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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얻은 경력을 돌아보다

작자/북경대법제자 군자(君子)

【정견망】

나는 올해 51세이며 십대부터 수행을 좋아해 늘 사람이 수련할 수 있게 하는 정법(正法)을 찾고 싶었다. 나는 수많은 기공을 배웠고 늘 서점에 가서 각종 기공서적과 기공잡지를 읽곤 했다. 또한 주역, 명리, 풍수지리 류의 것들을 읽었다. 1993년에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열기가 뜨거웠던 기공을 배웠는데 사실은 가짜 기공이었다. 수련생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바치게 했는데 우리 집에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어서 한동안 배우다 중단하고 말았다. 1996년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파룬궁을 접촉했다.

내가 파룬궁을 접촉한 것은 한 친척이 우리 집에 왔는데 당시 차량 운전사가 파룬궁 수련생이었다. 이 운전사는 내게 파룬궁을 불가공이라고 소개하면서 부처 수련이라고 했다. 나는 부처 수련이라는 말에 호감이 생겼고 이 공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먼저 책을 좀 보게 해 달라고 했다. 내가 먼저 본 것은 《전법륜》이었는데 당시 또 자세히 보지 않았고 봤어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병에 걸려 입원했는데 병원에서 《중국법륜공(수정본)》을 보았다. 이 책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파룬궁이 ‘진선인(眞善忍)’ 표준에 따라 수련을 지도하는 것임을 알았다. ‘수련’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나는 너무 좋았다. 책을 볼 때 신체가 편안함을 느꼈고 호흡이 시원했다. 나는 시간만 있으면 보았고 퇴원한 후에도 날마다 책을 보았다.

집에서 책에 쓰인 연공 도해에 따라 혼자 연습했다. 며칠 안 되어 머리가 아프고 온 몸이 다 아팠다. 공부가 깊지 않고 오성이 차해서 사부님께서 소업해주시는 것임을 모르고 생각하기를 ‘아마 나는 이 공을 배울 수 없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들고 사부님의 법상을 마주하고 말씀드렸다. “저는 아마 이 법을 배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병이 나으면 다시 배우겠습니다.” 당시에 무엇이 내 신체에서 천천히 나가는 것을 느꼈고 잠시 후 신체가 괴롭지 않게 되었다. 신체의 이런 변화가 있어도 나는 깨닫지 못하고 책을 옷장에 잘 넣어두었다.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동수가 가족을 통해 남색의 사부님의 교공 도해를 보내왔다. 내가 펼쳐보았을 때 갑자기 신체 근육이 뛰면서 머리가 청성해지고 강렬한 감응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또 옷장에서 책을 꺼내 계속 배우게 되었다.

책에서 사부님의 질의응답을 보는데, 연공하면서 약을 먹으면 이는 기공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거라고 했다. 나는 늘 기공을 연마하면 병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공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니 정말 믿지 않았다. 하지만 책에는 책에서 신체 정화 후 다시는 병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이렇게 좋은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인지 한번 시험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천하는 중에 여전히 자기의 병을 내려놓기 어려웠다. 당시 병원에서 내가 결핵에 걸렸다고 하며 폐의 혈관이 파열되었으니 만일 잘 치료하지 않으면 더는 살 수 없다고 했다. 며칠간 사상적 갈등을 거친 후 나는 파룬궁을 연마하기로 했다. 약을 먹지 않았고 이틀을 끊었다. 마음은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또 약을 먹으려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만일 약을 먹는다면 연공인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나? 또 이틀을 마음 졸였다. 최후에 나는 죽으면 죽는 거지 하고 한번 죽으면 끝이 아니냐. 이번에 내가 생사 염두를 내려놓자. 자기 약을 모두 수습하여 시골에서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나이든 사람에게 보냈다.

그러나 며칠 안 되어 또 몸에 감기 증상이 나타났다. 두통이 심했고 온 전신이 뼛속까지 아팠다.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고 사부님께서 내 신체를 정화하고 소업해주시는 것임을 알았다. 사부님은 “당신의 온몸을 정화(淨化)해야 하며, 반드시 전부 정화해야 한다. 병근(病根)은 이미 떼어버렸고, 남은 요만한 검은 기, 그것이 스스로 나오게 하여.”(《전법륜》)

신체 소업이 조금 가벼워졌을 때 나는 포대자루와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밤을 따러갔다. 나의 병이 다 나았고 며칠 온 가을 내내 나무에 오르고, 마대를 메고, 아니면 땅을 가는 농사일을 하는데 피곤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진정으로 병 없이 가벼운 상태를 체험했고 정식으로 대법 수련으로 들어왔다.

우리 마을은 일천여 호, 삼천여 명이 사는 큰 촌이다. 어떤 이웃 역시 파룬궁을 따라 배웠다. 우리 몇 명은 마을에서 홍법을 시작했고 점점 배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웃에서도 배우러 왔다. 우리 현의 보도원도 현의 동수를 조직하여 우리 이곳에 홍법하러 왔다. 노동수는 우리가 사부님 대법 경서 구매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배우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져 우리 촌에 몇 개 연공장을 조직했고 나는 수천 위안을 들여 칼라 TV와 VCD를 사서 사람들이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와 공법 영상을 보도록 도왔다. 그때 우리 집에는 마당에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99년 7.20 강택민(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직전까지 우리 촌에서 일백여 명의 사람이 파룬궁을 연마했다.

눈 깜짝하는 순간 이미 20년이 지나갔다. 이 20년간 우리는 처음에 망연하던 데서 이지적으로 걸어왔고 현재 갈수록 성숙해지고 있다. 우리 촌의 법공부팀은 줄곧 오늘까지 견지해오고 있다. 비록 많은 사람이 중공 박해의 압력하에 연공을 하지 않지만 그들 내심에 “진선인”의 종자를 심어놓았고 모두 대법이 좋음을 알고 사부님은 가장 바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머지않은 장래에 그들도 대법 수련으로 걸어 들어오고 우리 마을의 중생들이 과거처럼 함께 파룬궁을 배우게 될 것임을 믿는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1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