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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이 딸의 운명을 바꾸다

[정견망] 1996년 우리 가족 세 명은 운 좋게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20년간의 박해 중 우리는 평균적으로 구치소, 노교소, 감옥에서 10년을 보냈다. 사존의 보호 아래 비바람 속에 오늘까지 걸어왔다. 불혹의 나이인 딸을 볼 때마다 그녀의 몇몇 수련 경험이 떠오른다.

1. 대법을 수련한 딸의 ‘외상성 간질’이 낫다

딸은 9살 때 2층에서 떨어져 두뇌에 손상을 입었다. 중학교 때 ‘외상성 간질’ 증상이 나타났다. 발작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며 아파서 벽에 부딪치고 싶어 했다. 북경이나, 성의 유명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보니 “평생 약을 먹어야 하며, 정신적으로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고 운동이나 육체노동을 적게 해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10여 년간 약과 보조식품을 중단한 적이 없다. 동료나 동창들의 ‘간질’로 인한 고통과 좋지 않은 결말을 보고 남편은 딸을 매우 걱정했다. 무남독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편은 의료 사정이 더 나은 시내로 직장을 옮겼다. 딸아이는 집에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무엇이든 그녀의 뜻대로 하며, 학교에서는 노동도 하지 않고 체육 수업도 받지 않았다.

딸의 생명은 대법을 위해 온 것이다. 딸이 어렸을 때부터 선한 마음을 가졌는데 딸의 할머니 집 아래층에 딸보다 몇 살 더 많은 뇌성마비 아이가 있었는데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딸은 유아원에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다 그를 보면 자기 손에 먹을 것이 있으면 친밀하게 다가가서 전해줬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똑똑해 무엇이든 잘 배웠다. 하지만 명리에는 담담해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 학교나 도시에서 많은 상을 받았으나 자랑한 적이 없고 무슨 상을 받아도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나중에 딸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말해주어 비로소 알았다. 학교에서 시험을 봐도 성적이 좋든 나쁘든 말하지 않았고 아이에게 물어보면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말하면 기뻐하시겠지만, 좋지 않은 일이면 슬퍼하실 테니 말하지 않는 것이 낫겠어요. 또 점수는 좋든 나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1996년 8월 우연한 기회에 나와 남편이 대법 수련을 시작했다. 어느 주말에 대학교에 다니는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내가 물었다.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하는데 너도 배울래?” 딸은 조금도 생각하지도 않고 즉시 대답했다. “배울래요!” 이렇게 딸도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딸의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약도 먹지 않았다. 학교에서 체육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조직한 각종 노동 활동에 참여하면서 성적도 점점 좋아졌다.

딸은 단순하고 집착심을 드러내는 것이 비교적 적어서인지 심성도 매우 빨리 제고됐다. 신체에 무슨 ‘병업’의 표현이 나타나도 아무리 괴로워도 말하지 않았으며 심성을 지켰다. 한번은 친척 집에 있을 때 고열이 났다. 친척이 해열제를 주려고 하자 그녀는 “저는 소업하는 거예요. 필요 없어요.” 다음날 열이 내렸다. 친척은 마음이 놓여 말했다 “이 공은 대단하구나.”

2. 대법이 딸을 변화시키다

1999년 7.20 중공이 파룬궁 탄압을 시작해 전국을 적색공포에 밀어 넣었다. 딸은 나와 남편과 의연하고 굳건하게 조사정법하는 수련의 길을 택했다.

2000년 4월 어느 날, 나와 남편, 수련생들이 파룬궁의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 지방 당 위원회에 탄원하러 갔다. 떠날 때 나는 딸에게 말했다. “역사상의 인인지사(仁人志士: 자애로우면서도 지조가 있는 사람, 대중을 위해 몸 바치는 사람)는 총칼을 무릅쓰고 진리를 지키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사부님의 결백과 파룬궁의 진상을 정부에 알리려고 하는데 기껏해야 구류, 노동교화, 실형 정도겠지.(당시는 박해를 부정해야 함을 알지 못했음) 너는 스스로 잘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잘 돌봐야 한단다”하고는 딸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딸은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저를 잘 돌볼 것이니 염려 마세요!” 그때 나는 자신이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딸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지방 당 위원회에 청원한 그날, 우리는 납치돼 구치소에 들어갔다. 소문에 의하면 우리 부부가 노동교화소에 보내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딸이 걱정되고 보고 싶었다. 잡힌 지 한 달이 되기 이틀 전, 딸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엄마 이번에 반드시 저를 포함해 많은 것을 내려놓으셔야 해요. 저 때문에 너무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할지 잘 아니까요.” 나는 딸의 편지를 같은 방에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번에 나는 더욱 굳게 결심했어요. 무슨 노동교화소든 노동개조든 두렵지 않아요!” 마침내 나와 남편은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2001년 8월 우리 집 가족 세 명은 ‘세뇌반’을 거부하며 집을 떠났다가 납치돼 구치소에 갇혔다. 보통은 딸 같은 어린 여성들은 구치소에 들어가면 며칠을 울며 그 안의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 딸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음식을 매우 가리며 안 먹는 음식이 많다. 나는 이렇게 습관이 된 딸이 감옥의 고생을 겪지 못할까 걱정됐다. 매일 점심 밥그릇에 오직 간장 색깔의 면뿐인데 아이가 먹을 수 있을까? 또 집에서 아이는 입맛이 그리 까다로운데 돼지죽 같은 음식에 매일 고된 노예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어느 날 딸을 담당하는 감옥 경찰이 물었다. “딸을 보고 싶어요?” 나는 “물론 보고 싶죠. 누가 자기 딸을 안 보고 싶겠어요!”라고 말했다. 경찰은 “걱정 마세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식사할 때 내가 감방에 들어가니 따님이 반찬을 한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잠시 말을 좀 하고 몸을 돌려보니 그녀는 이미 다 먹었더라고요. 그래서 물었어요. ‘그렇게 빨리 먹다니 적응이 잘 되는가 보네?’ 따님이 말하길 ‘괜찮아요. 적응할 수 있어요.’ 또 일도 매우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견지했기에 나와 남편은 노동교양 2년을 받았고, 딸은 1년을 받았다. 나와 딸이 노동교화소로 보내지는 그날, 딸이 내게 말했다. “공안이 서류를 작성하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어린 아가씨, 잘 생각해 봐. 오직 연마하지 않겠다고 한 마디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딸은 공안을 한번 보고 펜을 들어 조금도 주저 없이 ‘대법을 끝까지 수련하겠음!’이라고 썼다고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딸이 자랑스러웠다. 딸이 허리까지 자란 머리카락을 보고 말했다. “노동교화소에는 머리 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단발시킨다는데.” 그녀는 말했다. “자르려면 자르라지”. 딸이 9살 때 내가 집을 떠나 외출해 학습할 때 혼자서 머리를 빗지 못할까 염려되어 단발을 시켰는데 나중에 그녀가 말했다. “나는 반드시 머리를 잘 빗고 잘 땋아 절대 단발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부터 10여 년간 이따금씩 머리를 가지런히 하기 위해 자르는 것 외에 딸은 머리를 자른 적이 없었다. 가끔 머리를 자를 때도 몹시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현재 전부 다 잘라야 하는데도 오히려 담담했다. 오히려 내가 그녀의 긴 머리를 아까워했다.

노동교화소에 도착한 그날, 우리 둘은 헤어져 같은 중대에 속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아침을 먹을 때 식당에서 우연히 딸과 그녀의 포 꼬투리(전담 감시원)를 만나 물었다. “대전조(노동교화소에서 농사일을 전담하는 조, 가장 고생스러움)에 소속된 거 아니니?” “맞아요!” “어떡하니?” “괜찮아요! 별일 없어요.” 딸이 그렇게 담담한 것을 보고 나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기 위해 머리를 들어 천장만 보았다. 딸이 지나간 후 나는 비로소 고개를 내려 눈물을 닦았다. 옆에 있던 포협이 물었다. “아주머니 너무 괴로우시죠?” “괴로운 게 아니라 감동한 거예요!”

며칠 후 어느 날 오후 일이 끝나고 밥을 먹을 때 딸이 멀리서 날 불렀다. “엄마! 엄마!” 내가 쳐다보니 그녀는 맨발로 바지를 무릎까지 말아 올리고 두 손은 신발을 들고 팔짝 뛰어 내 앞에 오더니 말했다. “오늘 땅을 팠어요!” 딸은 신을 바닥에 던지고 두 손을 뻗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 손이 온통 피멍울이 맺혀 있었다! 내 마음이 바늘에 찔린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딸이 말했다. “울긴 왜 울어요. 그저 피가 조금 맺힌 걸 가지고.” 나는 억지로 진정하고 말했다. “아이고! 내가 장갑이라도 하나 가져와야겠구나!”

어느 날 나는 화장실에 가서 양치할 때 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엄마가 등을 좀 밀어줄게!” 딸은 기뻐하며 수건을 내게 주었다. 수건을 받아서 보니 찐득해 기름투성이였다. “어휴, 이 수건을 왜 빨지를 않니?” 딸이 말했다. “엄마 내가 손으로 호미를 잡아 땅을 파니 힘이 없어요. 수건도 못 빨아요.” “엄마가 빨아줄게.” 한번 힘을 쓰니 수건이 뜯어져 버렸다. 나는 아무 일 없는 척하고 말했다. “돌아가 수건을 하나 사야겠구나.”

나는 올케한테 쓰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이 엄마인데 어려서부터 자라는 것은 보았지만, 아이가 그렇게 강인하고 고난을 견뎌내며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 줄은 몰랐네. 무슨 힘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네.”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1] 그녀는 이미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 됐다.

3. 대법은 딸이 세간의 정을 담담히 보게 만들다

딸은 20대에 어느 남자와 연애하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이미 나와 그들의 결혼 문제를 상의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파룬궁 탄압이 시작된 후 딸에게 소식을 듣지 못했고 남자 친구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알았는데 남자 쪽 아버지의 그 윗대 어른이 ‘상공업 겸 지주’여서 토지개혁 때 중공에 의해 총살당했고, 부모는 문화혁명 중에 비판을 당했었다. 중공의 탄압이 두려워 이번 혼인을 막았던 것이다. 내가 딸의 이 ‘정의 관’을 넘지 못하고 있을 때 딸은 진작 정의 얽매임에서 벗어났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

몇 년 후 딸은 내게 어느 동창이 자기를 좋아한다며 나와 남편에게 의견을 물었다. 우리는 말했다. “만일 너희들이 진정 좋아한다면 무슨 의견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수련인이니 일을 할 때 남을 고려해야 한다. 남자 쪽 부모에게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남자 쪽 부모도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 그들은 연애를 지속했다. 2005년 우리 일가 3명은 재차 노동교화를 당했으며 딸은 나와 마찬가지로 3년 형을 받았다. 처음에 딸의 남자 친구는 우리를 위해 이리저리 바빴으나 나와 딸이 감옥에서 거의 나올 때가 되자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감정에 여러 번 충격을 받은 딸이 이 관을 넘을 수 있을지 걱정됐다. 하지만 딸은 오히려 이 일을 담담히 보았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결혼은 인연이 있어야 해요. 인연이 없으면 할 수 없어요.” 딸이 출옥하자 이미 결혼한 그 남자는 늘 딸을 피했다. 딸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무슨 원인이든지 너의 선택을 이해해. 우리는 비록 부부가 되지 못했지만 계속 친구는 될 수 있어!” 딸의 마음가짐과 처리 방식을 알고 나는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수련은 곧 이 마난(魔難) 중에서 수련해야 하며, 당신이 칠정육욕을 끊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 담담히 여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이 그런 것들에 집착한다면 당신은 수련해 내지 못한다.”[2] 나는 딸이 성숙한 것을 보고 정말 기뻤다.

4. 이익에서 명명백백하게 손해를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다

99년 후 무고한 탄압과 박해를 받아 나와 남편은 공직에서 제명되고 딸도 이 때문에 여러 번 직장을 바꿔야 했다. 어느 직장을 가든 그녀는 연공인의 진선인(眞·善·忍)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탐내지 않고 남의 것을 갖지 않으며, 거짓으로 속이지 않으며 심성을 지켰다. 직장 상급자와 동료들이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2016년 나와 딸은 감옥에서 돌아와 알았다. 집에 놓아두었던 몇만 위안의 진상 화폐를 만드는 데 쓰려고 둔 잔돈을, 집안 친척이 딸이 일을 도울 때 쓰는 잔돈으로 알고 직장 장부에 넣어버렸다.(그때 딸은 친척이 하는 가게에서 장부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잔돈 액수와 장부의 모자라는 금액과 거의 비슷했음) 그러나 이 돈은 모두 수련생들이 아끼고 아껴서 모은 진상 자료를 만드는 돈이 아닌가! 딸과 나는 대법에 절대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이 무지 속에서 사업을 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집안 경제가 매우 어렵더라도 나와 딸은 돈을 충분히 모아 자료점 수련생에게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친척을 찾아가서 돈의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가기 전 딸이 진지하게 내게 말했다. “엄마 우리가 마음을 바로 놓아야 해요. 우리는 돈을 달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려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오해해 그들이 무의식중에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해요.” 친척이 그 말을 듣고 우리에게 돈을 돌려주겠다고 하자 딸은 “우리는 친척인데 몇 년간 당신들도 우리를 돕느라 매우 힘들었으니 돈은 우리가 보충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0여 년이 지나도 딸의 이 모든 경험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대법이 그녀를 용련하고 개변한 것이며 일체를 주었다. 정법수련 종결의 최후 시각에 우리는 더욱 최후의 길을 잘 걸어야 한다. “이 만고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기라! 이 수련(修煉)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라! 당신들이 걸어온 길을 소중히 여기라!”[3] “수련을 처음같이 하면, 반드시 성취한다!”[4]

사부님 감사합니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 ‘홍음-마음고생’[2] 리훙쯔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대만 법회에 보내는 축사’[4]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