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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련생이 법을 얻은 경력

작자/ 중국대륙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2015년 5월 법을 얻은 신수련생이다. 사실 1998년에 어떤 사람이 내게 대법책을 준 적이 있지만 보지 않았다. 1999년 강택민(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고 기차역 등에서 대법서적과 자료를 불법으로 수색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감히 가져가지 못했고 그 이후 더는 파룬궁을 만나지 못했다.

2015년에 소송이 있어서 자료를 복사하러 갔다가 복사점 주인과 알게 되었다. 내가 “아주머니 건강이 매우 좋고 젊어 보이시네요.”라고 하자 그녀는 “나는 파룬따파를 공부합니다. 원래 온몸에 병투성이였는데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니 신체가 좋아졌습니다. 당신이 파룬따파 하오, 쩐산런 하오를 진심으로 외운다면 신체는 갈수록 좋아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처음에 믿을 수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몇 년간 소송을 치르고 힘겨운 와중에 나는 담배를 배웠고 많은 병이 생겼다.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도 3근 이상은 살 수 없었다. 무거워서 들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송 때문에 외출했다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이가 벗어놓은 옷도 빨지 못하고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후 그녀가 내게 또 몇 번을 말했다. 나는 믿는다면 한 가지만 믿어야지 다른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파룬따파 하오, 쩐산런 하오를 외우기 시작했는데 일주일 후 온몸이 가벼워졌고 피곤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span>전법륜을 보라고 주었다. 내 몸은 나날이 좋아졌으며 마침내 신체가 다 정화되고 병이 다 나았다. 콩 10근을 사들고 와도 힘들지 않았다. 대법은 너무나 신기했다.

법을 배우고 나서 담배도 끊었다. 법을 배우기 전에는 여러 번 금연을 시도했으나 끊지 못했다. 대법에 들어온 후 마음이 매우 편하고 생활도 즐거워졌다. 소송 결과에도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일체를 다 자연스럽게 놔두었다. 사부님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또 도와준 동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법을 얻은 후 우리 집에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동수에게 말했더니 동수는 인터넷에 올려 법을 실증하자고 했다.

먼저 어머니부터 말하자. 어머니는 원래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일을 할 때면 늘 용서하고 참는다. 우리에게 인생은 싸울 필요가 없으며 네 것이면 네 것이고 네 것이 아니면 다퉈서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하는 말은 오히려 매우 신기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가 오빠 언니에게 이야기 해주시는 것을 들었고 나 역시 옆에 앉아 들었다. 장래에 남은 선남선녀는 고생스럽게 수련하여 구름 층 안으로 돌아가는데 구름 층 밖에는 십여 년간 전쟁이 있으며 칼과 병사가 늘 보인다고 하셨다. 구름 층 안으로 수련하여 돌아간 사람은 조금도 오염이 없으며 만명 중 2~3명 있을 수 있는데 그때가 되면 하나의 문이 하나의 하늘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또 좋은 사람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후 이 무리 사람들은 기괴한 병을 얻는다. 또 강풍이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회오리(토네이도) 바람이다. 엄마는 또 달 속에는 기울어진 나무가 있고 항아와 토끼 한마리가 있는데 항아는 베를 짜고 있다고 했다. 기억해보면 당시 나는 겨우 예닐곱 살이었다. 나중에 밥이 있어도 먹는 사람이 없고 옷이 있어도 입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가 보게 될 거라고 하셨다. 또 아궁이에 우물을 파고 지붕으로 구멍을 낸다고 하셨다. 나중에 수도가 들어와서야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또 벼슬이 없는 사람은 몸이 가볍다고 하셨다. 우리는 자란 후 늘 대도시에 가고 싶어 했는데 어머니는 도시에 가서 일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중에 그들이 철밥통을 유지하지 못하는 날이 오면 밥을 먹는 것도 힘들 거라고 했다.

내게는 오빠가 하나 있는데 성격이 좋지 않다. 맞선을 볼 때 어머니는 매우 걱정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까다로워 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오빠가 원수의 집에 태어났다고 했다. 우리 형제는 6명인데 내가 가장 어리다. 당시 부친은 공산당원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내 동창의 외숙부가 성분이 좋지 않아(지주) 늘 비판당했다. 땅도 바치고 투쟁도 열심히 했는데도 늘 비판을 당했다고 한다. 그 이후 부친은 앞으로는 당원도 소용 없고 좋지 않다면서 당비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비를 내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내가 26살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대련으로 왔다. 첫해에는 품팔이를 했고 이듬해에는 과일을 팔았으며 몇 년 후 아이 아버지가 채석장에 취직했다. 나는 과일을 팔았다. 아이 아빠는 늘 한 가지 노래를 불렀다. 인생을 노래하며 환골탈태해 새사람이 된다는 노래였다. 하루는 남편이 내게 말했다. “당신이 내게 시집 와서 적지 않은 고생을 했구료. 내 비록 갚을 길은 없지만 나중에 반드시 보답하리다.”

이때 나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했다. 고생이 있어야 단 것을 알고 만족함을 알아야 늘 즐거우며 참을 줄 아는 자가 편안하다고. 어느 날 세 식구가 식사 후 대화를 하는데 남편이 아이에게 말했다. “나는 네 아빠가 아니란다.” 아이와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그가 말했다. “네 아버지는 곽이회(郭二会)라고 하는데 네 엄마는 친엄마란다.”

이것이 2000년 음력 섣달의 일이었다. 새해가 지나고 2001년 음력 2월 초 파일 되던 날 그는 채석장에서 일하다가 돌 파편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그날은 마침 시어머니 생일이었다. 2002년 친척이 내게 한 사람을 소개했다. 아버지는 나 혼자 아이를 키울 순 없지 않느냐며 한번 만나보라 하셨다. 당시 나는 부친의 말을 잘 들었기에 곧 만나보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동의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나 역시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우연히 기회가 닿은 부친이 그를 보고는 나 몰래 결정해버렸다. 나는 어쩔 방법이 없어 응낙했다. 어느 날 언니 집에 갔는데 그도 왔다. 그가 펜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썼는데 아이가 보고나서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나중에 내게 말해주었는데 이 아저씨 성이 곽씨라고 했다. 나는 갑자기 아이 아빠가 죽기 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번역이 중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