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방행
【정견망】
최근 나는 정견망에 올라온 윤회 속 역할에 대해 깊이 있게 토론한 두 편의 문장[역주: 《윤회 속 생명의 역할과 인연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와 《우리 생명의 역할을 다시 말한다》를 가리킨다.]을 봤는데 말한 내용이 아주 좋고 또 아주 옳다고 본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나 자신의 의견을 말해 여러분들과 함께 교류하고 토론해보고자 한다.
지난 2~3년간 《천애심법(天涯尋法)》 시리즈 문장을 써오면서 나는 늘 사부님께서 친히 이끄신 션윈(神韵)공연을 생각하곤 했다. 큰 막이 열리면 천국의 성스런 풍경이 펼쳐지고 그런 후 중신(衆神)들이 서약하고 세상에 내려와 사부님의 인도 하에 세상에 내려온 뭇신(衆神 대부분 사람 몸으로 나타남)들은 중화 5천년 신전문명(神傳文明)이란 이번 역사의 큰 연극을 개창하고 연기했다. 만주족, 한족, 장족, 몽골족, 위구르족, 아미족, 백족(白族), 묘족 등 서로 다른 민족의 무용이 잇따라 무대 위에 등장하면 서로 다른 여러 지역의 무용과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동서양의 장점을 결합한 음악 및 다양한 역사 이야기와 전설에서 소재를 택한 무용극이 펼쳐진다. 여기에 대법제자가 박해받는 장면과 사부님께서 직접 가사를 쓰신 가곡(歌曲)이 더해지면서 공연은 그야말로 눈 돌릴 틈도 없는데 마지막에 겁난(劫難)이 닥치면 주불(主佛)께서 출현해 위험한 국면을 막아내시고 박해를 끝내면서 신불(神佛)이 크게 나타나고 대법이 세계에 널리 전해진다.
나는 늘 머릿속으로 션윈공연을 생각하는 동시에 생각한다.
‘만약 역사상 신전문화의 수많은 기초다짐과 윤회전세(輪回轉世)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대법을 알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물론 극히 특수한 상황은 예외로 하는데 그것은 바로 직접 법에 동화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극히 적고 극히 적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대다수는 모두 만장(漫長)한 역사과정을 거쳐서야만 비로소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구우주(舊宇宙)의 각종 미성숙한 기제와 불완전하고 원용(圓容)하지 못한 지혜에 구세력의 교란과 파괴가 더해졌다. 그렇다면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연기한 일체는 사실 모두 여의(如意)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큰 교란을 가져다주었다. 구세력은 역사상 우리의 일부 은원(恩怨)을 이용하고 법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족을 이용해 우리를 교란할 것이다. 물론 과거 일체의 수많은 요소들 역시 우리 마음의 매듭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왜 처음 간 어떤 지방이 그렇게 친숙하게 느껴지는가? 또는 처음 만난 어떤 사람이 아주 친근하게 여겨지는가? 하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은 모두 과거의 일이고 모두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맡아 연기한 역할들이다. 어쩌면 비장한 역할이었고 어쩌면 평범한 역할이었으며 또 어쩌면 부정적인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과거 역할 속에 빠져 있을 때면 그럼 사악한 생명은 과거의 요소를 이용해 그를 교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세력에게는 구실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당신이 원하던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아마 내가 생각한 것은 모두 과거에 얼마나 휘황했는가 하는 것으로 나는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힘도 없고 무력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그 누구든 모두 부면(負面)적인 요소의 영향이나 또는 일부 여의(如意)하지 못한 경력과 결말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한 사람이라면 바로 그와 같다. 당신이 이 사람의 좋은 일면은 남기되 좋지 않은 일면은 남기지 않으려 한다고 말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과거의 특정한 역할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사실 박해를 초래할 수 있으며 이는 단순한 집착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 속 역할을 너무 중시하거나 심지어 조금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말할 것이다.
“기왕 이렇다면 그럼 당신은 왜 그렇게 많은 윤회 류의 문장을 써왔는가?”
나의 대답을 말하자면 이는 중공 사당 무신론의 영향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많은 경우 일부 동수들은 비록 20년을 넘게 수련했음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무신론의 영향이 너무 깊어서 수시로 뒤집혀 나오곤 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사실 윤회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꺼내기만 하면 아마 많은 사람이 놀랄 것이다. 사실 더 깊이 파보면 바로 무신론의 요소가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자신이 만지거나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곧 믿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비록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일정한 수량을 차지한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윤회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즐겨듣고 보는 일화의 형식을 사용해, 순전히 이론을 말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생동감 있게 윤회라는 현상과 윤회의 근본목적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대법을 인식할 수 있고 법을 얻을 수 있는 터를 닦기 위해서다.
기왕에 이런 목적이 명확하자면 그럼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소재를 선택할 때 나는 주인공(역사적으로나 또는 오늘날)이 일찍이 누구였는지 그 자체를 중시하지 않는다. 내가 비록 예의를 몹시 중시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는 늘 일체는 다 배역을 연기하는 것인데 왜 배역 자체를 중시한단 말인가! 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일반적으로 늘 문장 안에서 어떤 높은 계층의 인물이 출현하더라도 문장 말미에서 구체적으로 누구라도 대응시키지 않는다. 그저 모호하게 한번 언급하면 끝이다. 좀 희미하게 말해 사람들이 이것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외에 신계(神界)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펼쳐냈는데, 이 《천애심법》 시리즈에서 나는 수많은 천상의 경치와 각기 다른 지역의 일부 요소들의 유래에 대해 썼다. 사실 이런 것들 역시 모두 ‘남의 훌륭한 의견을 듣기 위해 미숙하나마 내 의견을 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것 역시 모두 아주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써내어 동수들과 세인들을 일깨우고, 동수들은 보다 정진하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하길 바라고, 속인들은 진상을 명백히 알기를 바란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런 하나의 목적에 불과하다.
역사의 관건적인 시각에 만약 우리가 역사상 법을 얻기란 쉽지 않았음을 알고 생명이 일시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든 모두 오늘날 이 대법을 위해 온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많은 경우 더욱 정진하고 중생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근본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진정으로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 중에서 대법에 대한 이해와 바른 깨달음을 닦아내야만 비로소 정진하는 근본 동력이 될 수 있다. 사부님과 대법이 없다면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으며 정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다시 가장 중요한 한 점을 설명하자면 윤회를 거절하거나 지나치게 윤회문장 보기를 좋아하는 동수들은 사실 모두 사람마음과 관념이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명백해야 하는데 우리가 배우는 것은 바로 이 법 자체이지, 절대 사람이 되기 위해서거나 또는 대법제자 자체가 되기 위함이 아닌데, 이는 우리 수련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수련과 대법제자가 되는 것 자체는 우리를 성취하는데 필요한 방식이지 결코 최종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사람을 떠나 진정으로 원만해 하늘로 되돌아가서 그 한 층차의 우주와 중생을 위해 이후 만장한 세월 속에서 영원히 책임져야 한다! 이것만이 바로 최종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람 속의 표현을 중시하지 말아야 하며 또는 집착하며 내려놓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장애이고 모두 교란이 된다. 내가 윤회를 쓰는 목적은 수련인으로서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모두 더 정진하고 사유방식을 한번 확장했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문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즐겨 보는 이가 있다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의 관건적인 시각에 나는 내가 쓴 문장이 동수들 사이에서 논쟁과 파동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는다. 인연이 있어 만났고 만약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럼 원하는 대로 보면 된다. 그 후 법에서 정진실수(精進實修)하고 모든 사람마음을 내려놓으며 우리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마땅히 생각하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은 개인의 견해로 경지(境界)에 한계가 있으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2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