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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움・질투・원망’을 제거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전에 나는 ‘부러움・질투・원망’이 하나의 생명임을 모르고 그것들을 ‘부러움, 질투, 원망’ 3가지 좋지 않은 상태로 여기면서 자신이 늘 그것들을 구별해서 상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한 가지 우연한 일을 통해 나는 ‘부러운’ 나머지 ‘질투・원망’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명리정(名利情)’ 역시 그 속에 섞여 들어간 것을 관찰했다. 수련을 다년간 했음에도 나는 마치 처음으로 이렇게 선명하게 그것들의 자취를 발견한 것 같았는데 과거처럼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 게 아니었다.

그날 나는 막 인쇄를 바삐 끝내고 잠시 쉴 생각에 침대위에 누워 아이패드를 보았다. 우연히 해외 사이트에 어느 억만장자의 저택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는 정말로 시야가 크게 넓어졌다. 호기심으로 나는 몇몇 비슷한 영상들을 보았고 그중 기억나는 것은 한 부호가 집에 소금이 떨어지면 비행기를 몰고 산 아래로 내려가서 소금을 사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사는 것이 정말로 부러웠다.

부러운 나머지 나는 만약 내가 이렇게 부유하고 으리으리한 저택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니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외부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돗자리 하나 깔 수 있는 작은 땅에서 조용히 가부좌하고 연공하면 충분한 것이지 지나치게 많은 요구는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여기 속인사회에 와서, 마치 여관에 투숙하듯이 며칠 좀 묵었다가 총총히 간다.” 일부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미련을 두고 자신의 집을 잊어버렸다.”

만약 내가 이렇게 많은 돈과 재물이 있다면 또 직접 신당인과 대기원 매체에 기증해서 사람을 구하는데 사용하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호화로운 주택에 사는 것은 정말 너무 큰 낭비다.

생각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나는 왜 그들에 대해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못하는가? 부러운 나머지 여전히 그들의 재산을 질투하는 것 같고 마치 나는 왜 비슷하지 않은 지 원망하는 것 같다.

전에 본 문장이 하나 생각났다. 인도 어느 나라에서 한 신하가 세간에서 무궁한 부귀와 영화를 누리자 그 나라의 국왕마저 그를 질투해 재산을 빼앗고 생명을 해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인과(因果)를 알게 되었다. 전세(前世)에 한 상인이 산길에서 병든 승려를 만났다. 상인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털어 정성껏 공양하고 집과 음식 및 각종 생활도구들을 보시하고도 아무런 원망도 없었다. 그 상인이 바로 지금의 이 신하였고 당시 병든 승려가 바로 석가모니부처였던 것이다.

금생의 재부(財富)는 전세의 바람과 복덕이 쌓인 것으로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위해 내심에서 우러나온 그런 기쁨과 축복을 지녀야 옳은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세계 파룬따파의 날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장 간고하고 어려운 시기를 당신들은 모두 걸어지나 왔다.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는데 초기의 대법제자와 역사상 나와 인연을 맺은 이, 혹은 사부를 따라온 이들은, 당신들 개개인 모두 다 만약 속인 사회에서 뭘 좀 하려고 한다면, 당신들 개개인이 모두 억만장자이며, 당신들 개개인이 모두 이 사회의 유명인사이며, 당신들 개개인이 모두 높은 계층의 사람이다. 당신들은 금생에 와서 대법제자가 되어, 그런 것들을 모두 포기했다. 당신들이 돈을 벌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벌써 돈을 벌 수 있었는데, 더는 조그마한 이익 때문에 자신 생명의 오랜 소원을 망치지 말라.”

이 작은 일을 통해 나는 자신의 공간장(空間場) 속에 존재하는 그런 ‘부러움・질투・원망’을 보았고 배후 ‘명리정(名利情)’의 그림자를 보았으며 그런 것들이 모두 좋지 않은 물질에 속하고 좋지 않은 생명에 속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마땅히 그것들을 정시(正視)하고 그것들을 깨끗이 제거해야 하며 일사일념(一思一念)에서 법으로 가늠해 자신을 아주 순정하게 만들어 교란 받거나 미혹당하지 말아야 하며, 조사정법(助師正法)의 길 위에서 착실하고 착실하게 자신을 잘 닦아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중생 구도의 사명을 보다 더 잘 완성할 수 있고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와 고도(苦度)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작은 체험을 써내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하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9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