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서부대법제자
【정견망】
션윈(神韵)은 사부님께서 친히 하신 사람을 구하는 항목이자 제자들에게 얻기 힘든 수련의 기회를 열어주신 것이다. 나는 매번 션윈 홍보에 참가할 때면 늘 평소 관찰하지 못했던 부족함을 사부님께서 표면으로 밀어주시는 것을 발견했는데 만약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착실히 수련한다면 수련에서 모두 하나의 제고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동수와 션윈 전단지를 배포하러 나갔는데 매번 나가면 거의 하루 종일이었다. 때문에 내가 멘 배낭 안에는 먹을 것과 물이 들어 있었고 손에는 또 션윈 전단지가 든 봉투를 들었다. 당시 날씨가 아주 더울 때라 나는 또 물 한 병을 짐 위에 놓았다. 이때 머릿속에 ‘물이 새지 않을까?’하는 염두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나타나서 ‘새도 별 문제 없을 거야.’라고 했다. 나는 다른 많은 생각이 없었고 그저 수시로 병을 똑바로 세우고 또 마개를 꽉 닫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오후가 되어 우리는 대기원(大紀元) 신문을 배포하러 나갔다. 이때 나는 이미 물병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물이 약간 흘러나온 것을 발견했는데 다행히 그날 많은 휴지를 같이 넣어두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은 휴지가 흡수했다. 내가 전단지를 한 장 한 장 꺼내서 검사해보니 2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나는 몹시 낙담하고 자책했다. 어쩌면 두 생명이 이 일 때문에 구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몹시 상심했다. 나는 이는 진정한 자신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처음에 ‘새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했던 생각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부님께서는 《미국플로리다법회설법》에서 “사람 자신에게 정념(正念)이 없으면 우주 중에서, 삼계(三界) 중에서, 일체 좋지 못한 것이 사람의 신체를 끊임없이 흐를 것인데, 심지어 여기에 머문다 해도 사람은 의식(意識)하지 못한다. 사람은 바로 이처럼 통제당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입자가 소통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자신이 일부 큰 집착심에 대해서는 경각심이 있지만 사상 속의 외래염두에 대해서는 오히려 진지하게 추적하고 조사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주원신(主元神)을 수련하는데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이번 교훈이 나를 경각시켰고 나는 진지하게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을 대하기 시작했다.
가령 아침에 연공을 하지 않고 잠을 더 자려고 하는 이런 염두는 나 자신에게서 온 것인가? 연공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곧 다리를 내려놓을 생각을 하는데 이런 염두는 나 자신인가? 또 중국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진상을 알릴 시간이 되면 긴장하고 두려워하는데 이것은 나 자신인가?
이렇게 한동안 수련을 거친 후 나의 주의식은 갈수록 강대해졌고 본성(本性)의 일면이 되살아났다. 전에 문학작품을 보다가 한 위대한 신(神)이 인간세상에서 겁난을 겪으며 모든 신통이 다 봉쇄되어 누구나 다 그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아주 가련하게 여겼었다. 지금 내가 발견한 것은 진정으로 미혹 속에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는 당초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조사정법(助師正法)하러 내려온 것으로 일단 속세의 그물에 들어와 본성을 미혹시킨 게 몇 년인지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제외하고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으며,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다.”(《2015년뉴욕법회설법》)
아마 내가 나의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었기 때문인지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진일보로 수련의 내함을 내게 점화해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고기를 먹고 안 먹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관건이다.”
나는 내가 수련 중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허비했음을 발견했다. 늘 고기를 먹는 것은 욕망이고 집착이며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바로 수련하는 것이라고 여겨왔는데 사실은 굽은 길을 걸은 것이다. 사실 우리의 수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선택 과정인데 바로 인념(人念 사람의 생각)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신념(神念 신의 생각)을 선택하느냐? 즉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신이 될 것인가?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부동한 층차의 우주의 법에 선택당하는 것이다. 고기를 먹고 먹지 않는 것은 모두 사람의 생각이고 진정한 신의 생각은 마땅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이다.
대법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운인가, 또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면 또 얼마나 애석한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매 한 구절의 법에는 모두 끝없는 내함(內涵)이 있지만 수련 중에서는 오히려 그 어떤 지름길도 없다. 오직 곧이곧대로 초등학생의 숙제를 잘해내야만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중학생이 마땅히 알아야 할 법리를 알려주신다. 또 우리가 진지하고 성실하게 중학교의 문제를 잘해내면 사부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대학에서는 마땅히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알려주신다.
어릴 때 산수 문제를 풀 때 배후의 정해진 이치를 알기만 하면 문제가 어떤 유형으로 변화하든 다 해결할 수 있다. 수련 중에서 만약 사부님의 법(法)을 투철하게 배울 수 있다면 굽은 길을 아주 적게 걸을 수 있다. 사실 아주 오랜 기간 나는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몰랐다. 때로는 심지어 관(關)을 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넘어가지 못했다. 종종 절반을 넘겼을 때 “이것도 너무 화가 난다, 됐다, 넘기지 못하면 일단 한바탕 하고 나서 다시 말하고 다음에 다시 넘기자!”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서서히 사부님의 법을 깊이 배워가니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특히 연공인(煉功人)은 수련과정 중,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당신에게 조그마한 난(難)을 설치하는데, 그것은 모두 당신 자신의 업력이고 당신 자신의 난으로서, 부동한 층차에서 당신에게 배열해 당신을 제고하게 한다.”(《전법륜》)
나는 생각해보았다.
‘이것은 모두 나 자신의 업력이고 나 자신의 난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내게 추가로 더해주신 것이 아니고 또 나를 도와 그렇게 많이 감당해주셨는데 내가 요만한 것도 잘 넘기지 못한다면 사부님께 면목이 설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자 곧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오직 자신이 넘기려고만 하면 넘기가 어렵지 않은데 원망도 미움도 없다. 나중에 서서히 나는 진심으로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가련해졌다.
사부님께서는 “업이 커서 이미 그 몸을 봉(封)하고, 그 지혜를 닫아버렸으니, 본성이 없구나.”(《정진요지》〈깨달음〉)라고 하셨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소중한 덕을 내게 주고 나의 업력을 가져가서 본성이 존재하지 않게 될 때면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너무나 가련한 게 아닌가? 내가 가급적 잘해서 다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줄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덕을 지키게 할 수 있다.
나중에 착실한 수련을 통해 나는 법리에서 사람이 왜 수련을 해야 하는지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법은 부동한 층차의 생명에게 부동한 표준이 있기 때문이다. 고층생명은 그렇게 순정(純淨)하고 성결(聖潔)하니 고급생명이 되고 싶다면 주동적으로 그런 좋지 않은 집착심을 닦아 없애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내가 이 점에서 명백해지자 나는 자신이 아주 냉정하게 집착심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면 집착심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게 되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 내가 수련 중의 ‘선택’이란 이 한 층의 내함을 깨달았을 때 나는 사부님께서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하신 한 가지 일화가 떠올랐다.
“과거에 한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거리를 지나다 갑자기 한 사람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도를 닦을 만한 사람이었다. 수도인은 이 사람을 제도하려고 그를 도제(徒弟)로 삼고자 했다. 수도인이 이 사람에게 물었다. “나를 따라가 수도할 생각이 있는가?” 이 사람은 오성(悟性)과 근기가 아주 좋기에 대답했다. “수도하고 싶습니다.” “자네가 나를 따라갈 용기가 있는가?”라고 하자 그는 대답했다. “있습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자네가 다 따라올 수 있겠는가?” “예.” “좋아, 그럼 자네가 나를 따라와 보게!””
나는 깨달았다. 사실 우리가 수련 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한 가지 문제는 바로 “당신이 과감히 사부를 따라 갈 수 있는가?”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물론 이렇게 쉽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묻진 않을 것이며 각양각색의 형식으로 환화(幻化)될 것이다.
가령 병업(病業)을 예로 들면 지금 내가 이해하기에 왜 사상 속에서 자신의 병을 내려놓지 못하면 병이 낫지 않는가? 왜냐하면 연공을 통해 병이 낫기를 생각할 때면 이 일에서 이미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몸이 아주 편안한 한 속인이 되기로 선택한 것인데 속인이라면 생로병사 이 층 법리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속인의 이 이치를 일반적으로 대각자는 쉽게 건드리지 않고, 더욱 높은 각자일수록 속인의 이치를 더욱 파괴하지 않으며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전법륜》)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병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병원에 가지 않도록 노력하면 수련하는 것인가? 사실 여전히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데 공력을 들인 것이다. 이 문제에서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바로 “당신이 과감하게 사부님을 따라갈 수 있는가?”다. 만약 내심에서 우러나온 순정한 일념으로 “하겠습니다, 사부님 제가 과감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신념(神念)이며 신(神)은 속인 이 층의 이치에 제약받지 않는다.
사실 가령 정(情)의 관을 넘긴다든가 다른 때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자신의 제1신분에 대한 인정이 사부님의 제자인가? 아니면 여전히 사람 속에서 연기하는 이 역할인가? 집에서 하는 처자나 자녀의 역할인가? 기점의 차이가 뒤에 걸어갈 길의 차이를 결정한다.
최근에 사부님의 《정진요지》〈뿌리를 캐다〉를 다시 공부해보니 이 경문은 사부님께서 1998년에 쓰신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나는 마침내 내가 있는 층차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셨단 말인가!
지금 고개를 돌이켜 예전의 나를 보면 그야말로 말썽꾸러기였다. 너무나 많은 핑계가 있었고 하나하나 분명히 알게 될 때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갔으며 닦는 것이 너무나도 느렸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대법의 법리로 한 층 한 층 나를 씻겨주셨고 먼지에 봉폐된 나의 본성을 일깨워주셨다. 사실 한 층 한 층의 관념을 벗겨내는 것은 한 층 한 층 사람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수련은 본래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그렇다! 그럼 내가 가서 원용(圓容)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아니다! 그럼 내가 바로 잡아야 한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들 감사합니다!
이상은 단지 개인이 소재한 층차에서 수련체득에 불과하니 만약 바르지 못한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법을 스승으로 삼고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711
