻을 때의 일들은 제 생명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잊을 수 없었던 순간입니다.

내가 처음 은사님을 뵌 것은 93년 연말 북경건강박람회의에서였다. 당시 친구의 소개로 국립 전시센터에 가서 사부님께서 3시간가량 하신 대법을 소개하는 설법을 들었다. 그때는 기공 전람회가 끝나기 직전 같았고 사부님께서는 수택을 본 많은 군중들의 요구에 응하시어 해법(解法)하셨다. 회의장은 만원을 이뤘는데 다행히 친구가 미리 표를 사 놓았다. 나는 흥분하며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도대체 어떤 대사(大師)기에 사람들이 이토록 목이 빠지게 기다리게 할까 생각했다.

내가 막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사부님께서 미소를 띠우신 채 강단으로 나오셨다. 그런 후 잠시 멈춰 서시어 회의장을 둘러보시고는 단수입장(單手立掌)을 하시고 친절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여러분 , 안녕하십니까!” 그때 나는 단전에서부터 온 몸의 매 하나의 세포마다 모두 강렬한 진동이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사상은 텅 비어 있어 박수 소리가 멈추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후에야 제 정신이 들었다. 그 후 진지하게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는 또 우리더러 손을 내 밀고 파룬(法輪)이 도는 것을 느껴 보게 하셨다. 과연 손바닥에서 뭔가가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바른쪽으로 돌 때는 손바닥이 뜨거워졌고 반대로 돌 때는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설법이 끝난 후에 많은 사람들은 떠나길 아쉬워했고 강당 밖에서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당시 개별적인 新수련생들은 心性(씬씽)이 높지 못해 서로 다투면서 먼저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극소수의 사람은 서로 밀쳤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줄곧 미소를 띠신 채 매 사람을 바라보고 계셨는데 사부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그 박대(博大)하신 너그러움과 자비는 나를 깊이깊이 끌어 당겼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 대사님의 표현은 내 인생에서 지금껏 본적이 세속을 벗어난 비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한 점으로 인해 나는 그분이 하신 말씀에 대해 확고히 믿으며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줄곧 곁에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이 사부님과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부님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부님께서는 혼자 정원을 벗어나 큰 길에 오르셨고 나는 우두커니 사부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이때 친척이 나더러 가자고 불렀고 맞은 편 역까지 갔지만 나는 여전히 사부님의 뒷모습만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사부님께서 몸을 돌리시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드시면서 오라는 시늉을 하셨다. 내가 사부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걸까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부님께서 고개를 끄떡이시면서 또 손을 흔드셨다. 바로 이때에 친척이 나를 버스에 끌어 올렸다.

(몇 년이 지난 후 이 일을 회상해보면, 속인의 말대로 하자면 그야말로 장이 퍼렇게 될 정도로 후회막급이었다. 나는 나를 차로 끌어올린 친척을 원망했으며 자신이 오성이 높지 못한 것을 탓했다. 어떤 때는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좀 특별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나중에 《사부님 은혜》를 읽은 후에야 나는 사부님께서는 모든 제자의 생각을 알고 계시며, 제자가 가장 필요할 때 나타나실 수 있고 또한 매 사람을 위해 걱정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자신의 요만한 경력은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것이며 관건은 지금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3가지 일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두 번 째로 사부님을 뵌 것은 94년 8월 연길(延吉) 학습반에서였다. 출발도 하기 전에 잠 잘 때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 나는 북경 연구회의 대법제자들과 같은 기차 칸에 앉아서 가게 되었다. 그들은 수련생들이 필요로 하는 책과 연공 테이프를 보내 주는 것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매 사람마다 모두 큰 짐을 몇 개씩 지고 있었다. 날은 무덥고 사람은 많아 차 안은 사람으로 빼곡했다. 많은 대법제자들은 단단한 의자 밑바닥에 누우며서 다른 동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연길에 도착한 후 회의장과 가까운 여관에 투숙했다 대부분 동수들이 가난했기에 여관 주인의 동의를 얻어 열 몇 사람이 한방에 들었다. 식사는 오이나 토마토를 사다가 간장을 쳐서 찐빵과 같이 먹었다. 비록 조건은 좋지 않았지만 누구나 다 사부님의 설법이 시작되기를 흥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책을 파는 동수가 일손이 달려 내가 가서 도와주었는데 노 수련생들이 나에게 아주 관심을 기울여주었다. 그들은 매번 강의가 시작될 때면 나더러 일을 그만두고 들어가서 설법을 듣게 했다. 제일 첫 시간에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능히 와서 참가할 수 있는 수련생은 정말이지 조상에 덕이 있으며 3생(生)에 행운입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공을 전하고 법을 전하는 학습반을 꾸리지 않을 것입니다. 공을 배우고 싶으면 연공장으로 가십시오.” 매번 사부님께서 수업을 시작하실 때면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서 기침소리 하나 없었다. 수업 중에 나는 늘 사부님께서 내보내시는 에너지가 우리 매 사람의 세포를 진감(震撼)시킴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내 곁을 지나가셨는데 역시 이렇게 온 몸이 흔들리는 감각이 있었다. 장내에서 수업을 들을 때 보면 매 제자의 머리에 모두 금빛 광환이 있었고 회의 장을 나오면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또 노(老)제자더러 커다란 수박을 사오게 하시어 책을 팔고 있는 수련생들을 위로하셨다.

설법 마지막 날 오후에는 날씨가 아주 좋았다. 나는 책 파는 곳에 서 있었는데 조선족 여자 대법제자들이 전통적인 한복을 차려 입은 것을 보았다. 치맛자락과 고름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마치 선녀가 내려온 듯 했고 사면팔방으로부터 두세 명씩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치신 후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본 지역의 수련생들이 능력이 있다면 외지 수련생들을 도와 기차표를 사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 바랍니다. 외지 수련생들은 사업이 있으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외에 이곳에 하루만 더 투숙해도 비용이 아주 많이 듭니다.” (나중에 들은데 의하면 북경으로 가는 차에 차량을 하나 더 늘렸다고 한다.) 그런 다음 사부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시어 대수인(大手印)을 하셨다.

이 십여 년 동안의 비바람 속에서 제자가 생사고비를 넘길 때마다, 매번 사부님의 건장하신 풍채와 웃으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모두 제자에게 비할 바 없는 용기와 의지를 주셨으며, 사악에 직면하여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올 수 있었다. 제자는 꼭 사부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천하에 화평한 날 돌아오는” 때에 은사(恩師)님을 다시 뵐 것입니다!

(명혜망)

발표시간: 2007년 1월 13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7/1/13/417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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