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안으로 찾아 아주 깊이 감춰진 구하는 마음을 닦아 없애다

글/ 산동 대법제자 중생(重生)

【정견망】

최근 수련 중에 몇 가지 나를 반성하게 만든 작은 일들이 있었다. 이를 적어내 여러분들과 함께 교류하고자 한다.

1. 동수를 돕는 중에 결과를 바라는 마음이 존재

우리 법학습 소조에는 이미 2년 이상 혼자서는 살기 힘든 노년 동수가 있었다. 나는 작년 11월부터 이 법학습 소조에 참가해왔다. 처음에 간 목적은 동수와 함께 법공부를 하면 동수는 분명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심성이 제고되어 반드시 난관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우리 법학습 소조에서는 매번 법공부를 끝낸 후 늘 심성을 제고하는 방면에서 교류를 진행했다. 법학습 교류를 통해 노년 동수는 심성이 빨리 제고되었고 안으로 찾는 것을 배웠으며 자신에게 아주 많은 사람마음을 찾아냈다. 이렇게 하자 외관상으로도 아주 큰 변화가 있었고 정신방면에서도 변화가 컸다. 주위 가족들에 대한 변화 역시 아주 컸고 성격도 명랑해졌다.

하지만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언제부터인지 나는 문득 자신이 동수더러 내려놓으라고 했고 동수더러 자신의 결과가 어떤지 보지 말라고 했음에도 오히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을 느꼈다. 매번 늘 동수에게 기적이 나타나길 희망한 것 같았고 늘 동수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우뚝 설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내게 이런 감각이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욱더 동수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법공부를 끝낸 후 집에 돌아가서 사부님의 설법을 학습하는데 “당신이 밖을 향해 구한다면 아무리해도 구할 수 없다”(‘전법륜’)를 읽었다.

그렇다, 나는 늘 동수의 신체 외관 변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구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결과를 구했으니 어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는가? 대법 수련에서는 구함이 없이 저절로 얻음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어찌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주특성과 바로 정반대가 아닌가? 내게 결과를 구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동수를 도울 수 있겠는가?

이것을 찾아낸 후 나는 “결과를 구하는 사람마음을 멸(滅)한다”는 일념을 발출했다. 그 후 나는 마음이 아주 가벼워졌고 매 차례 법학습 소조에서 더는 노년 동수의 외관변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렇게 하자 법학습 효과에도 큰 돌파가 있었고 매번 ‘전법륜’을 한 강 읽을 시간에 우리는 두 강을 읽을 수 있었고, 법에서 교류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2. 자신이 쓴 문장이 발표되길 구하는 마음

2016년부터 나는 명혜망에 짧은 문장을 꾸준히 써오고 있다. 처음 쓸 때는 문장이 발표되는 확률이 높지 않았다. 나는 당시 자신의 문장력이 낮아서라고 여겨 명혜망에 발표된 다른 동수들이 쓴 문장을 많이 학습하면서 수준이 점차 제고되었다. 그 후로는 매번 동수들을 도와 문장을 정리하는 것이 내 수련의 일부분이 되었다.

나는 매년 동수들을 도와 백 편 이상의 문장을 정리한다. 동수들의 문장 중에서 명혜망에 발표된 것도 아주 많았다. 동수들이 기뻐하면 나도 자연히 즐거웠다. 자신이 쓰는 문장에 대해 나는 최근 몇 년간 아주 중시해왔다. 특히 2020년 2월부터 지금까지 약 1년이 넘는 시간에 내가 쓴 26편의 문장이 명혜 동수의 수정을 거쳐 발표되었다. 또 여러 편이 명혜라디오나 명혜주간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희심이 생겨났다. 올해 4월, 나는 동수들의 원고를 정리한 후 교류문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연속으로 6편의 문장을 썼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장이 아주 참신해서 반드시 발표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 6편의 문장 중에서 오직 1편만이 발표되었고 나머지 5편은 다 발표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내가 쓴 문장은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데 왜 명혜 동수의 인정을 받지 못할까?

다시 써보자. 나는 또 2편을 썼지만 역시 1주일이 넘도록 발표되지 않았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으로 찾아보니 나는 왜 자신의 문장이 발표되는 것을 이렇게 중시하는가? 문장이 발표되면 기뻐하는데 이는 환희심이 아닌가? 발표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고 실망하는데 약간의 원망까지 있다. 이게 무엇인가? 이는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문장을 쓰고 발표를 구하는 사람마음이 아닌가? 문장을 쓰는 것은 법을 실증하려는 것인데 나 이것은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 아닌가? 대법 일을 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더러운 사람마음이 있단 말인가? 나 이것은 일을 할 때 결과를 구하는 사람마음이 다시 나온 게 아닌가?

이번에 나는 그것을 나의 발정념 속에 넣고 매번 발정념을 할 때마다 “결과를 구하는 사람마음을 멸한다.”는 일념을 더했다. 요 며칠 아주 좋아졌음을 느낀다.

3.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중에 결과를 구하는 마음이 존재

사람을 구하는 도중에 늘 진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나는 늘 마음속에 불편한 느낌이 존재했다. 나중에 나는 왜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이는 결과를 구하는 사람마음이 아닌가? 나 이것은 결과를 구하는 사람마음으로 나의 생활에서 시시각각 도처에 두루 퍼져 있는데 이 사람마음은 왜 이다지 엄중한가? 결과를 구하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게 아닌가? 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는가? 이는 구우주 생명의 위사(爲私)한 표현이 아닌가? 일을 했으니 좋은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결과를 구하는 이런 사람마음은 사(私)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이 사람마음의 뿌리를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이 사심(私心)이었다. 나는 법학습을 더 강화해 법학습을 통해 이 사람마음을 제거하려 했다.

이번에 안으로 찾음을 통해 나는 결과를 구하는 마음을 찾아냈다. 그러나 결과를 구하는 마음을 닦아버리는 것에만 주의했을 뿐 아직 충분하진 않다. 반드시 결과를 구하는 마음을 생겨나게 한 뿌리를 닦아버려야 하는데 사실 일체 사람마음의 뿌리는 모두 이 사심이다. 수련인이 이 사심을 닦아버리지 않고 오직 표면적으로 개별적인 사람마음만 닦는다면 이는 마치 부추를 베는 것과 같아서 하나의 사람마음을 닦아버린 후 또 다시 생겨날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나는 반드시 결심을 내리고 이 사심을 닦아 없애는데 공력을 들여야 하는데, 자비롭고 선한 마음을 닦아내 이 사심을 자비로 융화해 없애야 한다.

개인의 작은 체험이니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78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