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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위해 온 생명

글/ 중국 대법제자 법연(法緣)

【정견망】

나는 법연(法緣)으로 올해 예순 다섯이며 98년부터 대법을 수련했다. 20여 년간 수련하면서 사부님께서는 나를 위해 온갖 마음을 다 쓰시면서 무수한 고난을 대신 감당하셨다. 사존의 은혜를 표현할 그 어떤 적합한 말도 찾을 수 없으며, 오직 내가 잘 수련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여 보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래에 내가 20여 년간 대법을 수련한 일부 체험과 비교적 감동이 컸던 이야기들을 써내 여러분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굴곡과 고생이 많았던 전반생

나는 대가족에서 출생했다. 모친은 우리 자매 6명 외에 오빠 셋을 낳아 모두 9남매가 있었다. 부모님까지 11명이 두 칸 초가집에 살았는데 내가 태어났을 당시 큰 언니는 이미 시집을 갔다. 나는 집에서 8번째였다. 큰 언니 말에 따르면, 그때 내가 태어났을 때 마침 언니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는데 음력 2월 14일 새벽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을 때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운 생활에 날씨까지 매우 추워서 모친은 나를 낳은 후 축축한 땅바닥에 방치해 동사시키려 하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에 오던 큰언니가 길에서 나를 주웠고 낡은 솜옷으로 나를 싸서 더운 구들장 위에 두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잠시 후 살아났다. 하늘은 나에게 한 차례 살아갈 기회를 준 것이었다.

비록 살아나긴 했지만 우리 집에선 자매가 너무 많아 나를 수용할 수 없었다. 내가 9개월 되었을 때 부모님은 또 한 번 나를 버리셨다. 부모님은 나를 아이가 없던 숙모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이렇게 나는 아직 기억도 없을 때 그 집을 떠나 새 가정에서 새로운 인생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양부모 집에서 철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었다. 9살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여 다른 집 아이들은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면 즐겁게 놀았는데 나는 집에 돌아가면 집안일을 해야 했다. 마당 쓸고, 돼지우리에 가서 흙을 갈아주는 등 온갖 집안일을 했다.

내가 좀 자랐을 때는 매일 마실 물이나 생활용수 등을 모두 10여 미터 깊은 우물에 가서 길어 올려야 했다. 당시 나는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아 지게도 질 수 없었고 갈고리를 끌고 집으로 와야 했다. 다른 어린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휴식하는데 나는 점심시간에 야외에 나가서 풀을 주웠다. 가을에는 나는 어른들처럼 늘 한밤이 되기를 기다려 생산대에서 나눠주는 농산품을 가지고 돌아와야 비로소 쉴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어느 가을날 40kg 안 되는 여자 아이로서 나는 생활에 쫓겨 50kg이 넘는 무거운 짐을 진 적도 있다. 때문에 나는 허리를 크게 다쳐 법을 얻기 전까지 날마다 요통에 시달려야 했다.

매년 정월은 어린이들에게 가장 기쁜 날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어느 정월 초닷새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양어머니가 풀을 주워오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새 옷을 벗어놓고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광주리를 둘러메고 야외에 가서 풀을 긁어모아야 했다. 들판에서 나는 혼자 밭둑에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소리 질렀다.

“하느님! 저는 왜 이렇게 고생스럽습니까? 이런 날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날 나는 정말 많이 울었고 매우 상심했다. 실컷 울고 난 후 또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울고 난 후 즉시 풀을 베기 시작했으며 해가 질 때까지 광주리에 풀이 가득 차자 비로소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지닌 채 돌아왔다.

이런 일은 내가 어렸을 때 생활 중에 아주아주 많았다!

어렵사리 나는 성인이 되었다. 양어머니는 마을에서 자신을 모실 데릴사위를 구하려고 생각했다. 나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시 잘못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시달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운명과 싸우기로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차라리 외지 멀리 다른 곳에 시집가는 게 낫지 우리 마을에선 신랑을 찾지 않겠어요.”

이렇게 해서 겨우 데릴사위 구하려는 생각을 단념시켰다. 나는 농촌에서 나이가 많을 때까지 살며 견뎠고 남편감을 찾지 않기로 했다.

1977년이 되자 대학입시가 회복되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고 마침내 소원을 풀었다. 나는 사범학교에 합격했고 국가에서 밥을 먹여주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집 아이들은 시험에 붙은 후 부모가 모두 기뻐했지만 나는 양부모로부터 냉대를 받아야 했다. 중국에는 오는 손님에게 만두를, 떠나는 사람에게 국수를 대접한다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나는 입학하러 집을 나서는 그날 간단한 식사만 하고 집을 떠났다. 그 심정은 정말 그 속에 있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양부모는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다. 나는 돈을 빌려 양부모에게 주었으며 그제야 비로소 집에 손님을 몇 명 초대하여 정식 결혼식을 치뤘다. 결혼 후 집에서는 나에게 조금도 보조를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늘 돈을 요구했다.

그때 나와 남편의 매달 월급은 합해도 백 위안이 못 되었지만 6명 반을 먹여 살려야 했다. 결혼 후 거의 10년간 나와 남편은 명절에도 맛있는 것을 먹지 못했다. 한번은 신년을 지냈는데 남편은 세 살배기 딸에게 대하 새우 두 마리를 사왔다. 나는 물에 삶아 껍질을 벗겨 아이에게 먹였지만 우리 둘은 새우 맛도 몰랐다. 이래도 양부모는 늘 불만이었다. 어떤 때 일이 바빠 제때 돌아와 그들의 일을 도와주지 못하면 문을 들어서자마자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한번은 멀리서 그들을 보러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양아버지는 늦게 왔다고 욕을 하며 나를 쫓아냈다. 욕을 하는 바람에 아이가 내 품에서 잠이 들 때까지 그날 나는 한 끼도 못 먹고 물도 마시지 못했으며 한바탕 욕만 먹고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부모는 여태 나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배어 7달 되었을 때 나와 남편에게 쟁기를 끌고 그들의 밭을 갈게 했다. 누구라도 우리를 보곤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정말 방법이 없었다. 운명이 쳐놓은 그물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나를 낳은 친부모가 이 집에 보낸 것을 매우 원망했다. 또 양부모가 인정이 없음을 원망했다. 어쩔 수 없어 나는 몇 번이나 생을 마감하려 했다. 그러나 암암리에 일종의 힘이 나를 이끌어 목숨을 계속 버티게 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아무것도 모르며 바쁘게 정신없이 사는 동안에 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 내가 겨우 40세 되었을 때 고칠 수 없는 십여 가지 큰 병에 걸렸다. 병을 고치기 위해 나는 각 시의 대, 소 병원을 다 돌아다녔으며 중의와 양의가 처방해준 온갖 약을 몇 상자나 먹었다. 어떨 때 한약을 먹는데 반년이나 먹었다. 양약을 먹을 때 몇 년간 못 본 친구가 다시 나를 만났을 때 알아보지 못했다. 호르몬 약을 먹었는데 신체가 본래 허약한 나는 누렇게 뜨고 부었다. 생명이 이미 끝에 도달했다.

나는 하루가 마치 일 년처럼 힘겹게 지내야 했다. 매월 월급은 이미 약 비용으로도 부족했다. 나는 머리를 들어 하늘에 고함을 질렀다. “하느님 이런 날이 언제 끝이 납니까?” 남편은 나의 병 치료를 위해 매월 월급을 다 내게 주었고 이렇게 계란으로 바위 치듯 지냈는데 아무 힘이 없었다.

2. 대법을 얻어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얻다

1998년 겨울 나는 운 좋게 대법을 얻었다. 대법이 나를 살렸고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주셨다. 그해 이 보서(寶書)를 얻은 그날 이후 나는 날마다 책을 읽었으며 일 주일 만에 《전법륜(轉法輪)》을 다 보았다. 책을 볼 때 나는 끊임없이 설사를 했는데 일주일 내내 설사를 했다. 책을 다 보자 설사가 멈췄고 내 몸에 있던 십여 가지 질병이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렸다. 그 짧은 7일간의 시간에 나는 온 몸에 병든 환자가 갑자기 병 없이 가뿐한 즐거운 사람으로 변했다.

나의 이런 변화 때문에 친척과 친구들을 포함해 모두 16명이 대법으로 들어왔다, 당시 나는 아직 공법을 배우지도 않았으며 《전법륜》을 한번 보았을 뿐인데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정말 기뻤다! 나는 사부님에 대한 감격의 정을 세상에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진정 살아있는 의의를 알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일생을 사부님께 바치겠다고, 대법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3. 대법 속에서 승화된 생명

그때부터 나는 진정한 수련의 길로 들어섰다. 일요일에 나는 대법의 다섯 가지 공법을 배웠다. 처음부터 정말로 진정한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수련을 시작한 후 나는 시시각각 대법의 표준으로 엄격히 자기를 단속하며 심성이 부단히 제고되고 승화되었다.

수련하기 전에 나는 속이 좁았었는데 대법을 수련한 후 마음이 넓어졌다. 수련 전에는 성질이 급했고 집 안팎이 모두 불안정했는데 지금은 일을 만나도 참아내며 이전의 나쁜 감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집 안팎으로 모두 화목하게 지낸다. 수련 전 이기적이며 마음이 좁았는데 지금은 사심 없이 중생에게 착하게 대한다.

20여 년간의 대법수련으로 나는 친구들과 모두 잘 지내며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선량하게 대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나로부터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미 대법으로 들어왔고 들어오지 않아도 진상을 알고 삼퇴하여 대법의 복을 얻었다.

평일에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데 아끼지 않고 자신을 투입했다. 오직 중생을 구도할 수 있고 세인을 구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나는 금전을 아끼지 않았다. 20여 년의 홍법동안 내 개인의 월급을 내어 홍법에 사용했다. 특히 막 법을 얻었을 때 내 월급이 얼마 안 되었고 또 법을 얻기 전 온몸에 병이 있었기에 집에는 저축한 돈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친척들이 법을 얻게 하기 위해 월급에서 녹음기 6대 비디오 1대 VCD 플레이어 두 대를 샀다. 나중에 MP3가 나오자 중생이 법을 얻도록 30여 대를 사서 무료로 나눠주었다. 나중에 일부 오성이 좋은 사람이 내게 돈을 주어 다 합하면 백 개가 넘는 기기를 나눠주었다. 이렇게 매달 월급의 대부분을 사람을 구하는데 썼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아끼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나와 남편은 그저 배만 부르면 만족했다. 옷도 단정해보이기만 하면 충분했다. 대법이 위대하면 사존께서도 위대하시다. 대법과 사존께선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대법이 없이는 나도 없고 나의 생명은 은사님이 주신 것이니 마땅히 은사님께 보답해야 한다. 내가 건강히 현재까지 살아있는 것은 내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친지들 중 이미 백 명이 넘는 이들이 《전법륜》을 보았고 그중 20여 명은 수련으로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모두 대법을 인정하고 많은 친구들도 대법의 덕을 보았다.

4. 대법이 주조한 생명으로 마음을 써서 사람을 구하다

사람을 구하는 방면에 나는 전심전력으로 했다. 처음에 퇴직하기 전에 나는 직장에서 사람을 구했고 주변 동료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2004년 삼퇴를 시작한 이후 나는 직장 동료를 거의 다 삼퇴시켰다. 오직 몇 명만이 진상을 알고 있음에도 특수한 원인으로 삼퇴하지 않았다. 나는 또 지혜롭게 1천여 명의 학생을 삼퇴시켰다. 평일에 친구 친적들의 집에 경조사가 있으면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참가하여 연회석상에서 나는 삼퇴를 권했다.

그중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큰아버지 장례식에서 40여 명의 세인들을 삼퇴시켰고 일백여 명이 진상자료와 호신부를 받았다. 나는 매번 활동에 진상 자료와 호신부를 주었으며 구하는 효과가 매우 좋았다. 더 많이 구하기 위해 나는 많은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고향에서 프린터를 사서 진상 자료를 만들고 직접 나누어 주었다. 많은 소책자를 찍었으며 날마다 정거장에 나갔다. 나중에 시내 큰 자료점에 가서 많은 진상스티커를 가져다가 붙였다.

한 번은 음력 12월 23일의 일이었다. 오후에 80여 장의 큰 진상 스티커를 가지고 여섯 마을을 돌면서 각 촌을 연결하는 길을 걸으며 80여 장 스티커를 전부 다 길옆 전봇대에 붙였다. 그날 다 합해 나는 30리가 넘는 길을 걸었다. 하지만 사부님의 보호 아래 나는 하나도 피로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음력 12월 30일의 일이었다. 가족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옷을 입고 40여 장의 큰 스티커를 가지고 이웃 마을 3곳 주요 거리의 전신주에 모두 스티커를 붙였다. 세인들은 신년이 되는 첫날 거리에 가득 찬 진상스티커를 보고 이득을 볼 것이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나는 어디든지 갔으며 그곳 중생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진상 스티커는 항상 지니고 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붙였다.

떠 한번은 북경 만리장성에 40여 장의 스티커를 부쳐 장성을 올라가는 세인들이 모두 진상을 볼 수 있게 했다. 천안문 거리 옆의 난간에, 북경대학 거리 전신주에, 공원 전신주 등 진상스티커를 붙일만한 곳이면 나는 모두 붙였다.

한번은 북경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길에 동영(東營) 휴게소가 있었다. 나는 휴게소 적합한 위치에 진상 스티커를 붙였다. 그날 사부님의 격려로 나는 네 개의 해가 동시에 빛나는 미묘한 장면을 보았다. 이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 직장 사무실의 컴퓨터에 놓아 많은 동료들이 보고 이익을 보았다. 사람을 구하는 십여 년간 직접 5,6차례 불광(佛光)을 보았다. 동시에 이 몇 년간 우리 집의 유리 위, 식물 위, 오이, 가지, 파, 구기자, 각종 채소 꽃 등에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신성한 우담바라를 볼 수 있었다. 사부님의 격려에 매우 감사드린다!

최근 몇 년 나는 시내에 와서 거주하고 있어서 환경이 바뀌었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는 형식은 새 환경에 조정해야 했다. 시내에는 대법제자들이 많으니 나눠주고 붙이는 자료도 많다. 때문에 시골처럼 맹목적으로 붙일 수 없었다. 2015년부터 나는 우편 진상을 하는데 이 일에 많이 투입했다. 중생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구세력이 틈을 타지 않도록 대법 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했다. 매번 부치는데 한 우체통에 10통이 넘지 않도록 했다. 큰 시내 구역에는 처음에 6개 우체통에 넣을 수 있었다. 현재는 두 개만 넣을 수 있다. 또 두 개는 한 번에 한 두통만 넣을 수 있다.

하지만 공무원, 검찰, 법 계통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매 주 한 차례씩 넣었으며 다 합해 20여 통 정도였다. 이렇게 매년 천 통 이상을 보냈다.

작년부터 나는 또 주민 소식지 상자에 직접 넣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방법은 비용을 절약하고 또 더 많은 진상 자료를 넣을 수 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하여 나는 이 방법으로 천여 통의 편지를 보냈고 우편료 천 위안 이상을 절약했다. 나는 또 양피지로 편지 봉투를 직접 만들어 큰 소책자를 넣고 진상전단지를 넣어 봉한 후 명절에 사용하는 붉은 봉투를 보내는 식으로 친척 친구 등에게 주어 효과가 좋았다.

종합하면, 내가 사람을 구하는 일은 나는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반드시 마음을 들여서 해야 진정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계의 중생들에게 떳떳해야 하고 자비로운 은사께 미안해서는 안 된다.

5. 한 사람이 연공하여 온가족이 이익을 얻다

내가 대법을 수련한 지 20여 년 동안 하는 일이 법의 표준에는 아직 멀지만 사존께서는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다. 동료, 동창 누구든 나를 보면 말한다. “너 많이 변했구나, 갈수록 젊어져!”

나는 대법을 배운 사람이니 속인과 같을 수 있는가? 매번 이럴 때 나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삼퇴를 돕는다.

우리 아이들도 대법을 매우 믿으며 많은 이익을 보았다. 딸과 사위는 좋은 직장에 다니며 수입도 좋다. 이미 각자 자동차와 아파트가 있다.

남편은 내가 대법 공부하는 것을 지지하며 신체도 좋고 매일 ‘논어’를 외우며 연공도 한다. 평소 가부좌 연공도 배워서 한다.

사부님께선 나와 식구들을 위해 매우 걱정하시며 우리 온가족에게 막대한 복을 주셨다. 나와 가족들은 내심으로부터 사존께 감사드린다.

이상으로 지난 20여 년의 수련과정을 회고해 보았다. 현재 나는 어려서부터 겪었던 그런 고생들은 모두 오늘 법을 얻고 수련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줄곧 나를 보호해주셨다. 내심으로 사부님의 무한한 은혜에 감사드린다. 나는 대법 속에서 주조되고 승화한 생명이다. 앞으로는 오직 법공부와 사람 구하는 일을 많이 하며 나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만이 사존께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 될 것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