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이 일은 가슴이 시린 일인데 2019년 9월 발생했다.
아이패드(iPad)는 내가 법공부를 하는 법기인데 겨우 1년 넘게 사용했는데 액정이 까맣게 되었다. 전자상가에 가서 수리하고 나왔는데 황혼 무렵에 비가 좀 많이 내렸다. 옆에 있는 맥도날드에는 식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문밖 계단에도 사람들이 앉아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내가 보니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때가 흐르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도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눈빛은 또렷하고 탈속한 차분함이 있었다.
그 옆에 한 노숙자가 플라스틱 죽그릇을 들고는 손가락을 젓가락 삼아 죽을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죽의 색깔이 지저분했다. 길가는 행인들은 모두 따뜻한 음식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총총히 달려갔는데 이 가련한 두 중생은…
나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부근에 가서 계란과 고기만두 스낵 두 개를 샀다, 먼저 미치광이에게 주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열심히 먹기만 했는데 그에게 9자 진언을 기억하라고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또 노숙자에게 도시락을 건네며 드세요 라고 했더니 그는 놀라고 감동했다. 그에게 9자 진언을 기억하라고 하자 그는 오열하면서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겨우 입을 열더니 “파룬따파… 리훙쯔(李洪志) 사부님!”라고 말했다.
그는 길림성에서 왔다고 했다. 파룬궁을 연마하다 노교소에 2년 반을 갇혀 있었고 출소한 후 직장에서 해고되었다고 했다.
알고보디 그는 뜻밖에도 동수였던 것이다! 나는 매우 놀라 그를 맥도날드로 데려다 말을 걸었다.
입구로 들어가는데 그는 맥도날드 점원이 자신을 들어오지 못하게 할까 겁을 내면서 주저했다. 또 고개를 돌려 쓰레기를 줍던 검은 봉투를 밖에 놓고는 어쨌든 아무도 안 가져갈 거야 라고 했다.
내가 “콜라 큰 거 작은 거 어떤 걸로 드릴까?” 묻자 그는 작은 거라고 말했다.(물론 나는 큰 컵으로 주문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약 50대로 보였다. 충직하고 모습이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좀 길었고 키는 보통보다 큰 편이었다. 보기에 훤칠한 동북 사람의 골격이 있었으나 장기간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배가 홀쭉했다. 그는 길림성 연변 왕청현(汪清縣) 출신으로 학력은 중졸이었다. 1999년 직장 여자 상사(노동조합 주석처럼 보임)을 통해 《전법륜》을 겨우 몇 번 보았는데 박해가 시작되었다. 1999년 자기 집에서 단체로 연공할 때 경찰이 집을 수색해 사람을 잡아갔다. 그는 노동교양 2년 처분을 받았는데 나중에 반년이 더 연장되었다.
2년 반 후 노교소에서 돌아왔지만 오갈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직장에서도 해고당했다. 경찰이 신분증마저 몰수했다. 또 노교소에서 나온 후 다른 동수를 찾지 못했고 그에게 법을 전해준 상사마저 노교소에 끌려갔고 나중에 박해로 사망했다.
그는 생존과 소란을 피하기 위해 장춘, 북경 등지로 가서 몇 년간 막노동 일을 하며 살아왔다. 북경에 있을 때는 신분증 검사를 받았으므로 남방이 좀 편할 것으로 생각해 남방에 있는 이 대도시로 온 것이다. 하지만 십년이 흐르자 이곳마저도 조사가 갈수록 엄해져 신분증이 없으면 방을 빌리거나 일거리를 찾기 힘들었다. 또 장거리 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어 다른 곳으로 떠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오직 막노동처럼 힘든 일을 하거나 폐품이나 넝마를 주워 생활을 유지하며 풍찬노숙하는 노숙자가 되었다. 내가 이곳도 겨울에는 꽤 추운데 어디서 자는지 묻자 북방보단 훨씬 나아서 동사하진 않는다고 했다. 저녁이면 공원이나 다리 아래서 노숙을 한다고 했다.
어떤 때는 경찰이 그들을 이런 유랑자를 잡아 차에 태우고 교외에 떨궈준다고 했다. 때로는 구호소에 데리고 가지만 그들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곳은 유치장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배추를 삶은 물을 먹고 자유가 없어서 시내로 돌아온다고 했다. 늘 경찰과 보안이 오라 가라 하는데 그들을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화가 나서 경찰을 몇 번 때렸는데 잡혀 열흘간 구류되었다. 이것도 구치소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일이었다.
그는 휴대폰이 없었고 전처가 아이들과 연락을 못하게 했다. 집에 노인 중에도 세상을 떠난 분이 있었다. 최근 몇 년간 이미 친척들과 연락이 끊어졌고 사회와 이탈되어 사람과 말하는 일도 적어졌고 또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처음에 그가 말을 할 때 말을 더듬었던 것이다. 서술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유와 어투가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부 세부적인 일을 기억하려면 대뇌가 아직 깜빡 깜빡 하는 것 같았다.
정법홍세(正法洪勢)를 말하자 그는 기본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그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이 어디가 잘못인가 모르겠다며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자기가 어느 시 파출소를 찾아가 신분증을 만들려고 했는데 신분증 번호를 말하자 경찰이 물었다고 한다. “당신 파룬궁을 연마한 적이 있지 않소?” 그는 말했다. “나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겠소. 파룬궁이 어디가 잘못되었소?”
경찰이 어떻게 답했을까? “꺼져!” 발로 그를 차고 그를 문밖으로 쫓아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탄복했다. 만일 처세에 능한 사람이었다면 대법에서 이렇게 오래 벗어나 있었어도 이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신분증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또 고귀한 것은 몸이 역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소침하거나 절망하거나 잘못을 후회하지 않았고 선량하고 정직하며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대화 도중 알 수 있었는데 그는 전통적이고 정의감이 있으며 정직하고 순박했다. 그는 현재의 도덕이 어지러운 현상에 대해 몹시 분개했다.
최근 몇 년간 그는 동수를 만나지 못하고 대법 책도 보지 못했으며 연공도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진상 소책자를 줍거나 9자 진언을 외우며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매번 이렇게 하면 좋은 일을 만났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그저 “파룬따파 하오”를 외며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아 깨어나 보니 마음씨 좋은 사람이 빵을 옆에 두고 갔다는 것이다. 한 번은 오토바이로 손님을 태워 영업하는 사람이 《전법륜》을 읽고 있어서 그에게 달려갔더니 즉시 책을 거두면서 정색하면서 경계했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걱정하는 것을 보고 괜찮다고 하며 떠났다.
내가 그에게 《전법륜》을 보고 싶은지 묻자 “가져와서 보여주면 좋지요.”라고 했다. 나는 정법 노정을 이야기 해주고 iPad를 열어 새로운 《/span>논어를 읽어주었다. 또 사부님께서 46권의 책을 발표했다고 알려주고 여전히 수련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대화중에도 혹여라도 잊어버릴까 세 번이나 《전법륜》을 구해달라고 당부했다.
내가 “모 수련생”이라는 가명으로 그를 소선대에서 퇴출시키자 그는 매우 기뻐했다. 그에게 검은 소굴에서 삼서(三書) 따위의 보증서를 쓴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내가 호신부를 주자 그는 기뻐하며 받았다. 나는 돌아가 동수들과 상의하여 어떻게 도울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일단 가장 급선무는 그에게 잠자리와 일거리를 찾아주고 수련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틀 후에 보기로 약속했다. 이틀 후 못 보면 나흘 후에 보기로 했다. 나는 지갑에 돈 1천 위안이 있었는데 그에게 500위안을 주자 그는 매우 감격했다. 나는 사부님께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감사드리라고 했다.
나는 내 맘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틀 후 나는 세 동수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갔다. 나는 다른 동수들이 그를 만나 관찰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에게 대법 책을 주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먼저 휴대폰을 하나 준비했다. 비밀 번호를 설정하고 그 속에 대법서적과 연공음악 진상자료을 넣었다. 나는 또 갈아입을 새 셔츠를 하나 샀다. 식당에 들어가서 만날 때 종업원이 유랑자로 여겨 들어오지 못하게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발정념을 했으나 가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우리는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는 종적이 없었다. 가랑비 속에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두 정거장 정도를 걸었는데 우리가 만났던 그 지점까지 그를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 그는 늘 거기에 앉아 있다고 말했다. 나흘 후 내가 또 약속 지점에 갔으나 여전히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여기까지 쓰고 나는 매우 자책했다. 본래 우리가 만났던 곳에서 약속을 잡아야 했는데 내가 지하철 입구에서 만나자고 기어코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그 지하철 입구는 상업 중심지였고 시기적으로 10월 1일(중공 건국기념일)이 가까웠다. 때문에 지하철 인근 거지나 노숙자 등이 전부 다 사라져 어디로 보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 내가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단지 나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그와 만났던 지점으로 가자면 여기서 10여 분을 더 걸어야 했다. 나의 이기심 때문에 그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 그가 여기에 도착했으나 쫓겨 갔거나 다른 데로 보내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해후한 지점에서라면 그는 훨씬 안전했을 것이다.
iPad는 보통 고장이 잘 나지 않는다. 바로 iPad를 수리하는 기회에 사부님께서 지난날의 동수를 만나게 하셨고 우리 지역 동수들이 그를 돕도록 안배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나는 깊이 참회했다. 사심(私心)이 커서 사람을 해쳤다. 나는 “일을 하는데 남을 먼저 고려하지”(《전법륜》) 못했다. 이 교훈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최근 어느 동수가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명혜망 2019년 12월 3일 《청도시에서 하립방이 학살당했는데 장기적출이 의심된다(青島市何立芳被虐殺疑被活摘器官)》는 글을 보았습니다. 정말 박해받은 지 17일이 된 동수가 있었는데 노숙자로 신분증도 없었고 주거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금년 5월 집으로 돌아갔다가 7월에 이미 잔혹하게 살해당했는데 이전에 말씀하신 동수와 비슷해서 내심 괴롭습니다. 내가 잘난 체 한 것을 매우 자책합니다. 반드시 동수의 현실적인 정황을 알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겠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수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이 글과 동수의 편지는 10월 1일 전의 일을 찾아보게 했고 다 쓰지 못한 본문을 완성했다.
다른 동수도 이 글을 보자마자 전에 내가 말한 그 예전 동수가 생각났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와 그가 만난 지점이 우리집에서 비교적 가까운데 나는 이후 이곳을 가는 김에 한번 가보았지만 여전히 보지 못했다.
우리 이 소위 국제 대도시에서 번화한 경제하에서 길거리는 도처에 화려한 옷차림이다. 부지불식 중에 원래 걸식하던 예술가. 정신병자, 유랑자 등이 한꺼번에 다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길에 좌판을 깔고 장사하던 노점상들도 다 사라졌다. 인터넷에도 노숙자의 장기가 적출 당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불쌍한 하층 민중들이 장기적출의 목표가 되는데 절대 헛소문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리를 낼 수 없다.
물론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한 것에는 다른 가능성도 있으며 그가 잘못되는 쪽으로만 추측할 필요는 없다. 아마 그가 스스로 물러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 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구세력이 동수를 박해하는 사악의 안배 중에 이런 것도 있다는 것이다. 즉 동수가 법을 얻어도 수련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고생을 달게 겪는 수련인이 신분증이 없어서 어디서도 받지 않으며 마지막에는 노숙자가 된 것이다. 기본적인 생존 조건마저 박탈당했다. 유형적인 감옥이나 간수소에서 나왔지만 무형의 사회 저층이란 감옥에 빠져든다. 한걸음도 옮기기 힘들며 전혀 나올 수 없다.
동수들이 이런 지난날 동수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기 바란다. 이런 동수를 만나는 것이 특수한 사례가 아닐 수 있다.
겨울이 왔는데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사부님께 부탁드렸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5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